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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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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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5 04:57

쥐뿔도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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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이 준 재벌급에 속하는 집안의 며느리가 이웃에 살았다. 잘사는 시댁으로 들어가는 날부터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시아버지가 손가락을 까딱하면 재떨이고 물이고 제까닥 갖다 바쳐야 했는데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지만 사람 대접을 못 받고 산다는 자각이 들면서 속병이 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남편이 시아버지 회사의 미주지사를 맡아 미국으로 오게 되어 기쁨을 감추지 못했는데 실적이 부진해 몇 해 만에 사업체를 접고 돌아갔다.

당시 시아버지가 다니러 오는 날은 비상사태나 다름 없었다고 한다. 시아버지가 무섭거나 어려워서가 아니라 시아버지께 무엇을 해 달라고 할까 리스트 작성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리스트 목록에 있는 것들을 모두 갖기 위해 어떻게 하면 시아버지의 마음을 살 것인지도 궁리했다. 한국에 있는 자식들은 시아버지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며 자기들만 가만 있자니 억울해서 이렇게라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돈 많은 시아버지는 돈 아끼느라 미국 직항 비행기는 못 타고 제 삼국을 거쳐서 오는 조금이라도 싼 비행기표를 찾는다며 시아버지라는 호칭 대신 '그 영감'이라는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돈의 위력을 가족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사용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또 돈의 위력에 휘둘리면 얼마나 많은 삶의 기쁨을 잊어버리게 되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시댁으로부터 물질적으로 기대할 것이 전혀 없는 나에게는 아주 생소한 이야기이다. 94세에 돌아가신 나의 시아버지는 살아 생전 남에게 퍼주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정말 못 말리는 분이셨다. 누군가 구차한 사정을 늘어놓으면 있는 대로 다 내 주셔서 자식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는데 '그만 하시라'고 한마디 했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7남매의 막내 며느리인 나는 "아버지는 귀가 얇아서 탈이야" 라는 시댁 형제들의 구시렁대는 소리를 종종 들을 수 있었다. 정말 귀가 얇으셨는지 있는 재산 다 날리고 유산은 커녕 말년에는 자식들에게 의탁해야 할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

남 좋은 일 시키느라 물려줄 재산은 없었음에도 효도는 제대로 받으셨다. 돌아가기 전 몇 해 동안은 자식들뿐만 아니라 대학 다니는 손자들이 조를 짜서 교대로 할아버지를 찾아와 대화도 나누고 어깨와 팔다리도 주물러 드렸다. '쥐뿔도 없으면서 인심은 좋아 빠져서….' 시댁 식구를 뭉뚱그려 표현하는 나의 심통에 남편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우리 아버지"라며 팔을 안으로 굽힌다.

물려받을 재산이 없으니 재산문제로 형제간에 의 상할 일도 없고 어른을 받드는 자손들의 진심이 왜곡될 이유도 없다. 하지만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 정리하러 한국 다녀오는 친구들을 보면 솔직히 부럽다. 그런데 유산 분배 문제로 마음 상하는 사연이 의외로 많다. 특히 고국을 멀리 떠나와 사는 사람 중에는 부모 유산 물려받는 일에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 모양이다.

자식으로서의 책임과 권리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염치가 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부모의 재산 분배에 대한 섭섭함과 형제에게 배신당한 아픔으로 속앓이를 하다가 몸까지 상한 사연을 들으면 '쥐뿔이 없어' 감사하다는 생각도 해 본다.

-미주중앙일보 '삶의 향기' 201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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