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Questions · 〈우리는 누구인가〉 9 - 12 回

2013.08.17 12:39

arcadia 조회 수:930 추천:33




김대식의 'Big Questions' 9 - 12 回 / 중앙SUNDAY Magazine






































































 

12
'Big Questions'   인간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나








▲ ‘과학을 통해 베일이 벗겨지는 자연의 여신’(Nature Unveiling Herself Before Science),

루이 에르네스트 바리아스(Louis-Ernest Barrias)의 조각, 1899. [위키피디아]














 
  만물을 꿰뚫는 단 하나의 법칙, 그 열쇠는 수학?






“Hotos Estin!.” , ‘존재는 하나다’ 또는 ‘존재는 그냥 존재다’ 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Hotos Estin!.” 플라톤마저도 ‘어두운 철학자’라며 어려워했던 파르메니데스의 말이다.
‘존재는 하나다’ 또는 ‘존재는 그냥 존재다’ 라는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기원전 8세기부터 그리스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이탈리아 남부 작은 도시 엘레아에서 태어난 파르메니데스는 생각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제우스신, 불, 나비, 나, 그리고
나의 생각들. 그들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



파르메니데스는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므로 우주엔 ‘변화’ 역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변화가 존재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하나의 존재가 다른 존재로 변하기 위해서는 그들
사이의 다른 무언가를 거쳐야 한다.
만약 ‘그 무언가’가 역시 존재하는 것이라면 단순히 ‘존재에서 존재가’ 유지되는 것이지 변신한다고 볼 수 없다고 한다.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존재들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는 무엇, 그러니까 ‘무(無)’가 존재해야 한다.
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하는 것들은 변할 수도, 생산될 수도, 소멸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우주의 모든 존재는 영원하며 하나라는 말이다.
존재는 그냥 존재다. 어렵다. 오죽하면 플라톤도 어려워했을까.



파르메니데스의 논리를 더 따라가서 존재하는 것이 오로지 하나라고 가설해보자. 하나와 여러 개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나는 같은 것이고, 여러 개는 다른 것이다. 구별할 수 없는 것은 같은 것이고, 서로 다른 것들은 구별할 수 있는 것들이다.
존재가 하나라면 그것은 서로 구별할 수 없는 것이며 그렇다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동일한 원리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제우스신만을 위한 법칙, 불을 위한 법칙, 나를 위한 법칙, 내 생각만을 위한 법칙같이 다양하고
서로 독립적인 법칙들이 우주에 존재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19세기 과학은 자연의 비밀을 캐는 학문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남부 이탈리아는 문화의 변두리였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예술가들로 북적이던 아테네, 그리고 사치스러웠던
이오니아인들이 보기엔 얼마나 촌스러운 곳이었을까?

하지만 그 시골 바닷가에 앉아 매일 밤 별들이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던

파르메니데스는 하나의 작은 생각을 피워 올렸다: 존재는 하나이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단 하나의 만물 법칙을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인간은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의 희망은 절망으로 바뀐다.

단 하나의 만물 법칙으로 설명하기에 세상은 너무나도 다양해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밤하늘의 별들과 내가 바다에 던진 작은 돌이 같은 법칙을 통해 존재한다는 것인가?
그러나 세상을 우리 눈만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만약
눈에 보이는 게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면?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빌려보자: “Phusis kruptesthai philei”. 자연은 숨는 것을 좋아한다고.
그렇다.
자연은 마치 베일을 쓴 여신과 같다. 눈에 보이는 것은 만물의 겉모습에
불과하다.
자연의 베일을 벗기는 순간 인간은 자연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랑스 파리 센강 변엔 오르세이 미술관이 있다.
기차역으로 쓰이던 건물을
미술관으로 변신시킨 -파르메니데스가 그다지 좋아했을 것 같지 않은- 건물
이다.
이 미술관 한 곳엔 루이 에르네스트 바리아스(Louis-Ernest Barrias)
1899년 완성한 ‘과학을 통해 베일이 벗겨지는 자연의 여신’이라는 작품이
전시돼 있다.
수줍은 자연은 영원히 숨으려 하지만, 과학은 그녀의 베일을
결국 벗겨버린다는 게 주제다.
그 누구의 동의도 없이 벌거벗겨진
자연의 가슴과 음부를 관찰하고 손으로 쥐어짜고 냄새를 맡아본다.

