Big Questions ·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1 - 4 回

2013.08.17 12:24

arcadia 조회 수:464 추천:34




김대식의 'Big Questions' 1 - 4 回 / 중앙SUNDAY Magazine





































































 


'Big Questions'   영혼이란 무엇인가








▲ 지옥에서 저주받은 영혼들을 그린 윌리엄 부게로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1850).














 
  영혼은 원시 인류 최초의 ‘킬러 애플리케이션’






인생길의 한중간에서 올바른 길을 잃어버렸기에 어두운 숲 속에서 헤매야 했던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뜻밖에 시인 베르길리우스(Vergilius)를 만나 지옥과 천국 ‘관광’을 떠나게 된다.

단테의 『신곡(神曲:La divina commedia)』은 이렇게 시작하고,
지옥에선 인간의 눈으로 보기엔 너무 잔인하고 비극적인 장면들이 방대하게 펼쳐진다.

프랑스 화가 윌리엄 부게로(William Bouguereau)는 서로 물어뜯는 두 사기꾼들을 지켜보는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라는 그림으로 유명해졌는데, 저주받은 이들이 하필이면 사이비 과학자와 명의 도용자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과학자인 나로선 흐뭇함을 숨길 수 없다.
그런데 잠깐! 누가 누구를 물어뜯는다는 말인가? 이 두 사기꾼은 이미 죽은 자들의 저주받은 영혼이 아닌가?
영혼이면 당연히 몸이 없을 것이고, 이빨은 몸의 한 부분인데 몸이 없으면 이빨도 없을 것 아닌가.
그런데 없는 이빨로 어떻게 없는 목을 물고, 없는 목이 없는 이빨에 물렸는데, 어떻게 고통을 느껴 없는 몸을 뒤틀고 있는 것일까?




신곡은 문학작품이고, 단테는 예술가다. 그가 초강력 이미지를 통해 중세기인들이 막연히 두려워하던 지옥을 구체화했다는 사실은 여기서 무의미하다.
예술가는 진실을 추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신곡』은 단지 문학적 우화일 뿐이고, 핵심은 다른 데 있을 것이다.
몸은 썩어 구더기 밥이 되어도, 죽은 후 무언가가 계속 남으며, 영혼이라 불리는 그 무언가는 저주받아 마치 서로 물어뜯을 때와 같은 고통을 느낄 수도 있지만,
구제받으면 로마 원로원의 하얀 관복(토가)을 입은 천사들과 함께 영원히 찬송가를 부르는 듯한 행복을 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그래서 우주의 모든 물체들을 근본적인 두 가지로 나누었다.
구더기와 인간의 몸같이 3차원적 공간을 차지하며 흐르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res extensa(?)’ 와 시간의 영향은 받지만
공간은 차지하지 않는 인간의 기억, 자아, 영혼 같은 ‘res cogitans’ 들로. 몸은 만들어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참으로 약하고 하찮은 존재다. 하지만 영혼은 영원하며 육체는 영혼이 잠시 쉬어가는 운반체일 뿐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는 그렇기에 얼마 후 파괴될 그의 몸보다는
영원히 우주에 홀로 남아 새로운 몸을 찾아야 할 그의 가엾은 영혼을 걱정하며 시를 쓰기까지 했다.



하드리아누스의 걱정에 대해 생각해 보자.

손톱을 아무리 깎아도 나의 자아는 남아 있을 것이다.
적어도 손톱이 영혼의 운반체가 아닌 건 분명하다.
팔이 잘려 바닥에 던져진다면 엄청난 고통을 느끼겠지만, 고통을 느끼는 ‘나’는 여전히 남아 있지 팔과 함께 바닥에 던져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뇌는 다르다.
프랑스 혁명 당시 단두대에서 사형당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머리가 잘리고 산소 공급이 중단돼 뇌가 파괴되는 순간 두 가지 중 하나를 경험했을 것이다.
뇌가 멈추는 순간 동시에 모든 게 끝났을 수 있다. 잘린 목을 바라보는 몸도, 몸을 바라보는 잘린 목도 없다.
나의 기억과 자아는 뇌가 정상으로 작동하는 동안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뇌가 죽으면 나의 모든 기억이 파괴되고, 나의 자아가 전멸되며 나의 영혼도 끝난다.



물론 우리의 영혼이 뇌라는 고깃덩어리와 함께 전멸된다는 사실은 그리 반갑지 않다.
그럼 한번 데카르트, 단테, 하드리아누스를 믿어보면 어떨까?

뇌가 파괴되는 순간 마리 앙투아네트의 영혼은 육체를 떠나 저주받거나 구제받거나
아니면 새로운 몸을 찾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을 거라는 조금 더 희망적인 가설을 해볼 수 있겠다.
하지만 영혼이 육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과학적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어두운 밤길, 깊은 숲, 홀로 있는 집에서 우리는 가끔 막연한 공포와 유령 같은 미지의 존재를 느끼곤 한다.
그러나 그건 단지 진화적으로 어두움과 혼자 있기를 회피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뇌가 강력한 환각을 통해 우리들에게 빨리 도망치라고 알려주는 경고일 뿐이다.






