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Questions · 〈삶은 의미있어야 하나〉 5 - 8 回

2013.08.17 12:36

arcadia 조회 수:784 추천:34




김대식의 'Big Questions' 5 - 8 回 / 중앙SUNDAY Magazine






































































 

8
'Big Questions'   진실은 존재하는가








▲ ‘진실이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하게 만드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0년 영화 ‘라쇼몽’의 한 장면.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그 누가 알 수 있을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들을 기반으로 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羅生門)’은 줄곧 20세기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곤 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사무라이 한 명이 깊은 숲에서 살해되고 그의 어린 아내는 강간당한다.
용의자로 체포된 험악한 산적이 자신의 범행이라 고백하기에 사건은 쉽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자신의 행위라며 지껄이는 산적, 한없이 슬프기만 한 아내, 사건을 목격했다는 증인, 그리고 무당의 입을 빌려
저승에서 이야기하는 사무라이까지 모두 다른 사건을 기억하는 게 아닌가? 그 어두운 숲 속에선 정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진실은 하나이지만 사람들마다 다르게 보고 기억하는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른바 진실을 ‘사실 그대로’ 라고 정의한 바 있다.

결국 세상엔 하나의 진실들로 구성된 사실이 존재하며, 그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정확히 표현하는 게 바로 진실이라는 것이다.
고로 진실이란 외부 세상과 머리 안에 존재하는 내부 세상과 동일성을 의미하기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진실을 추구한다는 것은 바로 지성과 사실 간의 방정식을 푸는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만약 생각과 현실이 일치한 게 참이라고 가정해 보자.
우리가 만약 현실을 직접적으로 파악하고 판단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아무런
논의가 필요 없다. 현실은 현실이기에, 현실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러셀과 케인스의 제자이며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노고’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한 영국 수학자 프랭크 램지(Frank Ramsey)

“‘눈은 하얗다’는 진실이다”라는 말은 무의미하다 생각했다. 눈이 하야면
어차피 진실이고, 하얗지 않으면 거짓이다.
진실이라면 “진실은 진실이다”라는 반복된 주장이 되고, 거짓이라면 “거짓은 진실이다”라는 논리적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동일한 경험을 왜 서로 다르게 기억할까



램지는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기 전 이미 수학(그래프 이론), 경제학

(최적 세금이론, 수학적 저축이론), 철학(진실과 확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무한으로 큰 우주에 먼지보다 못한
인간의 삶’을 우울해하는 친구에게 램지는 “하지만 그 큰 우주도 결국 인간의 머리 안에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마치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가
거대한 태양도 결국 “엄지손가락으로 덮인다”라고 주장했듯 말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외부 현실 그 자체를 인식하기보단 개인적으로 차이 나는 지각과 기억을 통한 간접 경험만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간접적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내부적 세상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선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아퀴나스가 말한 현실과 지성의 방정식은 사실 현실과 언어의 방정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라쇼몽’같이 동일한 경험을
서로 모순되게 기억한다면 참된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만약 객관적 현실을 결코 알 수 없다면, 우리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르네상스 학자 비코(Giambattista Vico) 같이
진실은 어차피 구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진실은 객관적이기보다 사회·경제·역사적 조건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마르크스(Karl Marx)
가장 큰 관심은 그렇기에 사회 구성원 간 권력구조가 진실 구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였다.
역사적 진실이란 결국 힘과 권력의 기록일 뿐이라는 것이다.

비코는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신들의 역사’ ‘영웅의 역사’ 그리고 ‘인간의
역사’로 구별했지만,
결코 권력과 힘으로만 구성된 ‘갑의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역사학자 홉스봄(Eric Hobsbawm)
왕과 귀족 중심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보려 노력하기도 했지만, ‘을의 진실’이 ‘갑의 진실’보다 꼭 더 객관적이어야 하는지는 의문할 수 있겠다.



진실은 결국 존재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이 우울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조금 더 현실적인 목표를 가지게
된다.
그게 바로 하버마스(Juergen Habermas)의 결론이었을 것이다.

진실은 어차피 만들어진다면, 그나마 가장 공평하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버마스는 그래서 진실의 핵심은 사회적 합의라 주장한다.

평등과 자유가 보장된 상태에서 모든 정보가 공유되고, 공정한 토론을 거쳐
합의되는 진실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실이라는 것이다.