19세기 유럽인에게 과학은 자연과 함께 공존하는 게 아니었다.
과학은 자연을 단순히 성폭행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은 어떻게 자연의 베일을 벗길 수 있는 것일까?
바로 관찰과 수학을 통해서다. 바닷가에서 돌을 던진다고 상상해 보자.
어떻게 던지면 가장 멀리 날아갈까? 책상에 앉아 멋진 이론을 만들고, 상상만 한다고 풀릴 문제가 아니다.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이 주장했듯 자연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반복된 관찰, 고로 ‘실험’을 해야 한다.
각도를 너무
낮게 잡으면 수직으로 빨리 날아오르지만 금방 땅에 떨어진다. 거꾸로 각도를 높게 잡으면 공중엔 오래 머물겠지만, 멀리 날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멀리’ ‘오래’ 같은 단어들은 주관적이다. 읽는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관찰의 결과를 숫자를 통해 표현한다면 어떨까?







▲ 브라헤(Tycho Brahe)의 관찰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케플러의 ‘루돌프 표’(왼쪽).
케플러는 태양계를 플라톤의 입체들을 통해 설명하려 했다(오른쪽).





수천 년 전의 파르메니데스처럼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도 밤하늘의 별을 보며 존재와 우주의 비밀을 생각했다.

모든 존재를 엮어놓는 단 하나의 법칙. 그것이 무엇일까?
케플러는 우주구조의 비밀을 수(數)를 통해 알아내려 했다.

밤하늘 별들의 움직임을 잘 관찰한다면 존재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데이터가 필요했고 마침 튀코 브라헤(Tycho Brahe)
케플러가 그렇게도 원하는 데이터를 갖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루돌프 2세 황제 밑에서 일했던 브라헤는 당시 행성들의
관찰 기록을 가장 많이 갖고 있었다.
브라헤의 조수가 된 케플러는 하지만
바로 절망에 빠진다. 브라헤에게 자신의 관찰기록은 수집품에 불과했을까?

수십 년 공들여 모은 기록을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1601년 10월 24일, 귀족 만찬에 참석한 브라헤는 과음했지만
만찬이 끝날 때까지 화장실에 가지 못해 방광이 파열됐고 결국 그로 인해 숨지게 된다.

우주 비밀의 열쇠를 쥔 사람이 소변을 못 봐 죽은 것이다.



케플러는 브라헤의 관측기록을 기반으로 세상에서 가장 자세한 행성 관측
자료를 완성한다.
바로 후원자였던 황제의 이름을 딴 그 유명한 ‘루돌프 표’다.

표에 적힌 수천, 수만 개의 숫자들. 우주구조의 비밀이 이 어딘가에 숨어있을
게 분명하다!
우주의 비밀이 숫자들 사이에 있다면, 그 관계를 알아보면 되지
않을까?
자연의 법칙은 숫자들을 서로 묶는 수학적 원리를 통해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불 · 흙 · 공기 · 물을 존재의 4대 원소라고 생각했다.

만물의 모든 존재가 네 가지 원소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왜 하필이면 4개일까?
플라톤은 후기 작품 티마이오스에서 4대 원소,
그리고 그 원소들을 품은 우주 전체를 5종의 정다면체와 연관시켰다.

정다면체란 무엇인가? 정4각형, 정5각형, 정6각형 같은 정n각형을 결합하면
입체도형을 만들 수 있다.
그 많은 정n각형 입체도형 중 단 한 가지 정다각형
으로 둘러싸인 입체도형은 몇 가지나 있을까?
오늘날 플라톤의 입체라 불리는 정다면체는 정4면체, 정6면체, 정8면체, 정12면체, 정20면체 다섯 개뿐이며
각각 불, 흙, 공기, 우주, 물에 대응한다.



케플러는 생각했다.
수성 · 금성 · 지구 · 화성 · 목성 · 토성 등 당시 알려진 6개 행성들의 원형궤도를,
서로 포개져 겹을 형성한 플라톤의 5개 입체들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루돌프 표에 적혀있는 숫자들은 플라톤의 입체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지친 케플러는 마지막 시도를 한다.

만약… 만약… 태양계 행성들이 완벽한 원형을 따르지 않는다면?

만약 행성들이 원이 아닌 타원 궤도를 그리며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면?

케플러의 직감은 맞았고, 그의 행성 운동 법칙은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의
기반이 된다.
결국 우주의 법칙을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우주의 진리를 탐색하는 여행객을 그린 중세기 목판.
만약 우주 자체가 거대한 컴퓨터라면?





이해는 우주라는 컴퓨터의 계산 과정인가



자연은 관찰할 수 있고, 측정된 자연은 숫자로 표현된다.
숫자들 사이엔 절대적 관계가 존재하며,
우리는 그 관계들을 통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뉴턴, 아인슈타인, 양자역학, 초끈이론.