1 수학자 앨런 튜링은 ‘기계가 지능과 영혼을
가질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2 스페인 엘 카스티요 (El Castillo) 동굴에서
발견된 약 4만 년 전 원시인의 손자국.[www.ub.edu]


하드리아누스에겐 미안하지만,
현대 과학적으론 육체와 독립된 영혼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영혼은 자아, 기억, 감정의 합집합이고 그것들은 특정한 뇌 기능들의 다른 이름들일 뿐이다.
외국인에게 ‘한국’을 소개시켜준다고 생각해보자.
한국 사람, K팝, 서울, 대전, 독도….

우리나라의 모든 걸 다 경험한 외국인이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떨까. “그런데 ‘한국’은 도대체 언제 보여주실 건가요?”

질버트 라일(Gilbert Ryle)은 이런 실수를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 라고 불렀다.
영혼이란 해마에서 만들어지는 기억, 전두엽에서 만들어지는 성격,
아믹달라에서 만들어지는 감정….

이 모든 것의 합집합이지, 그 집합의 또 다른 멤버가 아니다.
라일은 그래서 영혼과 자아는 뇌라는 기계에 어정쩡하게
얹혀살 거라고 근거 없이 우리가 믿는 ‘기계 안의 유령’이라며 비웃은 바 있다.


하지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기계 바깥의 유령’ 이지, ‘기계 안의
유령’ 이 아니다.
뇌를 하나의 박스라고 생각해보자. 박스가 있으면 박스 안엔 수납 공간이 생긴다.
그것이 우리의 자아다.
물론 박스 없이 독립적으로 떠돌아다니는 수납 공간이란 있을 수 없지만, 라일이 주장하듯 수납 공간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곤란하다.
자아는 뇌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모든 박스가 수납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적어도 바닥과 삼면이 막힌 박스여야 가능하다.

영혼도 비슷하다. 구더기에겐 자아가 없을 것 같다. 고양이나 강아지의 자아에 대해선 의심해볼 수 있겠지만,
원숭이와 인간 같은 영장류들은 분명히 자아가 있을 듯하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자아와 영혼이 있다는 확신을 사실 나는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면적 세상을 들여다볼 수 없다. 그래서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내가 만약
영국 여왕이라면 어떤 느낌일까?’라는 상상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영국 여왕이라고 상상하는 ‘나’를 느낄 뿐이다. 영국 여왕의 느낌을 가지려면 영국 여왕이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이미 영국 여왕이라면
영국 여왕일 때의 느낌을 상상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냥 나고, ‘내가 만약 나라면’이라는 질문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독일군의 ‘에니그마’(Enigma) 암호를 판독해 연합군 승리에 큰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연애자로 차별받다
백설공주처럼 독 바른 사과를 먹고 자살한 영국 수학자 앨런 튜링(Allen Turing)
다른 사람들도 세상을 보고 느끼는 자아와 영혼을 가지고 있는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비슷하게 생겼고, 비슷한 행동을 하며, 비슷한 인생을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 뇌 안에도 우리와 같은 자아와 영혼이 존재할 거라고
단순히 믿어주는 것이다.
영혼은 인간들 간의 믿음이며 배려다. 만약 먼 미래에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기계가 만들어지고 행동적으로 인간과 구별되지 않는다면,
그 기계 역시 자아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는 믿어주어야 한다. 그걸 거부한다면 우리는 16세기 스페인이 단지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로
남미 원주민들은 영혼을 가지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학살했듯이 인종차별과 비슷한 새로운 ‘기계차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스페인 칸타브리아 지역 엘 카스티요(El Castillo) 동굴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들로 유명하다.
적어도 4만 년 전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몇몇 벽화 중에는 작은 손자국 하나가 있다.
누구의 손이었을까? 자신의 손을 벽에 대고 흔적을 남긴 그 원시인은 어떤 생각을 했던 것일까?
어둑한 동굴의 벽에 그려진 그의 손자국은 깜박이는 횃불 덕분에 살아 움직이는 듯 보였을 것이다.

춤추는 그 손자국은 자신의 한 부분같이 보였을 것이다.



늙으면 약해지고 죽는다. 죽으면 숨을 쉬지 않는다. 숨이 바로 삶이다.

숨은 공기고, 공기는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지만 존재한다.
없어지는 건 싫다. 벽에 그려진 손자국은 나고, 나는 나의 손자국이다.
먼 훗날 나의 몸이 사라진 후 내 자식들 눈에 지금 내게 보이는 것과 같은 손자국이 보인다면,
나는 그들의 머리 안으로 들어가 계속 살게 된다는 말이 아닐까?