비코, 마르크스, 하버마스…. 물론 다 좋은 말들일 거다.
하지만 이 참을 수 없는 찜찜함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만들어지지 않은, 참으로 존재하는 진실이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얀 반 하이엔노트 역시 그런 찜찜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이엔노트의 인생은 그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했다.
가난한 네덜란드 이민자로 프랑스에서 태어난
그는 청년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우연한 기회를 통해 망명 중이던
트로츠키의 비서가 된다.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 고로 트로츠키!
레닌과 함께 볼셰비즘 혁명을 주도했던 그는 스탈린과의 권력 싸움에 져
비밀경찰들에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를
거쳐 멕시코로 망명하는 트로츠키 옆엔 항상 그의 비서 하이엔노트가 있었다.
트로츠키를 보살펴 주었던 화가 프리다 칼로의 연인이 되기도 했던 하이엔노트는 그러나 1939년 갑자기 트로츠키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 후 뉴욕대학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받은 하이엔노트는 컬럼비아 · 브랜다이스 · 스탠퍼드 대학
교수로 20세기 최고의 논리역사학자로 인정받게 된다.



하이엔노트는 왜 혁명을 버리고 논리를 선택한 것일까? 어쩌면 그는
아무리 몸부림쳐도 결국은 갑을 통해 만들어지는 진실에 지쳤을지도 모른다.

트로츠키가 뭐라고 했던가? 스탈린의 총과 칼을 종이와 펜으로 쓴 진실로써
이길 수 있다고. 하지만 역사는 비웃기만 했고,
트로츠키는 암살자의 도끼에
맞아 사망한다.
스탈린도, 신도, 총으로도 왜곡되지 않는 진실은 없을까?
하이엔노트는 영원한 진실을 수학에서 찾기로 결심한다.



하이엔노트의 진실 찾기도 허무한 결말로



완벽과 절대를 기반으로 발전해온 수학은 20세기 초 존재적 위기에 빠져
있었다.
숫자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인가 아니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무한이란 무엇인가?
증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제국이 세워졌다 멸망해도,
하늘을 찌르듯 거대한 건물들이 흔적 없이 사라져도….
수학적 진실만은 영원해 보였다. 하지만 수많은 논리적 모순들이 하루하루 위험한 의혹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수학적 진실 역시 인간을 통해 만들어진 게 아닌가라는. 수천 년에 걸쳐 차곡차곡 쌓아놓은 멋진 ‘수학적 진실’이라는 성의 기반이 사실 허수였다면?

러셀과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에겐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수학적 진실의 기반을 더 이상 그 아무도 의심하지 못하도록

20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
(Principia Mathematica)라는 수천 장짜리 책을 완성한다(작은 사진).

마테마티카는 논리와 집합만을 사용해 완벽하고 모순 없는 수학을 구성하려

했기에 362장의 긴 논리적 증명을 통해서야 드디어 ‘1+1=2’ 라는 사실을
제시하게 된다. 하이엔노트가 찾았던 진실이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사회주의자가 주장하든, 자본주의자가 증명하든 1+1은 항상, 영원히, 우주
그 어느 곳에서도 2여야 한다.
만물을 통치한다는 신세대 기독교 신을 믿지
못했던 후기 로마 수학자들은 그래서 반박했던 것이다:
“신이 아무리 전능
하시더라도 파이의 값 3.1415192…는 바꿀 수 없지 않으냐”고.



하지만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20년 고생도, 하이엔노트의 희망도 다 부질없는 것이었을까?
1931년 오스트리아 빈 대학 젊은 학자 쿠르트 괴델(Kurt Goedel)
이미 ‘불안전성 정리’를 통해 그 어느 수학 시스템도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마테마티카를 포함한 그 어느 시스템에서도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정리들이 존재하며,
수학적 증명과 진실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괴델의 증명이 수학자들 사이에 인정되기 시작한 후 러셀은 서서히 수학과
논리를 포기하기 시작한다.
그에게 수학은 인간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완벽한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괴델은 나치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하고,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늙은 아인슈타인의 절친한 말동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더 이상 논리엔 관심 없었던 말년에는 누군가가 독살하려 한다는 망상에 시달려 굶어 죽게 된다.
그렇다면 하이엔노트는? 20세기 논리의 역사를 정리한 프레게에서 괴델 이라는 책을 완성한 그는 노년에 트로츠키와 프리다 칼로가 살았던 멕시코로 떠난다.
추운 러시아에서는 느낄 수 없는 따사로운 멕시코의 햇살을 즐기며 “삶은 아름답다”라고 일기 책에 썼던 트로츠키를 기억하며 하이엔노트는 46년 전 그가 버린 옛 아내를 찾아간다.
그는 여자를 만났고, 여자는 그를 반겼다. 그리고 여자는 총을 쏜다. 하이엔노트는 죽었고 여자는 자살을 한다.
‘라쇼몽’에서 같이 무당의 입을 빌려 저승에서 변명할 수 있다면 하이엔노트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의 진실은 무엇이며, 여자의 진실은 또 무엇일까?