파르메니데스의 2500년 전 꿈을 우리는 이렇게 관찰과 수학을 통해 실현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수학일까? 수학이란 무엇일까?



한국어, 영어, C++(컴퓨터 프로그램 언어), 산스크리트같이 수학도 사람이 만들어낸 언어에 불과할까?
소련 수학자 안드레이 콜모고로프(Andrey Kolmogorov)는 “숫자는 인간 뇌의 창작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고
독일의 레오폴드 크로네커(Leopold Kronecker)
“1, 2, 3,… 같은 자연수들은 신이 만들었지만
나머지 모든 수학은 인간의 작품”이라 말했다.



하지만 두개골 속 1.5㎏짜리 고기 덩어리인 ‘뇌’가 만들었다는 수학으로
우리는 어떻게 우주의 기원과 양자 사이의 역학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일까?

수학자 유진 위그너(Eugene Wigner)는 그렇기에 “자연을 설명하는 수학의

‘지나칠 정도의 효율성’이 놀랍다”고 한다. 손으로 던진 돌은 지구 중력의 영향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형으로 움직인다. 두 점(点)질량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왜 우주의 법칙은 숫자들 간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자연의 법칙을 인간은 단순히 수학이라는 ‘만들어진 도구’로 설명하는 것일까?
아니면 플라톤이 주장한 대로 숫자들은 이데아 세상에 존재하는 실질적 실체
이며, 그들의 관계가 결국 우주의 법칙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그렇다면 한발 더 나아가 이런 주장도 해볼 수 있겠다. 우주 그 자체가 수학이라고. 수학적으로 가능한 모든 실체들은 물리학적으로 존재하며,
모든 존재들은 하나의 거대한
존재라는 함수를 계산해내는 컴퓨터의 부분들이라고.



우리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그렇다면 우리들의 ‘이해’ 그 자체가

우주라고 불리는 컴퓨터 안에서 끊임없이 작동 중인 유일한 존재함수의
계산과정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 중앙SUNDAY | 제336호·김대식 KAIST교수 | 2013.08.18






























 

11
'Big Questions'   우리는 왜 유명인에 집착할까








▲ 고대 그리스 시대 세계 7대 불가사의.
1 이집트 피라미드, 2 바빌론의 공중정원, 3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4 올림피아의 제우스상, 5 마우솔로스의 영묘, 6 로도스의 거상, 7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세상 주연급 삶에서 내 인생 해답 찾으려고?






이집트의 피라미드, 바빌론의 공중정원,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올림피아의 제우스상, 마우솔로스의 영묘, 로도스의 거상,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피라미드 외엔 오늘날 대부분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고대 그리스인들에겐 꿈에 그리는 세계 7대 불가사의들이었다.
너무도 거대해서 나약한 인간과 달리 영원히 존재할 거라 믿었던 최대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손이 빚은 것들은 인간을 닮는 것일까?
병으로 죽고 시간에 잊히는 우리의 운명과 같이 대부분 불가사의들은 지진, 해일, 전쟁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다.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 신전의 운명만 달랐다.

리디아(Lydia) 영토 에페수스에 지어진 이오니아 최대 건축물 아르테미스 신전!
길이가 130m가 넘고 18m 높이의 기둥들로 장식된 이 초대형 건축물은 그리스 신전 가운데 첫 대리석 신전이자 인간에게 고의적으로 ‘살해된’ 첫 건물이었다.


기원전 356년 7월 21일. 에페수스의 한 젊은 청년이 신전에 불을 지른다.

맹렬한 열기에 대리석은 이산화탄소를 내뿜기 시작했고, 이산화탄소 없인

건물에 붙지 않는 대리석은 메마른 각질같이 신전의 피부에서 떨어져 나갔다.
불은 밤새도록 탔고, 다음 날 아침 여신의 신전엔 잿더미만 남았다.

분노와 좌절로 거리에 주저앉은 에페수스 시민들에게 방화범은 말했다.

돈도, 권력도, 증오도 아니었다고. 단지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알리고 싶었다고.
자신은 다른 인간들같이 세상의 기억에서 이름 없이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고.



왜 인간은 유명해지고 싶은 것일까?
우선 유명해짐으로써 직접적 이익을 챙길 수 있다면 문제는 간단해 보인다.

모든 영장류들은 집단생활을 한다. 철갑 같은 피부나 날카로운 이빨이 없는
인간은 협력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에는 계급이 있고, 계급이
높을수록 더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최고 권력자인 알파는 가장 좋은 것을 먹고, 원하는 모든 여성을 통해 자식을 가질 수 있다.