육체와 분리돼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영혼이란 과학적으론 불필요한 가설이다.
하지만 인류가 그런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면, 예술도 종교도 철학도 없었을 것이다.
뾰족한 이빨도 두꺼운 가죽도 없는 ‘털 없는 원숭이’일 뿐인 인간에게 세상은 끝없이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인간의 유일한 무기는 다른 동물들보다 큰 뇌였고, 뇌는 원인을 추구하는 기계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원인과 인과 관계를 추론하려 한다. 천둥은 왜 칠까? 밤은 왜 어두울까? 표범은 왜 우리를 잡아먹는 것일까?
내가 보고 느끼고 기억하듯 어쩌면 태양도 영혼과 자아가 있어 아침에 뜨길 원하기에 세상이 밝아질 수 있다.
구름도 영혼이 있고, 비는 구름이 원해야만 온다. 아! 그렇구나. 이제 모든 것이 설명된다.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모든 존재들은 그들만의 의지와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그 영혼들의 마음을 얻으면 우리는 오늘 또 하루를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인류는 영혼을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니다. 영혼은 인류가 발명한 것이다.

영혼은 먼 미래에 지구를 정복하게 될 원시시대 인류의 첫 킬러 애플리케이션이었던 것이다



… 중앙SUNDAY | 제312호·김대식 KAIST교수 | 2013.03.03

















 


'Big Questions'   우리는 왜 죽어야 하는가








▲ 우리는 왜 늙는 것일까? 궁극적으로 텔로미어라고 불리는 염색체 끝 부분(왼쪽 그림에서 빨간 부분)이 세포분열마다 점점 짧아지기 때문이다. [카보네이트 TV]














 
  텔로미어 유지하고 뇌 완전 복사하면 … 영생?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에겐 아름다운 딸 페르세포네가 있었다.

저승의 신 하데스가 반해 그녀를 납치하자 데메테르는 슬픔에 빠져 더 이상 곡식을 보살피지 않으니 온 세상이 황무지로 변해 인간은 신에게 제물을 바칠 수 없게 된다.
드디어 제우스는 하데스에게 딸을 엄마에게 되돌려주라고 명령하나 이미 저승 과일의 씨앗 4개를 먹어버린 페르세포네는 매년 4개월을 저승의 여왕으로 살아야 했다.
딸이 없는 4개월간 슬픔에 빠지는 데메테르는 겨울로 세상을 황폐하게 만들지만, 페르세포네가 되돌아오는 봄엔 만물에 꽃이 피고 생명이 부활한다.



미노아(Minoa)와 미케네(Mykene) 문명 때부터 알려졌던 ‘페르세포네의 납치’는 기원후 392년
로마 황제 테오도지우스가 기독교 영향 아래 폐쇄할 때까지 2000년 동안 고대 그리스 최고의 비밀인 ‘엘레우지니아의 신비’라는 이름 아래 숭배되었다.
엘레우지니아의 신비 중 최고의 신비는 선택된 극소수에게만 알려주었는데, 그 비밀을 세상에 밝히는 자에겐 사형선고가 내려졌다고 한다.
무엇이 그렇게 비밀스럽고 신비스러운 것이었을까? 아마도 풍성한 여름과 가을이
겨울엔 메마르듯,
모든 인간의 운명은 결국 죽음으로 끝난다는 사실을 되새겨 주었을 것이다. 아무리 대단하고 잘난 사람도 우선 태어났으면 죽어야 한다.

처음부터 다 정해진 연속극이다. 하지만 어쩌면 죽음은 끝이 아닐 수도 있다.

페르세포네가 죽음의 세상에서 돌아와 다시 봄이 되고 생명이 부활하듯,
인간에게도 부활이라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삶은 죽음을 부르지만, 죽음은 다시 새로운 삶으로 재시작한다는 영원한 존재의 가능성을 엘레우지니아의 신비는 보여주었을 것이다.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는 매년 4개월간 저승의 여왕으로 살아야 한다.
영국 화가
게이브리얼 로세티의 프로세피나(1874)






뇌 안의 모든 정보를 읽고 복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쩌면 영원한 자아를 가질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나는 인간이다. 고로 나도 죽는다.

너무나 당연하고 불편한 진실이기에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이 사실을 되새기는 순간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3000년 전 미케네인들과 공감하게 된다.

죽음은 슬픔이며 희망이라고. 하지만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슬퍼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 희망의 근거는 무엇일까?



우선 슬픔에 대해 생각해 보자. 나의 죽음이 싫고 슬프다는 말은 논리적이지 않다.
죽으면 나는 없고 싫거나 슬픔을 느낄 수 없게 된다. 느낄 수 없는 걸 슬퍼하거나 싫어할 수는 없다.
우리는 무언가를 상상할 때 마치 내가 그 무언가를 직접 지각하듯 상상하지만, 죽음만큼은 그런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나 자신의 장례식은 내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가 죽으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슬퍼할 것이기에, 그것이 나를 슬프게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죽으면 나는 없고, 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의 슬픔을 나는 느낄 수 없다. 물론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는다면 나도 슬플 것이다.
하지만 내가 슬픔을 느낀다면 그건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고, 나의 슬픔은 살아 있는 내가 느끼는 헤어짐에 대한 슬픔일 뿐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죽음 후의 무(無) 그 자체를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음 후의 무는 어쩌면 하찮을 정도로 무의미할 수도 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 이미 수십억 년 동안 존재는 존재했고, 우리가 죽은 후에도 우주는 수십억 년 동안 (얄미울 정도로) 잘 굴러갈 것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는 걸 우리가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듯이 우리가 더 이상 없는 죽음 그 자체를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죽음은 태어나기 전과 같다.