… 중앙SUNDAY | 제324호·김대식 KAIST교수 | 2013.05.26

















 

7
'Big Questions'   우리는 왜 정의를 기대하는가








▲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1809~1865), 귀스타브 쿠르베 작, 1865.














 
  공평함은 뇌가 느끼는 ‘좋음’ 중 하나이기 때문?





미국에서 겨우 10만 권 팔린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한국에선 100만 권 이상 팔렸다.
그리고 샌델 교수는 그 어디에서보다 더 많은 강사료를 받으며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강연을 하곤 한다
(결국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지식을 돈만 많이 내면 살 수 있다는 아이러니는
우선 잊어 보자).
이유야 어쨌든 ‘경제민주화’ ‘재벌 때리기’ ‘빈부격차’ 등이
화두인 2013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정의’가 중요한 이슈인 건 확실해 보인다.
샌델 교수가 동일한 웅변술과 재치 있는 스타일로 ‘우표 수집이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의 강연을 했다면 그다지 성공했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는 말이다.






1 쓰레기장에서 사는 어린아이(인도). 2 부촌 바로 옆 빈민촌(브라질).



몇 년 전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라는 영화가 인기였다.

정상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뭄바이 쓰레기장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보며 불쌍해하고 분노하거나 또는 우울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에 화난 것일까? 만약 우리 스스로도 쓰레기장에 산다면 어떨까?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쓰레기장에 산다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우주
그 자체가 쓰레기장이라면 쓰레기장에 산다는 사실에 화낼 이유가 없겠다.

은하수 한구석에 처박혀 평생 지구라는 돌덩어리와 중력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지 않듯 말이다.
쓰레기장 아이들이 불쌍한 이유는 어딘가 수영장에서 물놀이하고 있을 부촌 아파트의 다른 아이들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슷하게 우리는 소중한 무엇을 빼앗은 사람에게 분노하며 정의를 요구한다.
어렵게 장만한 집이나 차를 훔친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우리에겐 정의이며,
단 하나뿐인 목숨을 빼앗은 자에 대한 분노는 극치에 다다라 거꾸로 그들의 목숨을 요구하기도 한다.
‘눈에는 눈’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설득력이 여기서 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에게 무한의 목숨이 있다면 어떨까?
어쩌면 나를 살인한 사람하고도 즐겁게 웃을 수 있겠다. 마치 나의 수많은 머리카락 한 가락을 뽑은 사람에게 대하듯 말이다.



누구나 동의할 ‘정의’ 개념을 만들 수 있나



플라톤의 ‘에우튀프론’에서 ‘신들이 정의를 원한다’라고 주장하는 에우튀프론에게 소크라테스는 그럼 신들이 무언가를
“정의롭기 때문에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원하기 때문에 무언가가 정의로워지는지”라고 묻는다.

‘정의란 무엇 무엇이다’라고 정하는 순간 우리는 그 무언가를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정당화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세상에 지각 능력이 없는 존재들만 있다면 ‘정의로운 세상’이란 무의미하다.

돌멩이와 지렁이 사이엔 ‘정의’란 단어가 필요 없다는 말이다.

우주에 나 혼자 존재하거나, 존재하는 모두가 이 세상 모든 걸 가질 수 있다면 역시 ‘정의’란 무의미하다.
결국 정의는 인지·감정·기억을 가진 사람들끼리
한정된 것을 나눌 때 느끼는 분배 패턴의 정당성이지, 나눠지는 그 무언가의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떻게 나누는 것이 정의로운 것일까? 우선 생산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n분의 1로 나누거나 각자 필요한 만큼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토머스 모어(Thomas More)의 유토피아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런 이상적 패턴을 마르크스는 경제학적으로 뒷받침하려
노력했지만 문제 있어 보인다.
더 열심히 일하려고 하는 인센티브가 희미해지며, 내가 소유한 재능과 노동력을 통해 생산한 것들을 투자하지도 않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나누어야 한다는 짜증 나는 상황이 벌어진다.

물론 ‘아나키즘’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같이
어차피 ‘개인 소유’란 불가능한 개념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내가 소유한
재능은 부모님에게서 물려받거나, 교육을 통해 얻거나 책에서 읽었을 것이다.
다른 사회 구성원들이 매번 연관돼야만 나의 재능과 노동력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계나 땅 역시 독립적으로 무에서 창조한 것이 아니기에 사회의 도움을 얻어서만 생산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한 특정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프루동은 그래서 “모든 개인 소유는 도둑질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지만

개인의 모든 재능과 시간이 다른 사회 구성원들의 동일한 공헌을 통해 가능해진다는 주장은 지나쳐 보인다.









