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by오연희

전자박람회의 미투

posted Mar 1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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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따라 샌디에이고 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전자박람회를 다녀왔다.

긴 행렬을 따라 컨벤션센터 파킹장으로 진입하는데, '쎄뇰리~' 부르는 음성이 들린다. 저쪽 차선에서 한 남자가 차창 밖으로 고개를 쭉 빼고 손을 흔들고 있다. 이십수 년 전 남편이 주재원으로 근무한 회사의 멕시칸 엔지니어 루이스, 멀찍이서 바라보는 두 남자의 표정이 어릴 때 헤어진 고향 친구 만난 듯하다. 전시장 입구에서 다시 만나 한참 이야기를 나누더니 점심 약속을 맺고서야 헤어진다.

부스와 사람으로 꽉 들어찬 전시장, 부스를 빌리고 제품을 설치하고 사람을 파견하는 등, 살아남기 위한 투자의 흔적들이 눈에 들어오고. 육중한 기계가 탁탁탁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큰 부스 안쪽 테이블에는 고객과 상담 중인 듯 진지한 분위기가 감돈다.

솔직히 기계치인 나의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그들의 비즈니스 세계가 아니라 고객의 관심을 끌기 위한 미끼들이다. 회사소개가 새겨진 쇼핑백과 볼펜은 지극히 평범한 미끼. 특이한 디자인의 수첩, 차에 부착하는 안경 걸이, 정밀 부품을 측정하는 자, 드라이브, USB, 공, 요즘 유행하는 스피너까지 아이디어 만발이다.


전람회장의 반도 못 돌았는데 점심시간이다. 슬슬 배도 고프고, 루이스와의 약속도 있고 해서 전시장 안에 있는 카페로 갔다.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있는 원탁이 하나 보여 얼른 다가가 루이스와 함께 온 두 명의 동료까지 생각해 다섯 개의 의자를 확보했다.

콜라를 마셔도 여전히 목이 마르는 뻣뻣한 피자를 함께 먹고 남자들은 다시 전시회장으로 흩어졌다. 문득, 그들의 뒷모습이 전쟁터 나가는 용사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둘러보니 비즈니스가 남자들만의 영역은 아닐 텐데 전람회장의 사람들 대부분이 남자이다.

얼마가 지난 후 돌아온 남편이 그만 가자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이다. 내 옆자리 앉아있던 백인 남자가 "돈 터치 허" 하더니 "여자 허락받고 만져야 해"란다. 근엄한 척 웃음 띤 표정을 보며 '미투'와 연관된 농담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미투 폭풍' 이 끝없이 몰아치고 있다. 백번 공감 가는 글은 또 얼마나 많은지. 인권에 대한 생각의 폭이 마구 넓어지는 것 같다. 충격적인 소식에 따르는 무성한 말들, 다른 의견에는 돌 날아올 것 같은 분위기, 그래서 사람들은 농담 속에 속마음을 담아내기도 하나 보다. 웃자고 한 말에 딴지 거는 사람은 드물 테니.

그런데 일상 속의 농담이 미투 운동의 본질과는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이 꽉 찬 처녀총각이 주위에 많은 탓인지 이런 분위기가 자칫 사귐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봐 은근 염려스럽다. 이건 그것과 혹은 그건 이것과 다른 이야기야, 라고 해도 '분위기'가 경계를 흐리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말도 다르게 들리는 세월이라선지, 이전과는 색이 좀 다른 전자박람회를 다녀온 기분이다.



미주중앙일보 < 이 아침에> 2018년 3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