알파가 아닌 나머지 구성원들은 최고 권력자의 행동을 잘 파악해야 한다.

그가 웃으면 안심해도 되지만, 화를 내면 바로 긴장해야 한다.
마음에 안 들면 내 숨통을 끊을 수도, 나를 집단 밖으로 몰아낼 수도 있다.
안락한 동굴과
안전한 마을에서 쫓겨난 나는 며칠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스인들은
그래서 사형보다 오스트라키스모스(ostrakismos), 즉 추방을 더 두려워했고,

피렌체에서 쫓겨난 단테 역시 ‘베아트리체’라는 추상적 사랑에서 마음의 평온을 찾으려 하지 않았던가?
비행기만 타면 전 세계 어디라도 갈 수 있는 오늘날 역시 고향에 영원히 되돌아올 수 없다면 몇 명이나 해외로 나가려 할까?







▲ 할리우드의 벽화에 그려진 스타들.




공식 병명으로 등재된 ‘유명인 숭배증’



알파가 아닌 나에게 권력자의 미세한 표정을 구별하고 기억하는 건
생존을 위한 최고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최고 권력자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공동체 최고의 유명인이
되고, 인간 사회는 자연스럽게 유명인과 무명인으로 나뉘게 된다.
내가 관심을 보여야 하는 사람이 내게 관심을 갖는 사람보다 많다면, 나는 약자이며 을이다. 나는 공동체의 배경인물인 셈이다.
하지만 힘, 노력, 재능, 운 덕분에 내 행동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내가 관심 주는 사람보다 많다면, 나는 갑이며 공동체의 주인공이다.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유명해지고 싶다’고 대답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살아남고 싶다’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힘 혹은 권력이 있으면 유명하다.
하지만 유명하다고 힘 혹은 권력이 있는 것일까?

아르테미스 신전의 방화범은 사형당했고, 비틀스 멤버 존 레넌의 암살자로

이름을 영원히 남기려 했던 광팬 마크 체프먼(Mark Chapman)은 여전히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힘은커녕 목숨과 자유조차도 지키지 못한다. 혜택이나 이득도 없는데 유명해지기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그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왜 우리는 유명인에게 그리도 관심이 많을까.
유명 연예인 때문에 교통이 마비되고, 그들의 시시콜콜한 사생활은 어떤 이들에겐 최고 관심사가 되곤 한다.
영국인 36%가 병적일 정도로 유명인들에게 집착한다고 한다.

‘유명인 숭배증(Celebrity Worship Syndrome·CWS)’이란 병명이 공식적으로
생길 정도다.



메릴린 먼로, 찰리 채플린, 제임스 딘… 할리우드의 전설 같은 스타들이다.

하지만 그들에 대한 관심과 오늘날 K팝 아이돌에 대한 집착이 우리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될까? 스타는 우리들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유명인들의 사생활에 무관심하다고 공동체에서 추방될 리 없고, 아이돌에게 집착한다고 그들의 명예와 부를 내가 얻는 것도 아니다.
스타의 지위는 전염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해석을 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유명인에게 집착하는 건,
그들을 통해 세상과 나의 인생이 설명되기 때문이라면?
세상은 인간에게
언제나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 그 자체였다. 숲에서 튀어나온 맹수들이 가족을 잡아가고, 쏟아진 비에 세상은 물바다로 변한다.
어제까지 뛰놀던 아이가 피를 토하며 쓰러져 숨을 쉬지 않고, 먹을거리 풍성했던 여름이 겨울로 접어들면
세상은 꽁꽁 얼어붙고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다.
세상은 잔인하지만 우리는
잔인함의 이유를 모른다. 이유를 모르면 이해할 수 없고, 이해를 못하면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불확실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내면의 카오스에 무기력한 현대과학



최초의 인간에게 우주는 카오스였다.
원인과 이유가 없는 ‘참을 수 없는 무질서’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획기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석기시대 아인슈타인이라고 하자.
그의 뇌 신경회로망 사이로 유혹적인 생각 하나가 바이러스같이 퍼지기 시작
했다.
만약에 나, 너, 우리 외에 다른 존재들이 있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바로 그들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원인이라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늑대들에게 쫓겨 해가 쉬지 않고 동에서 서로 도망 다니는 것이라면?
바람은 세상 끝에 사는
거인들의 거친 숨이라면? 천둥은 아버지 같은 하늘 신의 노여움이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자연현상 하나하나에 보이지는 않지만 익숙한 존재를 연결시키는 순간
무질서의 카오스는 질서의 코스모스(cosmos)로 변한다.
천둥은 이해할 수 없지만, 아버지의 노여움은 너무나 친숙하기 때문이다.