▲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반대로 아무도 사회로부터 100% 독립적인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 역시 당연해 보이지만,
그게 바로 자유론자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1938 ~ 2002)
의 핵심 아이디어였다.
노직은 정의와 분배 패턴의 상호관계 그 자체를 부정한다.
합법적으로 얻은 자원에 내 재능과 시간을 투자해 생산한 결과물은 내가 소유하거나 시장에서 정당한 가격을 받고 교환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목적을 위해서라도 동의 없이 나라에서 가져가는 세금은 결국 나의 재능과 시간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정부에서 가져간 만큼의 재능과 시간을 고로 나는 사회에 무료 헌납한다는 말이고,
동의 없는 재능과 시간의 헌납은 노예나 하는 짓이므로 모든 세금은 결국 노예제도라 할 수 있다.



프루동과 노직이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세상 사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한다고 상상해 보자.
장소는 노직이 활동했던 하버드대학교 근처 리걸 시 푸드
(Legal Sea Food)라는 꽤 괜찮은 레스토랑이다.



프루동=…그럼 무슈 노직은 만약 세상의 99% 식량을 제가 소유해 대부분
먹지 못한 채 썩어서 버리더라도
식량의 일부를 사회가 세금으로 가져갈 수
없다는 말인가요? 집 앞에서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데도?



노직=그렇습니다. 정의가 분배의 패턴이고, 사회가 그 패턴을 정할 수 있다면 정당하게 얻은 개인의 소유를 정부가 제멋대로 손질할 수 있게 됩니다.

굶는 아이를 위해 제 것을 동의 없이 가져갈 수 있다면 나중엔 그 아이의 옷을 위해서,
그리고 다음엔 그 아이의 대학 교육과 새집을 위해 맘대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그래서 정부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규제화하는 순간 우리는 정부 노예제도의 길을 가기 시작한다고 했지요….



프루동=무슈 노직은 ‘정당한’ ‘나의 소유’라는 단어를 자주 쓰십니다만…

선생님의 그 ‘정당한 소유’ 역시 사회가 마련해 주고 보호해 주는 것 아닌가요?
알몸으로 태어나 하버드대 교수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었던 건 뭄바이 쓰레기장의 아이보다
단지 우연히 더 좋은 부모, 고향, 신경세포들을 가진 선생님이 사회로부터 더 많은 부를 훔쳤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공로 없는 우연과 확률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해도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항의하려는 노직을 막으며)
그렇다면 벤담이 추구한 사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행복지수는 어차피 로그(log) 함수로 증가하기 때문에 제가 10조를 가졌든, 11조를 가졌든 더 이상 큰 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에겐 무의미한 1조를 세금으로 걷어 가난한 10만 명에게 나눠주는 게 사회 전체 행복지수를 더 최대화하지 않나요?



노직=그런 공리주의 난센스에 따르면 한번 지하실에 갇혀 노예로 일하는 10명의 아이들이 10만 개의 명품 백을 만든다고 상상해 봅시다.
10만 소비자의 행복 덕분에 사회 전체 행복지수는 늘어나겠지요. 하지만 그건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노예로 살아도 된다는 위험한 말입니다.



프루동=선생님 같은 자유론자가 아이들의 행복을 걱정한다는 게 신기하군요….


노직=(못 들은 척하며) 그럴 바에야 하버드대 제 옆 방 동료였던 롤스의 정의론이 더 설득력 있겠네요.
효율적이면서도 정의로운 사회란 차별된 분배의 패턴을 통한 최소 수혜자에게도 그 불평등을 보상할 만한 이득이 생겨야 한다는.



프루동=…거기다 롤스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모델을 도입했지요.

정의로운 분배 패턴에 대해선 사회적 강자와 약자가 어차피 다른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으니
우리가 뭄바이 쓰레기장 아니면 빌 게이츠의 자식으로 태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한 후 적절한 분배 패턴을 정하라는 거였지요.

아는 게 힘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정의로움이군요.



노직=‘무지의 베일’은 귀여운 아이디어지만 비현실적입니다.

나는 나이기에 ‘만약 내가 아니라면’이란 무의미합니다. 무지의 베일엔 항상 ‘나’라는 구멍이 뚫려 있다는 말이지요.
비슷하게 칸트는 공리주의식 결과보다 도덕적 동기를 더 강조했지만 정말 그가 원하듯
우리 ‘동기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되도록 행위’ 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개인 동기의 정의성을
보편적 입법의 정의성을 통해 판단한다는 건 단순히 말장난 아닌가요?

결론은 항상 같습니다:정의는 그 어떤 분배의 패턴도 아닙니다!