그래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슬픔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그건 삶과 죽음의
전이점에 대한 걱정일 것이다.
이건 충분히 걱정할 만한 문제다.
1606년 가톨릭 지지자로 제임스 1세 영국 왕을 국회의사당에서 폭약으로 암살하려다 잡힌
가이 포크스(Guy Fawkes)는 hanged, drawn and quartered, 그러니까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목을 매달았다가
다시 반 익사할 때까지 물에 집어넣었다가 아직 살아 있을 때 성기와 배를 자른 후 사지를 찢어버리는 별로 아름답지 않은 방법으로 사형되었다.

(필자 설명=16, 17세기의 공식 사형이었던 ‘익사 시키기’는 영어로 drawn이다.
일반에서는 drown이라고도 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둘 다 가능하다.)



우리가 이런 걸 두려워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하버드대의 스티븐 핑커가 ‘폭력에 관한 짧은 역사’에서 보여주었듯,
오랜 시간 동안 폭력을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인류는 계몽주의와 산업화를 거치며 점차 폭력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21세기엔 매일 약 15만 명 정도가 죽지만, 전 세계적으론 3분의 2, 그리고 선진국 중에서는 90% 이상이 비폭력적인 ‘자연적 노화’ 현상으로 죽는다.
확률적으로 우리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죽음보다 노화를 더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는 왜 늙는 것일까? 노화 과정 분석해보니




  • 그럼 노화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늙어야 하는가?
    왜 얼마 전까지 뛰어놀던 귀여운 아이는 어른이 되어야 하고,
    영원한 사랑을 간직하겠다던 두 젊은이는 노인으로 변해야 할까? 인간은 23쌍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는데,
    각 염색체는 텔로미어(말단 소립, telomere)라는 DNA 조각으로 끝난다.
    세포들은 주기적으로 세포분열을 통해 DNA를 복제하는데, 세포 끝 부분인 텔로미어는 복제되지 않아
    궁극적으로 분열 때마다 점차 짧아진다. 통계적으로 고양이는 8번, 말은 20번, 인간은 약 60번 정도 세포분열을 할 수 있다.
    더 이상 분열하지 않으면 세포는 노화해 결국 우리는 죽는다. 그럼 텔로미어가 잘리는 걸 막을 순 없을까? 다행하게도 가능하다.
    텔로머라아제(말단소립 복제효소, telomerase)라고 불리는 과정을 통해 세포가 분열해도 텔로미어의 길이를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
    암세포가 가장 유명한 경우다. 텔로머라이제가 활성한 암세포들은 끊임없이 세포분열이 가능하다. 암세포들엔 영원한 ‘삶’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가 바라는 건 암세포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능하면 젊고 건강한 ‘나’라는 존재로 영원히 살고 싶을 것이다.



    앞으로 먼 미래에 완벽하고 안전한 텔로머라이제가 개발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인간의 세포는 영원히,
    그것도 완벽하고 안전하게 분열할 수 있어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희망하는 세상일까?
    영원히 젊은 인간들은 영원히 번식할 수 있으므로 인구 증가, 식량문제 같은 실용적인 문제들이 생길 것이다.
    물론 해결책이 없는 건 아니다. 우선 영원한 삶은 법적으로 생식력을 포기한 자에게만 줄 수 있겠다. 내가 영원히 살기 위해선 내 후손의 삶을 포기하면 된다.
    내 후손의 삶은 어차피 포기해야만 할 수도 있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해마다 약 1000억t의 탄소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중 오로지 5억t 정도만 생태계에서 자연스럽게 생산된다. 그러면 나머지 995억t의 탄소들은 어디서 올까?
    바로 죽은 생명체의 시체들을 재활용하며 만들어진다. 죽음이 없으면 생명에 필요한 탄소의 200분의 1만 만들어진다.
    거꾸로 죽음이 있기에 지구엔 약 200배의 더 많은 삶이 만들어진다.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죽음 없는 세상에선 새로운 삶이 200배 덜 가능해진다.



    육체의 파괴를 ‘나’의 끝으로 걱정하는 인간들에게 엘레우지니아의 신비는 재생과 부활을 통한 자아의 영원한 삶이라는 희망을 주었지만,
    아이로니컬하게도 영원히 존재하는 건 나의 영혼이 아니라 재활용되는 나의 탄소들이다. 하지만 ‘나’는 내 탄소들이 아니다.
    나의 몸이라는 3차원적 공간에 우연히 몇십 년 동안 뭉쳐 있던 탄소들이 다시 흩어지고 새롭게 짝짓기를 해 재활용된다 해도 그건 더 이상 내가 아니다.
    나는 나고, 나는 나의 기억들이며, 나는 나의 자아다. 자아, 기억, 감정의 모든 것은 우리들의 뇌 안에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나의 뇌를 복제할 수는 없을까?
    뇌 안의 모든 정보를 복제해 새로운 생명체에 심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진정한 엘레우지니아의 신비이지 않을까?