어렵게 코스모스를 얻었지만 언제든 두려운 카오스로 쫓겨날 수 있다.
만물의 원인인 신들의 동기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왜 하늘 신은 노여워하고
바다신은 늘 태풍을 일으키는 것일까. 해답은 하나. 신들에게 인간과 동일한
동기를 부여해 주면 된다.
제우스 신은 예쁜 여자만 보면 정신 못 차리는 늙은이고, 아레스는 바람피우는 아내를 떠나지 못하는 멍청한 싸움꾼이며, 포세이돈은 큰형에게 기죽어 사는 만년 둘째다.
올림포스 신들이야말로 원조 막장드라마에 출연한 연예인들이었고, 그들에 대한 가십과 집착과 관심을 통해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만의 코스모스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류최초로 단일신을 믿었던 파라오 ‘아크나톤’

태양신을 믿은 파라오 ‘아크나톤’



하지만 신들의 유치한 막장드라마만이 만물의 원인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답일 필요는 없다.
고대 이집트 제18대 왕조 아크나톤은 어쩌면 인류 최고의
혁신자였는지도 모른다.
이름이 아멘
호테프였던 그는 재위 5년 때 선포한다. 우주에는 단 하나의 신만 존재한다고.

뱀 · 늑대 · 사람처럼 생긴 수백, 수천의 신들은 원래 없고 오로지 태양신 ‘아톤’ 하나만 존재하며 만물의 모든 원인은 바로 그 유일신에게 있다고.
자신의 이름도 ‘아톤의 종’, 고로 ‘아크나톤’으로 바꾼 그는 하루아침에 우주의 모든 질서를 단 하나의 존재만을 통해 설명하려 했던 것이다.



단 한 명의 수퍼스타를 통해 만물의 질서를 받아들이기에 인간의 두려움은 너무나 컸던 것일까?
아크나톤의 기억은 이집트 역사에서 지워졌고, 우리는 여전히 마치 올림포스 신 같은 스타들을 통해 나만의 질서를 만들려 한다.
아무리 양자우주론과 진화론이 만물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 해도, 인간에겐 커다란 질문 하나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현대과학이 제시하는 질서의 코스모스는 대부분 인간들이 느끼는 내면의
카오스에 아무런 답을 줄 수 없는 듯하다.
하지만 배경인물에 지나지 않는 보통 사람 ‘우리’와 달리 유명인은 사회의 갑이며 공동체의 주연급 인물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들의 삶을 통해 내 삶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이 불안한 내 마음의 코스모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우리는 인생의 주인공 같아
보이는 타인의 삶을 통해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하찮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을 설명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방화범을 처형한 에페수스 관리들은 결정한다. 자기 이름을 남기려고 신전을
불지른 자의 이름은 인류의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져야 한다고.
방화범의 이름을 언급하는 행위는 사형으로 처벌하겠다고. 하지만 역사란 아이러니의 다른 이름일 뿐일까?
그 결정을 내린 에페수스 관리 그 누구의 이름도 우리는 모르지만, 방화범의 이름은 알려져 있다.
바로 헤.로.스.트.라.투.스(Herostratus)
다.



… 중앙SUNDAY | 제333호·김대식 KAIST교수 | 2013.07.28




















 
  우리가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인간이니까





우리가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인간이니까



기원 후 117년에 로마제국 14번째 황제로 하드리아누스가 취임한다.

당시 알려진 지중해 주변 세상 모두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로마인들은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의 바다를 단순히 “Mare Nostrum”, 그러니까
“우리 해”
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황제로선 처음으로 그리스 철학자 같은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하드리아누스. 그의 그리스 사랑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황비 사비나와 합방하지 않았던 그가 어린 그리스 소년 안티누스와 연인
사이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렇다. 중년의 하드리아누스는
어리고 아름다운 소년 안티누스를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시끄럽고 복잡한 로마를 피해 평생 제국 곳곳을 떠돌아다녔던 하드리아누스
옆엔 항상 그의 사랑 안티누스가 있었던 것이다.
요즘 같아선 아동 성추행자로 체포되었을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안티누스는 이집트 나일강에 빠져 익사한다. 단순한 사고였을까?
아니면 황제의 사랑을 듬뿍 받던 소년을 질투한 암살이었을까?
아니면 어린 나이에 밤마다 냄새 나는 늙은이와 잠을 자야 하는 치욕을 견디지 못한 자살이었을까?
훗날 역사가들은 떠나간 안티누스를 그리워하던
황제가 마치 “여자같이 울었다”고 한다.
원로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제는
죽은 연인을 신격화하고 ‘Antinopolis’라는 도시를 세워 신으로 숭배하게 한다.