프루동=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노직’ 이라고 불리는 ‘나’는
왜 ‘노예제도’보다 ‘자유’를 더 선호할까요? ‘나’는 나의 뇌고 나의 기억입니다.
그런 ‘뇌’에겐 확실히 ‘좋고’ ‘싫고’가 있습니다. 음식과 물은 좋고, 배고픔과
아픔은 싫습니다.
독립적인 판단과 행동은 대부분 뇌에겐 ‘좋음’ 중 하나입니다. 그렇기에 자유론자들은 개인의 자유를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는 거지요.
하지만 ‘공평’ 역시 뇌에겐 ‘좋음’ 중 하나입니다. 인간을 포함한 대부분 영장류의 뇌는 공평한 나눔을 경험할 때 ‘좋음’을 느끼고, 불공평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정의를 기대하는 건 마치 자유를 기대하듯 공평 역시 뇌의 기본 행복 조건 중 하나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물론 인간은 동물이 아니고 자유이든
공평이든 우리가 꼭 뇌의 성향을 따라야 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자유는 본능이기에 지켜야 하나 공평은 본능이어도 지킬 필요 없다는 것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반박하려는 노직을 막으며) 그나저나 너무 늦었네요. 계산은 어떻게 할까요? 저는 샐러드 하나 먹는 사이에 선생님께서는 가장 비싼 바닷가재를 드셨군요.
각자 자유의지로 선택해서 먹은 만큼 내지요….



노직=(당황하며) 뭘 그렇게 복잡하게… 우리 그냥 n분의 1 할까요?



… 중앙SUNDAY | 제321호·김대식 KAIST교수 | 2013.05.05

















 


'Big Questions'   시간은 왜 흐르는가








▲ 존재하는 것들의 변화엔 특정 방향이 있다. 왜 현실에선 미래주의 화가 자코모 발라의
‘줄에 매인 개의 움직임(1912년, 위 그림)’ 같이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볼 수 없을까? [http://artsnapper.com/giacomo-balla]














 
  엔트로피 증가 시스템에서 진화한 뇌 때문?





고대 그리스도교 최대 신학자였던 성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그 누구보다 시간의 위력을 절실히 경험한 인물이다.
그가 태어날 당시 로마는 이미 400년 가까이 지중해의 모든 문명을 통치했고,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는 로마의 평화는 당연히 영원할 것만 같아 보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56세였던 410년 서고트족이 로마를 점령하고
약탈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깊은 혼란에
빠진다. 로마마저 영원하지 않다면, 이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이란 과연 존재하는 걸까?
왜 존재하는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변해야만 하는가?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으면 알 것 같다가도, 설명하려는 순간 모르는 게 시간” 이라고.



시간이 궁금하면 우리는 당연히 시계를 찾는다. 그렇다면
시간은 단순히 시계가 보여주는 바로 그것이 아닐까?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이슬람 수학자 알-비루니(Abu al-Rayhan Muhammad ibn Ahmad al-Biruni)

기원후 1000년께 평균 태양일의 8만6400분의 1을 처음으로 1초라고
정의했는데, 그의 정의는 1960년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나
지구의 자전은 근본적으로 불규칙해 정확한 평균 태양일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았고,
결국 20세기 후반부턴 더 규칙적인 원자 단위의 현상을 기본으로
삼기 시작하게 된다.
1초란 무엇인가? 국제단위계의 합의에 따르면
1초란 절대 0도 온도에서 세슘-133 원자의 바닥 상태에 있는
두 개의 초미세
에너지 준위들의 주파수 차이인 9,192,631,770 ㎐의 역수를 말한다.

시계가 보여주는 시간은 신호등의 빨간불 같은 인류의 합의일 뿐인 것이다.



시간은 당연히 시계가 없던 백만 년 전에도 존재했을 거고,

인류가 사라진 수억 년 후에도 계속 존재할 것 같다. 그렇다면
시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우선 시간의 핵심은 흐름이며, 우주의 역사는
시간을 통해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진다는 가설을 해볼 수 있다.

아이작 뉴턴은 그래서 시간을 공간과 더불어 자연의 절대 현상이라 생각했다.

시간이란 절대적이며 외부의 그 어떤 존재와도 상관없이
그것 자체로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흐른다는 것이다.






1 아우구스티누스 2 알-비루니 3 뉴턴 4 칸트 5 라이프니츠 6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젊은 시절 뉴턴은 수학과 과학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한 반면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의 이력은 통섭 그 자체였다.

수학과 철학뿐 아니라 정치학, 법학, 역사학, 언어학에 대한 저술을 남긴 그는
유와 무,
그러니까 1 과 0만으로도 계산이 가능한 이진법(binary system)
만들기도 했다.
라이프니츠는 이미 뉴턴과 미적분의 독립적 발견을 가지고
논쟁을 벌인 바 있었는데, 뉴턴이 주장한 절대 시간 역시 무언가 찜찜해 보였다.