    인간의 뇌는 약 1.5kg 무게와 1260㎤의 부피를 가지고 있으므로, 대략 1.34813 1017 Joule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물리학자 야콥 베켄슈타인이 제안한 방법을 사용하면 특정 공간에 특정 에너지가 가질 수 있는 최대 정보량의 한계를 계산해 낼 수 있다.
    그 방법에 따르면 뇌는 최대 2.58991 1042 비트의 정보를 가질 수 있다.
    오늘날 지구의 모든 디지털 정보량이 합쳐 약 3제타(1021) 바이트라는 걸 생각하면 천문학적으로 많은 정보량이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이론적인 최대값이고, 만약 기억을 저장하는 뇌의 해마만 복사한다면
    조금 더 가능성 있어 보이는 2.5페타(1015)바이트 정도만의 정보가 필요할 것이라는 결과가 있다.
    레이먼드 커즈와일(Raymond Kurzweil) 같은 미래학자는 그래서 먼 미래엔 마치 헌 컴퓨터에서 새로운 컴퓨터로 파일을 복사하듯
    ‘나’를 영원히 (양자 또는 DNA 컴퓨터에?) 복사해 재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설한다. 나는 복사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2+2=5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2+2=4일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같이 필연적인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완벽한 텔로머라이제 또는 완벽한 뇌 복사 같은 과학적 엘레우지니아의 신비들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할 이유가 없다는 걸 잘 아는 우리는
    죽음이 꼭 필연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오늘, 2013년에 우리가 죽음에 대한 슬픔을 가진다면,
    그건 어쩌면 나는 누릴 수 없지만 수백 또는 수천 년 후 누군가 다른 이가 가지게 될 영원한 삶에 대한 질투심일 수도 있다.



    … 중앙SUNDAY | 제308호·김대식 KAIST교수 | 2013.02.03


















     


    'Big Questions'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들의 배신’ (1928).














     
      내 맘껏 얼마든 바꿀 수 있다면 환상, 아니면 현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이미지들의 배신(La trahison des images)
    이라는 작품에서
    큰 파이프 그림 바로 아래에 ‘Ceci n est pas une pipe(이건
    파이프가 아니다)’ 라고 써 놓았다.
    분명히 파이프 같이 생겼는데 왜 아니라고 할까? 물론 그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화판 위에 적절히 퍼져 있는 유화 물감
    들을 우리 눈과 뇌가 ‘파이프’ 라고 해석할 뿐이다.
    마그리트는 물질적 현실과
    우리의 지각적 해석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현실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우선 단순하게
    ‘현실=물질’ 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성공회 주교이자 철학자였던 조지 버클리가 이미 지적했듯
    우리의 모든 경험은 항상 지각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질적 파이프는 결국 그
    파이프에서 반사된 광자들이 망막과 시각 피질의 신경세포들을 자극해 이루어지는 뇌의 해석일 뿐이다.
    버클리는 극단적으로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까지 주장했지만
    어차피 모든 현실이 지각의 결과물일
    경우 적어도 물질적 파이프만 현실로 인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비슷한 예로 영화 매트릭스의 유명한 한 장면을 기억해 보자.

    모피우스는 주인공 니오에게 파란 약과 빨간 약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파란 약을 먹으면 지금같이 편한 세상에서 맛있는 것을 먹으며 평범한 회사원
    으로 살다 늙어갈 수 있다.
    하지만 빨간 약을 택하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정한 현실인지 알게 될 거라며….



  • 파란 약이냐, 빨간 약이냐? 매트릭스 딜레마









  • 힌두교도들은 현실이 마하비시누 신의 꿈이라고 믿는다.




    매트릭스 영화를 끝까지 본 대부분의 사람은 진정한 현실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현실이 아니면 어때. 아무리 허위라도 가짜 스테이크의 육질을 내 혀가 느끼면 되는 게 아닐까’ 라는 버클리식 생각으로
    파란 약을
    선택할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다시 말해 ‘현실은 나의 오감으로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것들’ 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현실=나의 지각’ 이라는 가설을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자.

    만약 내가 느끼는 모든 것들이 바로 현실이라면, 다른 누구도 지각할 수 없는
    나만의 꿈과 환상들마저 현실로 인정해야 할까?
    그러면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망상은? 아무래도 현실에 대해 약간 다른 정의를 해야 할 것 같다.



    현실로 인정되려면 대부분의 정상인들이 비슷한 상황에서 공통적으로 느끼거나 지각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검정 의자는 다른 모든 사람도
    지각할 수 있어서 현실이지만,
    만약 내 눈에만 그 검정 의자 위에서 멋지게 강남스타일 춤을 추는 침팬지가 보인다면 정신과 의사와 상담해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고로 ‘현실=대부분 사람들의 공통적 지각’ 이라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그러나 공통적 지각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에드문트 후설과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객관적이고 자주적인 지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지각은 목적과 목표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같은 도끼라도 ‘선녀와 나무꾼’의 주인공과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에겐 각각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버클리와 후설을 따르자면 결국 현실은 개개인의 독특한 지각과 의도에 따라 매번 달라질 수 있는 주관적 현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온 김에 한발 더 나가 유아론(solipsism) 같은 막장 드라마식 현실론
    까지 가 볼 수도 있다.
    이 이론은 ‘내게 지각되지 않는 것들에 실체가 없는 게
    아니다. 우주의 유일한 현실은 나의 상상뿐’이라는 이론이다.
    그렇게 되면
    버락 오바마, 중앙SUNDAY, 은하수, 레미제라블, 4대 강 이 모든 것들은

    머리 안에만 존재하는 환상이며 ‘현실=나’ 다. 유아론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긴
    불가능하다.
    그 아무리 치명적인 논리적 모순을 제시하는 사람도 어차피
    유아론자의 상상 중 하나일 테니….



