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by오연희

바탕이 다르다, 는 것에 대하여

posted Jul 1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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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소타에서 출발해 사우스다코다를 거쳐 미주리강까지 드라이브할 기회를 가졌다. 햇살에 반짝이는 황금빛 들판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풍경 속을 달렸다. 끝없는 평지위에 때글때글 영글은 옥수수가 바람에 출렁였다. 들판 군데군데 불쑥불쑥 솟아있는 노란 산들이 신기해 다가가 보았더니 타작해 놓은 옥수수 더미다. ‘샤일로(Silo)’ 라고 부르는 원통형 양철집이 들판과 동네 곳곳에 우뚝우뚝 서 있었는데, 곡식 저장소란다. 들여다보지 않아도 옥수수가 주요 저장 곡식일 터였다.


커다란 드럼통 모양으로 만들어놓은 건초더미가 수북수북 쌓여있고 풀빛금빛 어우러진 풍성한 초장위에는 새까만 소들이 칙칙폭폭 기차놀이 하는 것처럼 줄을 지어 어슬렁대고 있었다. ‘블랙 앵거스’ 란다. 이 지역에서 자란 소들은 육질이 부드럽고 맛이 좋아 인기가 많다고 한다.  


크고 작은 호수를 수도 없이 만났다. 무려 만개란다. 미네소타에서 시작한 NBA 프로농구팀 미니애폴리스 Lakers가 LA Lakers 로 이사했다는데 호수는 두고 이름만 이사 온 셈이다. 호수까지 가져왔으면 촉촉한 서부가 되었을 텐데, 아쉽다. 드문드문 농사가 끝난 땅은 거름을 뿌려놓은 것처럼 거뭇거뭇하다. 영양가가 듬뿍 들어 있을 것 같아 괜히 부럽다.


풍족하다고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호수사이로 나있는 국도와 철도가 내려앉아 지대를 높이고 돌담을 쌓느라 공사 중인 곳도 있고 물에 잠겨있는 집들이 흉가처럼 낡아가는 모습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물이 너무 많아서 탈이 난 것이다.


내가 사는 서부와는 바탕이 완전히 다르다. 먼지 풀풀 날리는 메마른 땅에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민둥산까지 삭막하기 그지없는데다가 비나 눈도 쉽사리 내려주지 않는 땅이 부지기로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만큼 풍성한 땅을 일구고 산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만개의 호수는 없지만 콜로라도 강물을 끌어와 농사를 짓고 푸른 도시를 만들고, 타고난 바탕이 척박하더라도 그 척박함을 무기삼아 일구어내는 곡물은 또 얼마나 많은가?


넘치는 물을 덜어내는 일과 모자란 물을 채우는 일 모두 힘든 작업이다. 어쩌면 바탕은 나름대로 동등하다. 그러고 보니 바탕이라는 것은 더 좋고 더 나쁘고의 비교대상이 아니라 그냥 타고난 바탕일 뿐이다.


땅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것에 맞는 씨를 뿌려주면 되는 것처럼 사람의 바탕 역시 그럴 것이다. 훌륭한 집안, 좋은 교육, 출중한 외모가 한 사람의 바탕이라고 한다면 타고난 바탕보다 훨씬 많은 요소들이 우리 개개인의 인생에 영향을 미친다. 아무리 바탕이 탄탄해도 교만하지 말아야 할 것과  바탕이 변변치않다하여 절망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황금빛 들판, 만개나 된다는 호수, 소떼가 노니는 목가적인 풍경이야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아름답지만 경쟁이 적어 비싼 물가, 유난하다는 겨울추위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의 삶에 끼치는 영향은 더 클 것이다. 서부 일부지역의 끔찍한 더위처럼 끔찍한 겨울추위를 견뎌내야 하는 그곳 사람들을 보면 어느땅이 좋다 나쁘다고 말하기는 곤란할것 같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그 자체에 감사하며, 우리 각자의 바탕에 적합한 씨앗을 찾아 주어진 하루하루 위에 정성껏 뿌리고 가꾸어 갈 일이다.


낯선 땅으로의 여행이 안겨주는 선물은 늘 이렇게 다정하다.   



-미주시학 2012년호 '시인이 쓰는 수필'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