‘흐름’이 시간의 특성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흐른다는 것인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흐른다(Panta Rhei)’ 라고 주장한 바 있다.
모든 게 지속적으로 변하기에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얘기다. 강이 흐르려면 당연히 물이 있어야 한다.
그럼 시간이 흐르기 위해서도 무엇인가 존재해야 하는 게 아닌가? 흐름이란 변화고, 변할 수 있는 건 존재하는 것들뿐이다.
그렇다면 시간이란 뉴턴이 주장한 존재로부터 독립적인 절대 현상이 아니라 존재가 생성되는 순서를 통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아니, 생성하는 존재들의 상대적 관계 그 자체가 바로 시간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평생 여자와 사랑을 나누어 본 적 없이 조용한 삶을 살았던 뉴턴에게
어쩌면
존재는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박스 안에 갇혀있는 수동적인 것들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런가 하면 외교관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며 전 유럽을 돌아다녔던
라이프니츠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오늘의 명예와 부는 내일 사라졌고,
과거의 행복은 현재의 불행을 더 아프게 만들곤 했다.
변함 그 자체가 라이프니츠의 삶이었기에, 그에겐 추상적인 절대 시간이 무의미했었을 수도 있다.

라이프니츠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변화의 순서에 대해 생각해 보자.

모든 변화의 시작은 지금 이 순간부터다. 지금 이 순간 내 휴대전화에 보이는

시간은 저녁 10시13분45초, 아니 46초, 아니 47초다….

‘지금’이란 잡힐 듯 말 듯 우리를 피해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다.

아무리 잡으려 해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사라져버리는 모래알 같은 존재다.

현재는 잡히지 않고,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파르메디스는 그래서 기원전 5세기에 시간은 사실 존재하지 않고 변화란 불가능하다며
‘hotos estin’, 고로 모든 존재는 하나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변화와 시간은 무엇인가? 대승불교(Mahayana)
산스크리트어 칼라(kala) 라 부르는 시간과 변화가 참이 아닌 단순한 가설이라고 가르치듯,
파르메디스 역시 변화는 착각이라고 주장한다.



외부 세상의 변화는 착각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지만 ‘변화와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순서와 변화의 규칙을
따르게 된다. ‘변화’라는 생각이 ‘않는다’라는 생각보다 먼저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그래서 인간은 시간이라는 생각의 프레임에서 빠져나갈 수 없으며,

시간은 공간과 더불어 모든 생각의 ‘선험적(a priori)’ 기본원리라고 주장한다.

시간의 본질이 무엇인진 알 수 없지만, 순서를 정해 주는 시간적 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현상이 동시에 일어난다.
시간은 동시를 막기 위한 최고의 도구인 것이다.



동시(同時)란 무엇인가? 19세기 말 반유대주의적인 독일에 등돌린 아인슈타인은 이탈리아로 이주한 부모님들과 함께 살게 된다.
따뜻한 지중해 햇살을 느끼며 시골길에서 자전거 타기를 즐겼던 그는 수많은 질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뉴턴은 시간이 절대적이고 우주 모든 곳에서 동일하다고 말했다. 운동이란 정해진 시간 안에 이동하는 공간이다.
시간이 절대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를 빠르게 올라가는 나는 남들보다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그럼 내가 만약 빛이고 빛으로서 아름다운 이탈리아 시골길에서 자전거를 탄다면,
나의 속도는 빛의 속도 + 자전거의 속도가 되겠구나… 아, 재미있는 상상이다….



하지만 19세기 수많은 실험의 결과는 항상 같았다. ‘빛의 속도는 변하지 않는다’고. 논리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과였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모든 걸 버리고 새로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만약 시간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
빛의 속도가 절대적이라면 어떨까?
거기에 물리적 법칙은 모든 관성계에서 같아야 한다는 직관적 가설을 추가하자 아인슈타인의 수식들은 혁명적인 결론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움직이는 물체들은 천천히 가면 길이가 길어지고 무거워 진다. 한 사람에게 동시에 일어난 사건은 다른 운동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물질과 에너지는 서로 바뀔 수 있다.’ 그렇구나… 라이프니츠의 추측이 맞았구나. 시간은 절대적이지도, 독립적이지도 않은 것이로구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1차원의 시간과 3차원의 공간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은 ‘시공간’이라는 새로운 4차원의 개념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은 엄격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여러 공간에 우리는 동시엔 있을 수 없지만 같은 공간을 여러 번 방문할 수는 있다.
공간은 이미 주어진 것이기에 앞뒤, 좌우, 아래위 자유롭게 운동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은 다르다.
1차원의 시간은 일방통행 길이다.
과거는 금지된 구역이고, 미래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왜 그런 것일까?

