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by오연희

그냥 주는데도 눈치 보면서

posted Dec 0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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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크로가 진행되는 한 달 여의 기간동안 조금씩 짐 정리를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삿짐 중에 가장 많이 정리가 되는 부분은 역시 가족의 옷입니다. 일년에 한번도 안 입었던 것을 중심으로 하나하나 내놓기 시작했더니 다섯 개의 커다란 비닐 봉지에 가득 찼습니다. 혼자서 하나 들기도 힘들만큼 가득채운 시커먼 봉지들을 보면서 엄청 회개를 했습니다.

‘옷장회개’ 했다고 했더니 남편 왈 “그 약발 얼마나 가겠냐!!” 김 팍 새는 소리를 했습니다. ‘이번에는 좀 달라…’저 자신에게 단단히 타일렀습니다. 결국 입지도 않으면서 이사할 때 마다 끈질기게 끌고 다닌 옷들도 이번에는 과감하게 봉지 속으로 집어넣었습니다. 당장 기부할 수 있는 기관은 있지만 내년 봄 교회에서 선교바자회라도 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일단 새로 이사 온 집 거라지에 내려놓았습니다. 서랍은 좀 비워졌지만 거라지는 훨씬 복잡해졌습니다. 그래도 좋은 일에 쓸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에 견딜 만 합니다.

정말 꺼내놓으니까 비슷한 종류의 살림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살림을 참 엉터리로 살았구나 싶습니다. 일년에 한번을 사용해도 다시 사려면 돈이니까 꾸역꾸역 다시 싸 들고 가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또 짐이 만만찮습니다. 이사할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싸 들고 가는 것도 버리는 것도 참 보통 일이 아니다 싶습니다. 옷은 일단 모았다가 어디든지 기부하면 되지만 버리기도 아깝고 보관도 힘드는 것은 옷걸이, 김칫병 그리고 개스통 입니다. 그것을 필요로 하는 곳 아니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또 그냥 줘도 별로 반기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바빠서 정신이 없는데 그것을 갖다 주는 것도 일이라 고민 좀 했지만 그냥 버리기에는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아 일단 모양이 틀어지지 않은 깨끗한 철사 옷걸이는 차곡차곡 모아 고무줄로 댕강 묶어 동네 세탁소에 갔다 주었습니다. ‘그냥 아까워서요…’ 하면서 드렸더니 고마워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귀찮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기우였습니다. 그 후부터 세탁소 아줌마와의 대화가 참 부드러워 졌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깨끗하게 씻어놓은 병이라 버리기에 아까워서요’ 김칫병도 동네 식료품가게에 가서 기분 좋게 처리했습니다.

문제는 개스통입니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바비큐그릴용 개스를 버리려고 하니까 아직도 반 이상 남은 개스도 아깝고 개스통을 쓰레통에 버리는 것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거의 6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개스통을 샀던 주유소를 찾아갔습니다. 갖다 놓고 오겠다면서 남편이 차에서 내려 개스통 보관소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때 마침 어떤 백인남자가 남편의 하는 양을 계속 지켜보더니 주유소마켓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나는 소리 높여 남편을 불렀습니다.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 하고 오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좋은 일도 이렇게 눈치 봐가면서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이런 우리가 한심하기도 했습니다.

돈으로 치면 정말 몇 푼 안 되는 것들이지만 안 그래도 가득한 쓰레기통에 넣어버리는 것 보다는 뒷맛이 얼마나 개운한지 모릅니다. 엉터리 살림꾼이라는 누명을 조금 벗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는 무슨 물건을 사기전에 집에 있나 없나 잘 살펴보고 구입해야 겠다는 생각 다시 하게 됩니다.

저희 가족이 미국오기 전 여동생 집에 잠시 머물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젊은 나이에 비해 잘 나가는 편이라 상당히 부유했던 동생 부부지만 여동생은 반찬 덮는 비닐 랩을 사용한 후에 씻어서 타일 벽에 붙여놓았다가 다시 사용했습니다.  “뭐 이렇게 지독하게 사냐?”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그때 여동생이 “언니… 옳기 때문에 하는 거야…” 그 때의 한방 맞은 기분이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갑자기 떠오릅니다.

“동생아~~내도 옳은일 한번 했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