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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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Chuck2018.02.2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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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의 나지용


 

내게는 두 가지 모습의 그림자가 있었어.

하나는 나를 닮은 녀석이고

또 하나는 커다란 피아노의 모양을 닮은 녀석이었지.

 

누가 진짜인지......

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웠지.

그리고 나를 약 올리는 가짜 녀석을 찾아내어,

혼을 내주고 싶었지.

 

어느 날인가 길을 걷다 문득 바라본 그림자는

분명 나의 얼굴과 몸을 닮았는데

또 어느 날인가의 그림자는

피아노의 모습을 하고 있었거든.

 

나는 지난 밤 달빛 사이로

나의 진짜 그림자를 찾아냈어.

 

그 그림자 녀석은 나의 얼굴과 몸을 하고,

열심히 피아노를 두드리고 있더군!

 

포토에세이집 클래식 보헤미안(문학동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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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 웰스리는 3세에 오르간을 쳤고, 리처드 스트라우스는 6세에 작곡을 시작했으며, 베토벤은 8세에 연주회를 가졌다. 쇼팽은 9세에 첫 연주를 시작했고, 슈베르트는 11세에 중요한 작곡을 시작했다. 그리고 1991년 부산에서 태어난 지용은 5세에 피아노로 찬송가를 두드렸다. 지용의 천재성을 확인한 미국 메네스 음대 학장과 김유리 교수는 미국 유학을 권했고 가족은 지용이 여덟 살 되던 1999년 지용의 음악적 성공을 위해 결단을 내렸다. 지용 아빠는 당시 부산의 한 고등학교 교사였고, 성악가인 엄마는 운영하던 음악학원을 접고 세탁기술 하나 달랑 배워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 글은 시가 아니다. 365일 세계를 무대로 연주여행을 다니는 클래식 보헤미안 ‘앙상블 디토’의 열아홉 살 클래식계의 지드래곤으로 불리는 피아니스트 지용이 그들 멤버와 함께 꾸민 포토에세이에 실려 있는 낙서에 가까운 독백체 글이다. 어느 날 자신의 그림자와 피아노 형상을 띈 또 다른 낯선 그림자가 만나 겪는 갈등을 그렸다. 달빛을 받으며 열심히 피아노를 두드리는 융합된 그 모습에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한다. 혼돈과 갈등을 극복하고 자아를 찾는 과정을 담백하게 그린 내용인데, <문학동네>에서 책을 펴낸 그해 ‘예술의 전당’ 공연 관람 후 나도 한 권 구입했다. 하지만 사인을 받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에 서지는 않았다.


 몇 년 전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하고 올해 27세가 된 지용은 ‘리처드 용재 오닐’이 이끄는 ‘디토’와의 연장계약도 끝났고, 얼마 전 세계적인 클래식 레이블 ‘워너클래식’을 통해 인터내셔널 데뷔 음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전 세계 동시 발매되었다. 12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워너클래식과 계약을 맺은 한국인 피아니스트로는 백건우, 임동혁, 임현정에 이어 지용이 네 번째다. 지난 2016년 2월 제58회 그래미시상식 중 방영된 ‘구글’ 광고에서 베토벤 월광 소나타 3악장을 치면서 더욱 주목 받은 게 계기였다. 이후 수많은 에이전트, 매니지먼트에서 러브콜을 받은 지용은 워너클래식과 레코딩 계약을 맺었다.


 지용은 “그동안 다른 아티스트들이 많은 앨범을 발표했는데 나까지 앨범을 내야 하는지 고민이 많았다”며 부담을 느끼면서도 “300년 전 작곡된 곡을 똑같이 연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지금 이 시대에 바흐가 전하는 느낌을 담아 연주했다”고 말했다. 지용은 “바흐를 통해 순수함을 다시 찾았다”면서 “이번 앨범도 새로 출발하는 의미로 바흐를 선택했다”고 덧붙였다. 모든 음을 낼 수 있게 조율된 피아노와 건반으로 ‘서로 함께, 그러나 똑같지 않게(Be together, Not the Same)’라는 슬로건을 잘 담아낸 연주라고 평가받았다. 지용은 클래식 외에도 팝, 일렉트로닉, 무용, 영상 등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병행하며 다재다능함을 뽐내왔다.


 얼핏 클래식 연주자 같지 않은 개성 넘치는 외모와 트랜디한 패션 감각으로도 유명한 지용은 기존의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연주자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지용은 사실 방황하던 10대부터 연주의 본질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 고민을 통해 얻은 투철한 사명감을 연주활동에 반영해 왔다.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 역시 나아지기를 희망하는 그의 바람을 이번 앨범에 담았다. 이번 앨범의 표지 이미지 역시 평소 친분이 있던 팝 아티스트 김태중이 지용의 모습을 그린 팝 아트로 장식했다. “김태중 작가로부터 첫 작업 결과를 받을 때부터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딱 맞았고, 너무 마음에 들어 엉엉 울 정도였다”고 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피아니스트에게는 성경과도 같은 곡이며, 관객에겐 언제든지 실연으로 보고 싶은 레퍼토리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오는 23일과 24일에는 익산 예술의전당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아임 낫 더 세임(I am not the same)’이라는 제목으로 리사이틀을 갖는다. 지용은 “세상은 ‘다름’을 나쁜 것으로 바라보며 모두가 똑같아져야 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은 서로 다른 생각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같은 날 시집 출간기념회만 아니라면 오랜만에 자랑스러운 조카 지용의 성숙한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지용의 음반 발매를 축하하며 리사이틀의 성황을 응원한다 (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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