그리운 연인의 얼굴을 하루라도 보지 않곤 살 수 없었던 늙은 황제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박물관에서
그리스-로마 문명 그 어느 인물보다도 한
시골 소년의 얼굴을 더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은 과연 무엇일까?
사랑이 무엇이기에 평범한 소년이 제우스와 아테네 옆에 당당히 신으로
설 수 있었던 것일까?



아름답고 어린 엘로이즈(Heloise)의 가정교사였던 철학자 아벨라르

(Petrus Abelard·1079~1142) 역시 사랑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기 시작한다.

로마제국 멸망 후 중세기 철학은 '보이지는 않지만 완벽하다' 는 플라톤의
‘저 세상’ 위주였다.
단순히 플라톤의 제자로만 알려졌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아비체나(Avicenna),
아베로에스(Abu I-Walid Muhammad bin Ahmad bin Rusd) 등을 통해 드디어 유럽에도 널리 알려지자 지식인들은
충격에 빠진다.
불확실하지만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역시 단순한 설득과
믿음이 아닌 ‘논리’라는 생각의 도구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전문가였던 아벨라르는 생각했다: 인간의 욕망과 행동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만물을 창조한 신이 시시콜콜한 우리의 모든 행동을
좌우할 리는 없다.
그렇다. 인간에게는 ‘의도’라는 것이 있으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있다. 인간은 자유롭다.



자유로운 엘로이즈는 별을 사랑했고, 자유로운 아벨라르는 엘로이즈를 사랑
했다.
사랑은 아이를 만들었고, 케케묵은 파리의 골목길보다 청청 하늘을 더
사랑했던 그들은
아이에게 별자리 측정에 사용되었던 ‘Astrolabe’ 라는 기계를 연상해 ‘아스트로라베’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자신을 가정교사로 채용했던
엘로이즈 삼촌의 눈을 피해 이들의 사랑은 시작되었고,
임신을 한 조카와
가정교사의 관계를 알게 된 삼촌은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조카를 수녀원으로 보낸 삼촌은 아벨라르를 납치해 거세시켜 버린다.

‘끝’이길 기대했던 삼촌의 바람과는 달리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진정한
사랑은 이제야 ‘시작’되었던 것일까?
평생 서로를 다시 볼 수 없었던, 더 이상 자유롭지도 않은 수녀와 수도사가 된 그들이 주고받기 시작한 편지들은

그들만의 변치 않는 사랑, 그리고 인간의 변치 않는 자유를 보여준다.







인간의 섹스는 거의 그로테스크한 코미디



사랑이란 어쩌면 잘랄루딘 루미(Jalal ad-Din Muhammad Rumi·1207~1273),
사디 시라지(Abu-Muhammad Muslih al-Din bin Abdullah Shirazi·1210~1291) 같은 페르시아 시인들이 말했듯 우주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인지도 모른다.

의미 없이 던져진 이 세상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하늘과 신을 경험할 수 있는
잠깐의 순간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랑은 생물학적으론 지극히
단순하다. 무성 생식으로 번식하는 단세포나 박테리아와는 달리 대부분
동물들의 번식은 유성 생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정자와 난자로 분화된
배우자들의 생식 세포들이 융합되어 새로운 생명체의 기반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지구에 존재하는 생명체 사이엔 무성 생식보다 유성 생식이
압도적으로 더 많은 것일까?
섹스란 도대체 왜 존재할까?
‘유전적 다양함을 위한’ ‘생존에 가장 유리한 유전을 골라내기 위한’
또는
‘망가진 DNA를 수선하기 위한’ 등 다양한 이론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왜 그렇게도 많은 시간, 땀, 에너지가 투자되는 방법을 통해
번식해야 하는지 모른다.
유성 생식 그 자체의 기원이 미스터리라면,
인간의 섹스는 거의 그로테스크한 코미디에 가깝다.



사회생물학자들이 주장하듯 수억 개의 정자를 언제든지 쉽게 만들어내는

수컷과 달리 수개월의 투자를 통해야만 번식할 수 있는 암컷의 생식 전략이
다를 수밖에 없다.
젊은 여자들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수컷들은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전 총리뿐만이 아닐 것이다.
또 암컷(많은 여성 포함) 역시 자신의 막대한 생물학적 투자를 보호해 줄 남성의 돈이나 권력에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



크고 살찐 벌레를 물고 와야만 짝짓기해 주는 암컷 새와 같이 여자친구 생일에 명품 백을 선물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다.
하지만 번식 뒤 바로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야 할 인간의 수컷은 왜 남편이 되어 가족을 지키고 자식들을
위해 헌신할까?
집단에 새로운 우두머리가 된 사자는 前 우두머리의 자식들을 모두 죽여버리고 임신 중이던 암컷들은 유산을 유도하는 호르몬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버림받은 인간의 암컷은 그 누구보다 강한 ‘어머니’가 되어 자식들을
보호한다.