뉴턴의 역학에서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시간과 공간엔 선호하는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 동일한 물리학 법칙을 따르듯, 시간 역시 양방향으로 자유롭게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은 존재하는 것들의 상대적 변화이지만 그 변화엔 이해할 수 없는 방향성이 존재한다. 어린아이는 어른이 되고, 어른은 늙어 죽는다.
아인슈타인은
자전거에서 넘어질 수 있지만, 자전거가 스스로 다시 일어서진 않는다.

계란은 깨질 순 있지만, 자발적으로 다시 붙진 않는다.
마틴 아미스(Martin Amis)의 1991년 소설 ‘시간의 화살’ 에선 거꾸로 가는 시간을 그려본다.

주인공은 음식을 토해 내고, 반 소화된 역겨운 음식은 다시 접시에 맛있게 차려진다.
음식은 거꾸로 요리되고 버려진 봉지에 다시 포장되어 마트에 진열된다.
왜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선 이런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일까?

답은 ‘엔트로피(entropy)’ 때문이라는 게 현대 과학과 철학의 추측이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고립된 시스템에선 엔트로피, 그러니까 무질서도(度)가 꾸준히 증가해야 한다.
수많은 조각의 퍼즐을 생각해 보자.

퍼즐 조각들이 완벽하게 맞는 질서적인 배열은 단 한 가지다. 그러나 무질서적인 배열들은 천문학적으로 많다.
아인슈타인의 자전거는 천문학적으로 다양한 변화를 통해 넘어질 수 있지만, 자전거가 자발적으로 다시 일어서는,
그러니까 엔트로피가 줄어드는 방향으로의 변화는 0에 가까울 정도로 무의미한 확률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란 존재들 간의 상대적 관계다. 하지만 무질서적인 관계가
질서적인 관계로 변하기보다 질서가 무질서로 변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더 높다.

뇌는 엔트로피가 대부분 증가하는 지구라는 작은 통계물리학적 시스템에서 진화해 왔고,
그러기에 우리에겐 엔트로피 증가가 선험적(a priori) 시간 흐름의 방향, 바로 그 자체인 것이다.



… 중앙SUNDAY | 제318호·김대식 KAIST교수 | 2013.04.14

















 


'Big Questions'   삶은 의미 있어야 하나








▲ 코린토스 시의 왕 시시포스는 신들을 속여넘겼다는 죄로 영원히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질 돌을

굴려 올려야 하는 벌을 받았다. 티치아노의 그림(1548~1549).












 
  왜 사는가 고민 마라, 시시포스처럼 안 되려면…





1987년 4월 11일. 북 이탈리아 도시 토리노의 한 아파트 3층 자택에서 화학자이자 소설가인 프리모 레비가 뛰어내렸다.
그는 바로 숨졌다. 유대인이었던 레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였다.
『이것이 인간인가』 『주기율표』 같은 저서로 이탈로 칼비노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최고의 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레비의 자살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남겼다. 지상의 지옥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그가 왜 자유와 부를 다 누리던 편한 삶을 버린 것일까?

바퀴벌레만큼도 못했던 ‘아우슈비츠의 레비’는 살아남으려 발버둥쳤지만
북 이탈리아 ‘아름다운 도시에서의 레비’는 죽음을 선택했다.



장미는 자신이 장미인지 모르며 장미꽃을 피운다.
또 끝없는 해변가를 힘들게 기어가는 거북이에게 ‘왜?’ 라는 질문은 무의미할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이자 비극은 지구의 모든 존재 중 유일하게 “왜” 라는 질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사는 걸까?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차피 죽을 걸 왜 바둥거리며 살아야 하는가? 물론 질문을 할 수 있다고 꼭 답이 있을 필요는 없다.
‘73과 79사이의 소수는 0으로 나눌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엔 ‘그런 소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 하는 게 최선이다.
‘바늘 위에선 몇 명의 천사가 춤을 출 수 있을까?’ ‘천사’ 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그래서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 자체가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조금 더 생각해 보자.
“x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한마디로 ‘정해진 범위 y 안에서 x의 용도

또는 x가 y에게 줄 수 있는 결과들의 합집합’ 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벽과 못’ 이라는 범위 안에서 ‘망치’의 의미는 아마도 무언가를 두들겨 벽에 박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결국 무언가의 의미란 다른 무언가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그럼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범위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삶 그 자체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라고 질문하는 순간 우리는 단지 “삶과 삶의 관계” 라는 동일한 단어를 반복하는 난센스를 말할 뿐이다.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사진 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였다.


오스트리아 최고의 재벌 2세로 태어난
비트겐슈타인은 전 재산을 기증하고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기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케임브리지대 교수 자리를 거절하고 군대에 지원했다.
그리고 쏟아지는
포탄들 사이에서 대표작인 『논리 철학 논고(Tractatus-Logico-Philosophicus, TLP)』를 쓰기 시작한다.