    비슷하게 우리는 ‘배꼽주의’ 식의 현실론과는 이성적 토론을 할 수 없다.

    필립 헨리 고스(Philip Henry Gosse)
    1857 Omphalos(그리스어로 ‘배꼽’)』라는 책에서
    ‘왜 아담이 배꼽을 가졌을까’ 라고 묻는다. 아담은 엄마의 배에서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배꼽이 있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배꼽이 없는 비정상적
    해부학 구조를 가졌다는 말은 히브리어 타낙(Tanakh·성경)에 없다.

    그 의미는 야훼신은 아담을 마치 ‘엄마라는 존재의 과거를 의미하는’

    탯줄과 배꼽을 포함한 완벽한 상태로 창조했다는 것이다.



    비슷하게 우주는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 수천만 년 과거의 역사를
    담은 듯한 지질학적 증거와
    공룡의 화석을 포함한 ‘완성된’ 상태로 만들어졌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왜 하필 6000년 전일까?
    어차피 우주가 위조된 과거의
    기록을 포함한 ‘완성품’ 으로 만들어졌다면 6000년 전이 아니라
    지난주
    목요일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아니 물리학적으로 가장 짧은 플랑크 시간인 5.3910610-44초 전에
    이미 지금 우리가 지각하고 기억할 수 있는 바로 이
    현실 그 자체로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마치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위조된
    기억이 심어진 상태로 제작된 로봇들이
    자신들이 과거가 있는 인간들이라고
    착각하고 살 듯이 말이다.



    결국 지각과 기억만으로 현실을 정의하다 보면 논리적 모순과 이성적 토론이
    불가능한 패러독스들에 빠지게 된다.
    그럼 현실을 지각에서 분리시켜 볼 수는 없을까? 환상과 현실의 가장 핵심적인 논리적 차이는 무엇일까?

    이제 데카르트가 등장할 때다. 오후까지 늦잠 자기로 유명했던 데카르트는
    스웨덴 여왕의 개인 교사가 된 후
    매일 새벽 5시에 철학 수업을 하다 결국
    폐렴으로 죽었다는-게으른 나로서 꼭 믿고 싶은-전설이 있다.
    그는 1619년
    11월 11일 ‘우리가 진정 믿을 수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한다.

    물질적 파이프, 파이프의 그림, 검정 의자, 춤추는 원숭이, 아담의 배꼽,
    공룡의 화석….
    이 모든 것들은 아주 교활한 악마가 만들어 낸 환상일 수 있다.
    적어도 절대로 환상이 아니라는 논리적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우주의 모든 것이 환상이라 해도, 적어도 단 하나의 무언가는 현실이다.
    바로 ‘이 모든 것이 환상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나’ 는 확실히 현실일 것이다.



  • 현실은 나없는 우주, 즉 현실=우주-나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한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
    서양 근대 철학을 출발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를 기반으로 외부 현실을 증명하려 했지만 미안하게도 그건 좀 무리였던 것 같다.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건 생각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이지, 그게 반드시 나의 생각일 필요는 없다.
    힌두교도들은 현실이 마하비시누 신의 꿈이라고 믿는다.

    그 꿈엔 만물의 모든 물체 · 정신 · 기억
    · 지각들이 포함되어 있고, ‘나의 생각’
    역시 그 꿈에 속해 있다.

    결국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 가 아니고 ‘생각난다. 고로 현실엔 무언가가 생각한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슷하게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보르헤스의 ‘원형의 폐허들(Las Ruinas Circulares)’이란 단편에서
    주인공은
    불에 타 죽는 순간 뜻밖에 아픔을 느끼지 못하며
    자신이 결국 누군가 다른 이의 꿈 또는 시뮬레이션이라는 걸 알게 된다.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누가 꿈속의 나비고 누가 현실의 장자일까?
    어떻게 보면 현실과 환상의 가장 큰 차이는 현실은 나에게 저항한다는 점이다.
    현실의 의자는 내 엉덩이 무게에 저항하기 때문에 내가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지만, 환각적 의자에 앉기란 불가능하다. 환상은 내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지만 현실은 내가 원하는 변화에 저항한다.
    그래서 현실을 변경하려면
    항상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현실엔 공짜가 없다.
    그리고 환상과 착각은
    내가 더 이상 믿지 않으면 사라지지만 현실은 나의 믿음과 관계없이 현실이다.

    내가 없어도 현실은 계속 존재하지만 나의 환상은 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고로 ‘현실=나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 이라는 가설 아래
    우리는
    현실을 ‘내가 없는 우주, 바로 현실=우주-나’ 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개개인의 지각과 의도로부터 독립시키는 순간 우리는 드디어 현실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응용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이성과 과학 위주의 현실은
    결코 아름답거나 포근하지 않다. 아니, 매우 차갑고 비인간적이다.