섹스는 호모사피엔스들 간 유성 생식의 시작이지만, 우리들의 지속된 번식은
사랑을 통해 가능해진다.
단순한 생물학적 욕망으로 시작한 관계는 도파민,
세로토닌 등을 뿜어내는 뇌 덕분에 상대에 대한 매력과 끌림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욕망과 끌림은 지속적일 수 없다.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 서서히
생산됨으로써 단순한 끌림은 애착과 ‘정’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나, 그리고 너, 그리고 우리의 유전, 그리고
우리 뇌의 호르몬들 간의 치밀한 바통 물려 주기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인간이 하는 그 무엇보다도 사랑이 더 어렵고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사랑해야 할까?

우주의 모든 지식은 이미 존재하는 절대 지식의 재발견이라고 생각했던
플라톤이었기에, 그에겐 절대 사랑의 대상 역시 이미 정해져 있었다.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주장했듯,
‘남자-남자’ ‘여자-여자’ ‘남자-여자’ 같은
두 개의 머리와 네 개의 팔다리를
가졌던 우리들의 조상은 제우스에게 도전하다 두 동강이가 났다는 것이다.

제우스는 머리 하나와 두 개의 팔다리를 가진 반쪽 인간들을 시간과 공간에 흐트러뜨렸고, 인간은 그 후 잃어버린 또 하나의 ‘나’를 찾아 헤맨다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사랑은 언제나 재발견일 뿐이고 ‘너를 사랑해’ 라고 말하는 우리는
사실 꿈에서 그리는 ‘또 하나의 나를 사랑해’ 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는 또 다른 ‘나’의 존재는 확률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완벽한 또 하나의 ‘나’를 만날 수 없는 우리는 그래서
완벽할 수 없는 ‘너’를 사랑해야 하기에, 쇼펜하우어가 인간의 사랑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했던 것이다.



로봇 연인 겪으면 사람을 사랑할 수 없으리



그렇다면 ‘나’는 나만 사랑하고, ‘너’는 ‘너’만 사랑하면 되지 않을까?

지속적으로 발전 되는 과학기술 덕분에 늦어도 2050년께엔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로봇들이 만들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인터넷이 야동과 포르노 덕분에 대중화될 수 있었듯, 인간다운 로봇은
제일 먼저 우리들의 욕망 만족에 사용될 것이 분명하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A.I.’에서 중년 여성들을 만족시켜주는 플레이보이
로봇 ‘지골로 조’가 그러지 않았던가?
‘로봇 연인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인간은 다시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고. 당연한 말이지 않을까?

월요일엔 귀여운, 화요일엔 지적인, 수요일엔 아름다운 연인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실망과 그리움이란 없어지고 슬픔과 질투라는 단어는 무의미해진다.

대화를 하고 싶으면 끝없이 할 수 있고, 귀찮아지면 ‘OFF’ 단추를 누르기만
하면 된다.
나의 행동은 그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며, 나는 그 누구의
행동에도 상처받을 필요 없다.



인간의 역사는 어쩌면 생산자와 소비자의 역사라 할 수 있겠다.
먼 옛날 우리는 언제나 생산자이며 소비자였다.
배가 고프면 사냥을 하고,
동물의 껍질을 벗겨 불을 피워야만 먹을 수 있었다.
시간은 지나고, 문명과
기술의 발전 덕분에 우리는 생산하지 않고도 대부분의 욕망을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배가 고프면 냉장고를 열어 원하는 것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바로
그것이 우리 다음 세대 사랑의 모습이지 않을까?
더 이상 노력도, 그리움도,
실망도, 질투도 없이, 잘 꾸며진 UI(User Interface: 사용자와 컴퓨터 간에

의사소통을 하는 중계화면)를 통해 오늘밤 연인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리움도, 질투도, 실망도 없는 사랑이 여전히 사랑일까?



사랑은 왜 해야 할까?
우리가 바로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 중앙SUNDAY | 제330호·김대식 KAIST교수 | 2013.07.07










▲ 독일인 디지털 아티스트 프란츠 스타이너(Franz Steiner)의 ‘인간과 로봇 간의 사랑’(2007).

