“세상은 일어나는 사건들의 총체다” 로 시작한 TLP는 논리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그는 우주의 모든 사실은 ‘생각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는 논리적 그림’ 이라는 부정적 결론을 내리게 된다.


논리는 진정한 진실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뇌 안에 존재하는 기호들 사이의 형식적 꼬리물기라는 것이다.
고로
모든 철학은 말장난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한 진리를 어떻게 추구해야 할까?
비트겐슈타인은 진실은 논리나 말로 알아내기보다 조용히 느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너무나 유명한 TLP의 마지막 문장에서 그는 속삭인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 역시 침묵을 지키진 못했다. 죽기 전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은 행복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은 불행한 삶보다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인생일까? 만약 삶에 절대적 의미가 존재한다면 답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의미란 결국 용도이기에 주어진 용도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좋은 망치란 망치의 용도에 충실하면 되기에, 벽에 못 잘 박는 망치가 바로 ‘행복한’ 망치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래서 ‘좋은 인생’을 목표와 원인에 충실한 삶이라 정의했다. 하나의 존재는 물론 또 다른 존재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런 원인들의 꼬리물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설한 최종 원인 중 원인인 ‘신’에서야 끝나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인생의 의미는 원인들의 꼬리물기들을 잘 유지해야 한다는 정의를 내릴 수 있으며,
좋은 삶이란 나에게 주어진 꼬리물기 중 하나의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항상 품위를 유지하며 점잖게 표현했다면 그의 선생 플라톤은 강경파였다.
플라톤은 우리 눈에 보이는 물체들은 이데아 세상의 이상적 존재들의 왜곡된 그림자들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인생의 목표는 결국 이상 세계의 절대지식을 탐구하는 것이라는 게 플라톤의 생각인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사람들은 다양한 능력과 지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철학자가 돼 하루 종일 절대지식을 추구하긴 어려워 보인다.
더구나 누군가는 농사도 짓고 생각에 빠진 철학자를 위해 빵도 굽고 목욕물도 데워야 하지 않는가?
아, 그럼 이러면 어떨까? 이데아 세상을 추구하는 삶의 의미에 능력 있는 철학자들은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그 대신 능력이 없는 농부와 노예들은 철학자를 위한 노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공헌한다.
그래서 철학자는 철학 하면 행복한 거고, 노예는 주인 말 잘 들으면 행복한 거다.
또 고대 그리스 텐프로의 접대부였던 ‘헤타이라’들은 접대를 잘하면 행복한 거다. 빙고에 아싸라비아다!



노령에 플라톤은 시라쿠스의 독재자 디오니지우스 1세와 2세 부자들에게 굽실
거리며 아부한다: 왕이 철학자가 되거나,
철학자가 (제가 최고의 철학자인 건 아시지요, 독재자님?^^) 왕이 된 사회가 가장 행복하다고.
루브빅 마르쿠제(Ludwig Marcuse)는 그래서 『철학자와 독재자』라는 책에서
플라톤이야말로 권력에 눈 멀어 인류 최악의 계급사회를 구상한 타락한 지식인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인생에 절대의미 자체가 존재한다는 게 그렇게도 반가운 일일까?
의미가 있다는 것은 내 삶에 목표와 용도가 있다는 뜻이다.
나에게 용도가 있으면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나의 인생은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무언가의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나는 망치고, 망치이기에 벽에 못을 박아야만 한다. 의미 있는 인생이란 결국 존재의 무거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생이다.

그렇다면 나만을 위한 인생은 인생에서 절대의미를 뺀 후부터 가능해지게 된다. 삶의 의미를 포기하는 순간에야 우리의 존재는 가벼워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가벼운 인생은 쿤데라의 유명 소설에서 표현했듯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게 한다.
결국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어차피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인생의 의미가 아니라, 의미 없는 인생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다.



알베르 카뮈는 그래서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우리 인간들을 시시포스(Sisyphus)와 비교한다.
코린토스 시의 왕이었던 시시포스는 영원히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질 돌을 매번 다시 굴려 올려야 하는 벌을 받는다.
무겁기도 무거운 돌을 죽을 고생을 해 올려놓는 순간 돌은 다시 아래로 떨어지고, 이 무의미하고 지겨운 인생은 영원히 반복된다.
도대체 시시포스가, 아니 인간이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가? 시시포스의 죄는 너무 영리해 올림푸스의 신들을 속인 것이다.
인간이 시시포스와 같은 벌을 받는 이유는 장미와 거북이와는 달리 우리는 자아와 지능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능이 있기에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왜”라며 존재하지 않는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질문을 짊어져야 하는 무거운 인생을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명예와 부를 모두 누리게 된 레비는 아마도 “왜?”라는 질문을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 왜 그 많은 젊은이 중에 자신만 살아남았을까?
왜 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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