    신의 꿈으로 만들어진 현실! 얼마나 웅장하고 미적인가!
    모든 현실이 결국 나의 상상이라면 얼마나 신날까!
    내가 바라보고
    있어야만 그 아름다운 장미가 존재한다면 이 또 얼마나 시적인가!
    하지만
    이런 아름답고 시적인 현실은, 우리의 동경은 만족시킬 수 있더라도,

    현실 그 자체를 예측하거나 바꾸어 놓기에는 너무 주관적이다.



    그래서 모피우스가 니오에게 파란 약과 빨간 약을 권했던 것처럼
    나는 회색 비행기와 무지개색 비행기를 권해보고 싶다.
    무지개색 비행기는
    시적, 종교적, 예술적, 막장 드라마식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멋진 비행기다.
    그 비행기의 파일럿들은 카리스마가 있으며 무지개 비행기의 원리를 누구나 다 이해하기 쉽고 설득력 있게 설명해 준다.



    반면 회색 비행기는 못생기고 우울하다. 그리고 아직 여기저기 수리 중인 흔적까지 보인다.
    거기다 파일럿들은 그다지 친절해 보이지도 않고, 자꾸 수식과
    확률을 가지고 이해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설명하려 한다.
    단, 그 회색 비행기는 철저히 항공역학 이론과 전기전자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만약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은 어느 비행기를 타고 데카르트가 살던 프랑스로 떠나실까요?
    당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의 목숨을 어느 비행기에 맡기실까요?



    … 중앙SUNDAY 제306호· 김대식 KAIST교수 | 2013.01.20

















     


    'Big Questions'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 1 137억년 전의 빅뱅(우주탄생)의 흔적을 알려 주는 WMAP 위성의 우주배경 미세
    온도차이 지도.
    2 고대 인도인들은 거대한 코끼리·거북·뱀이 세상을 받치고 있다고 믿었다.












     

      현대물리학이 답하길… 무()는 불안정하니까!







    눈을 뜨고 세상을 보면 수많은 것들이 보인다.

    책상, 내 몸, 구름. 그런가 하면 보이지 않아도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π(원주율), 힉스 입자, 완벽한 원. 그리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자아, 기억, 사랑. 이 모든 것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무슨 이유로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우선 ‘나’부터 시작해 볼 수 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내 존재의 원인은 물론 나의 부모님일 것이다.
    그리고 내 부모님은 또 그들의
    부모님 덕에 태어나셨을 것이고… 이렇게 지구 모든 인간들의 과거를 추적해

    보면 우리 모두 약 400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 살던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로부터 진화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물론 그들 역시 약 46억년 전 탄생한 지구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 지구, 1000억 개가 넘는 은하들… 이 우주의 모든 것들은
    약 137억 년 전 거대한 우주 폭발, 빅뱅을 통해
    탄생했다는 게 현대 과학의 정설이다.
    그럼 우주는 왜 탄생한 것일까?
    우주 그 자체 존재의 원인은 무엇일까?
    마오리인들은 우주가 원천 부모인
    랑기와 파파의 사랑을 통해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중아프리카에선 붐바란 신이 외로워서 세상을 토해냈다고 믿었고
    잉카인들의 신 비라코카는
    티티카카 호수에서 나와 바위에 바람을 불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한다.

    대부분 미개문명의 우주 생성론이 보여주는 공통점은

    1)존재하는 모든 것들엔 원인이 있고

    2)세상이 만들어지기 전 적어도 무언가 존재했으며

    3)존재의 원인은 누군가 그 초기 우주의 무언가를 가지고 만들어 낸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면에선 고대 그리스인들의 우주 생성론도 미개했다.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아낙시만드로스는 각각 우주가

    ‘초기바다, 불 또는 무한’ 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했는데 초기 요소 자체가
    어디서 왔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 모든 존재의 시작점 빅뱅, 그럼 그 전엔?







  • 존재의 근원을 탐구한 아리스토텔레스

    유대교 역시 오랜 시간 야훼신이 ‘형태가 없는 무질서(tohu bohu)’에서 우주를 만들었다고 믿었지만
    로마제국의 지식인들 사이에도 확산되기 시작했던 기독교에선 타 종교들과 차별화된, 좀 더 혁신적인 존재 생성론이 필요해졌다.
    초기 기독교 지식인들은 신플라톤주의 및 이단적인 그노시스주의와 철학적 주도권을 놓고 기원후 2~4세기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플로티누스, 포피리, 이암블리코스
    같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플라톤의 저서 티마이오스에 소개된
    만물의 형성자
    ‘데미우르고스’가 형태 없는 빈 공간에서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었다.
    그중 특히
    플로티누스는 자비심 많은 데미우르고스가 바로 이데아 세상의 이성적 존재들이
    인간들의 세상에서도 표현될 수 있도록 한 하나의 님(The One)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그런가 하면 그노시스주의자들은 ‘세상은 잔인하고 불행하므로
    이런 추한 세상을 만든 데미우르고스는
    절대 자비로울 수 없고, 존재는 바로
    사악한 신 이알다바오를 통해 창조됐다’고 주장했다.
    유대-기독교의 단일신이 데미우르고스나 이알다바오보다 우월하다는 증명이 절실했던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신은 절대적 권능을 가지셨으므로 우주 창조에 자비와 의지 외에 그 아무 것도 필요 없었을 것’
    이라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결국 존재는 ‘creatio ex nihilo’,
    바로 무(無)에서 창조되었으며 신(神) 외에 그 아무 이유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겐 원인이 있어야 하고,

    그 원인이 바로 신이라면, 신의 존재의 원인은 무엇인가? 신은 왜 존재하는가?

