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 장석주(1954 - )
잎을 가득 피워낸 종려나무, 바다에 내리는 비, 그리고 당신.
그것들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몇 날 며칠의
괴로운 숙고 끝에 나는 당신의 사랑을 거절하기로 마음을 굳힙니다.
부디 내 거절의 말에 상처받지 않기를 빕니다. 나는 이미
낡은 시대의 사람이고, 그러니 당신이 몰고 오는 야생 수목이
뿜어내는 신선한 산소를 머금은 공기에 놀라 내 폐가 형편없이
쪼그라들지도 모르죠. 그러니 나를 가만 놔두세요. 더 정직하게
말하죠.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혼자 잠들고, 혼자 잠깨고, 혼자
술 마시는 저 일인분의 고독에 내 피가 길들여졌다는 것이죠.
나는 오로지 어둠 속에서 일인분의 비밀과 일인분의 침묵으로
내 사유 를 살찌워 왔어요. 내게 고갈과 메마름은 이미 생의
충분조건이죠. 난 사막의 모래에 묻혀 일체의 수분을 빼앗긴 채
말라가는 죽은 전갈이죠. 내 물병자리의 생은 이제 일인분의
고독과 일인분의 평화, 일인분의 자유를 나의 자연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거기 당신의 자리에 서
있으면 됩니다. 어느 해 여름 우리는 바닷가에서 밤하늘에 쏟아
지는 유성우(流星雨)를 함께 바라봤지요. 그때 당신과 나의 거리,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은 그 거리를 유지한 채
남은 생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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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 장 석 주
희망은 절망이 깊어 더 이상
절망할 필요가 없을 때 온다.
연체료가 붙어서 날아드는 체납이자 독촉장처럼
절망은
물빠진 뻘밭 위에 드러누워
아무것도 보고싶지 않아 감은 눈 앞에
환히 떠오르는 현실의 확실성으로 온다.
절망은 어둑한 방에서
무릎사이에 머리를 묻고
서랍을 열어 서랍 속의 잡동사니를 뒤집어 털어내듯이
한없이 비운 머릿속으로
다시 잘 알 수 없는 아버지와 두 사람의 냉냉한 침묵과
옛날의 病에 대한 희미한 기억처럼
희미하고 불투명하게 와서 빈 머릿속에 불을 켠다.
실업의 아버지가 지키는 썰렁한 소매가게
빈약한 물건들을
건방지게 무심한 눈길로 내려다보는 백열전구처럼.
핏줄을 열어, 피를 쏟고
빈 핏줄에 도는 박하향처럼 환한
현기증으로,
환멸로,
굶은 저녁 밥냄새로,
뭉크 畵集의 움직임 없는 여자처럼
카프카의 K처럼
와서, 살고 싶지 않은 마음의 주인을
달래서, 살고 싶게 만드는
절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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