 

9
'Big Questions'   우리는 누구인가








▲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1908년 작품 ‘아폴론과 다프네’. [위키피디아]












 
  4만 년 전 식인종 혹은 찬란한 별들의 후손?





“악몽을 꾸다 깨어난 그레고르 잠사는 침대 위에 괴물같이 커다란 벌레로
변해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유명한 소설 『변신』은 이렇게 시작한다.
영업사원으로 열심히 일해 가족을 먹여 살렸던 그레고르의 변신은 그의 가족들의 변신을 불러온다.
충격과 걱정은 서서히 역겨움과 귀찮음으로 바뀌어 가고 “저것”을 없애버리자는 첫 말은 사랑스러웠던 여동생의 입에서 나온다.
집안의 희망이며 미래였던 그가 왜 갑자기 “저것”이 되어버린 것일까?



우리는 매일 일어나며 확신한다: 오늘 아침의 ‘나’는 바로 어제 침대에서

잠들었던 같은 ‘나’라고. 하지만 적어도 우리의 몸은 영원하지도, 항상
일치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몸은 수십조 개의 세포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
세포들은 주기적으로 만들어지고, 분열하고, 죽는다.
허파 세포는 2~3주마다, 간 세포는 5개월에 한 번씩 만들어진다.
창자 세포들이 교환되는 데는 2~3일이 걸리고, 피부 세포들은 시간당 3만~4만 개씩 죽어 매년 3.6㎏이나 되는 세포들이 몸에서 떨어져나간다.
창문을 열어놓지 않았는데도 바닥에 하얗게 쌓인
‘먼지’ 대부분이 바로 얼마 전까지 ‘영원히’ 대리석 같은 피부로 만들기 위해

씻고, 바르고, 마사지해 주었던 우리들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인간으로 잠들어 벌레로 깨어나지는 않더라도,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변신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변하지 않는 듯한 ‘나’라는 그 정체성의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



벌레로 변신해 벽을 기어다니면서도 그레고르는 여전히 그레고르로 생각하고 그레고르로 느낀다.
사랑에 빠진 아폴론 신에 쫓겨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되자 나무로 변했다는 그리스 신화의 다프네 역시 변신 후 여전히 다프네로 생각하고 다프네로 느끼지 않았을까?
피부나 간 세포와 달리 대부분 대뇌피질 신경세포들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도, 분열하지도 않는다. 덕분에 우리는 오래전 유치원에서 들었던 노래를 아직도 부를 수 있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프루스트는 ‘마들렌’ 쿠키 맛 하나로 시시콜콜한 어린 시절 추억들을
끄집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의 말을 빌려
“그레고르로 생각한다, 고로 그레고르다”라고 생각해볼 수 있을까?



헤겔 “정체성은 타인과 갑을 관계로 성립”



세상과 분리된 생각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와 정체성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데카르트와 달리
독일 철학자 헤겔(G.W.F. Hegel)은 정체성이란 항상 다른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혼자 아무리 이불을 뒤집어쓰고 생각하고, 비판하고, 의심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그레고르가 아무리 자신을 영업사원 ‘그레고르 잠사’라고 기억하고 생각해 봐야 다른 사람 눈엔
징그럽기 짝이 없는 커다란 벌레 한 마리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헤겔은 규칙과 계급 위주인 프러시아를 ‘이성이 가장 잘 실현된 보편국가’라는 멘붕 스타일의 발언으로 유명하다.
그런 프러시아는 나치 독재를 가능하게 했고, 광적인 민족주의에 미쳐버린 독일인들은 바로 몇 달 전
옆집에서 의사, 변호사, 선생님으로 함께 살았던 유대인들을 없어져야 할 “저것들”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우디 앨런 감독의 작품 중 ‘젤리그’라는 영화가 있다.

‘인간 카멜레온 병’에 걸린 영화의 주인공 레오나르 젤리그의 인생은 “변신” 그 자체다.
흑인들 사이에선 흑인이 되고, 보수주의자 사이에선 보수, 진보주의자 사이에선 좌파가 된다.
야구장에선 멋진 야구선수이지만, 뚱뚱한 사람들 곁에선 고도 비만 현상을 보인다.
마치 로마제국에선 로마인, 이슬람 스페인에선
아랍인, 독일에선 모범적 독일인이 되려 했던 유대인들의 2000년 디아스포라(이산(離散) 유대인)를 보여주듯 말이다.







천재적인 화학자 프리츠 하버(Fritz Haber)도 그런 한 명이었다.
헤겔의 나라 프러시아에서 유대인 부모 아래 태어난
하버는 그 누구보다도 더 독일스러운 독일인으로 변신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렇게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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