    어린아이들은 가끔 끝없는 “왜” 라는 질문들로
    어른들을 당혹하게 만들 때가 있다.



    “초콜릿 먹으면 왜 안 돼?”

    “이빨 상하니까.”

    “이빨 상하면 왜 안 돼?”

    “음식을 못 먹으니까.”

    “음식 못 먹으면 왜 안 돼?”

    “아파 죽을 수 있으니까.”

    “ 죽으면 왜 안 돼?”

    “….”



    아리스토텔레스는 끝없는 질문들을 종결시킬 수 있는 논리적 방법들을 추구
    했다.
    우선 A의 원인은 B, B의 원인은 C, C의 원인은 A라는 순환적 논리를
    써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은 결국 ‘A의 원인은 A’ 라는 말과 같다.



    ‘초콜릿을 먹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초콜릿을 먹으면 안 되기 때문’이라는 식의 논리는
    어린아이에게도 통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음으론 왜 라는 질문을 끝없이 해 볼 수 있다.
    이런 무한 논리는 가능하긴 하지만 어딘가 찜찜하다.

    모든 것엔 언젠간 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질문을 어딘가에서 무작정 끊어 볼 수도 있다.
    “엄마 아빠는 너를 사랑하니까 너는 아프면 안 돼. 끝.”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무작정 ‘끝’ 같은 식의 제멋대로는 논리적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의 존재를 두 부류로 나누었다.

    1)조건적이어서 존재를 위해 꼭 다른 원인이 필요한 존재들과

    2)비존재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존재의 최종 원인이
    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
    하지만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존재는 우리가 증명할 수 있지만 (예: 네모난 원),
    거꾸로 비존재가 불가능한 존재의 증명은 데이비드 흄과 이마누엘 칸트가 지적했듯 불가능해 보인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 식의
    기본 논리만으론 ‘creatio ex nihilo’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지고,

    대부분 철학자와 물리학자들은 ‘우주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으며 시작점이
    있을 수 없다’ 는 가설을 선호하게 된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중력 때문에 우주가 줄어들 수도 있다’ 는 결론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느끼고 급히 자기 방정식에 불필요한 상수 하나를 추가해 자신이 믿는
    영원한 우주 모델을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영원한 우주는 환상일 뿐이었다.

    일반상대성 이론이 완성된 지 불과 몇 년 후 에드윈 허블이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주가 풍선같이 팽창하고 있다는 것은 거꾸로
    우주가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 작았음을 의미한다.
    그럼 우주는 어느 정도까지 작았을까? 현대 빅뱅 이론에 따르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약137억 년 전

    ‘무한히 작은 점(singularity)’ 에서 시작됐다.
    이 이론은 1951년 교황 피우스
    12세가 ‘신의 존재의 과학적 증거’ 라고까지 해석했지만
    우리는 다시 한번
    어린아이 같은 질문들을 해 볼 수 있다.
    “모든 존재의 시작점이 빅뱅이었다면 그 전엔 무엇이 있었을까? 빅뱅은 왜 일어난 것일까? ”

    일반상대성 이론은 ‘중력을 통한 거시적 간격’ 의 현상을,
    양자역학은 ‘플랑크 간격(원자나 전자 간격)’ 에서 일어나는 미시적인 현상들을 설명한다.
    그런데 만약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단 하나의 점에서 시작했다면,
    양자역학적 원리들은 당시의 작은 우주 전체에도 적용됐고 이럴 경우 수학적으론 증명할 수 있지만,
    개념적으론 받아들이기 어려운 반직관적인 현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중 가장 반직관적인 결과는 우주가 무(無)에서 아무 이유 없이 랜덤(멋대로)으로 만들어 졌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 공간이 랜덤으로 창조됨을 보인 호킹




  • 여기서 우리는 무(無)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무(無)’를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라고 정의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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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6 AVATAR · 아바타 arcadia 2013.10.27 460
    85 찻잔에 머무는 가을 香 arcadia 2013.10.27 8881
    84 이루마 - River Flows in You 유봉희 2014.01.12 7397
    83 용재오닐 - Canto Antigo 유봉희 2014.01.12 209
    82 Enya - Caribbean Blue 황영심 2014.01.12 200
    81 Beethoven - Spring Sonata 2nd movement Adagio molto expressivo 유봉희 2014.01.15 263
    80 Asian Art Museum - 조선 왕실, 잔치를 열다 유봉희 2014.01.15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