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오늘:
4
어제:
8
전체:
1,292,121

이달의 작가
조회 수 248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이른 아침, YMCA 문을 밀고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 유리 벽 안으로 수영장이 보인다. '풍거덩 풍거덩'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참으로 활기차다. 나는 빈 레인이 있나 훑어본다. 사람이 많아 한 레인에 두 사람 드물게는 세 사람이 함께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저 안쪽 한 레인 앞에 놓인 연두색 물병이 눈에 크게 들어온다. 쏜살처럼 빠르고 매끈하게 물살을 가르고 있는 그 남자의 물병이다.

오늘도 여전히 그 남자는 한 레인을 아래위, 양옆으로 온통 휘저으며 헤엄치는데 누가 봐도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을 사절한다는 단호한 몸짓이다.

한 달 전쯤 빈 레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 남자가 있는 레인으로 들어가려고 서서 기다렸다. 그냥 들어갔다가는 부딪칠 게 뻔해 확실히 하고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물속에서 회전해 버리니 함께 해도 되느냐고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물 안에 발을 담그고 기다렸다. 여전히 말을 붙일 수 없을 만큼 빠르게 회전을 해버린다. 이 정도로 신호를 줬으니 설마 알겠지 싶어서 그냥 들어가서 수영을 했다. 중간쯤 갔을 때 그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부딪칠 뻔했다며 짜증을 냈다. 뭐 이런 사람이 있나 싶어 속이 부글댔지만, 꾹 참고 조금 하다가 나와 버렸다.

며칠 후 부부가 늘 함께 오던 한 한국 아저씨가 바로 옆 레인에서 나와 똑같은 일을 당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물속에 다리를 내리고 기다렸지만 안하무인, 할 수 없이 수영을 시작한 아저씨, 그 인간이 부딪쳐 목을 다쳤다며 고소할 수도 있다고 으름장 놓는 것까지 다 보았다. 그 아저씨도 조금 따지다가 기분이 영 아니라며 나가버렸다.

출근 시간이 늦어져 서둘러 나가다가 억울한 생각이 들어 수영장 가드에게 여차여차 따졌다. '다 안다. 모두 안다'며 나를 위로 했다. 탈의실에서 종종 만나는 한 백인 여자가 '나도 안다'며 레인을 휘젓고 있는 그 인간을 기가 막힌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이틀 후 또 다른 피해자가 나타났다. 가끔 보던 한 백인 남자가 우리와 꼭 같은 상황에 직면해서 황당해 하고 있었다. 아무튼, 대충 언쟁이 마무리되고 한 레인에서 그들 둘이 레인을 나눠 쓰는 것 같았고, 나도 옆 레인에서 수영을 계속했다. 레인 저쪽 끝에 다다르니 '안다. 모두 다 안다'고 했던 가드가 나타나 피해자인 그 남자를 위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매너 없는 저 남자 나도 안다'고 얼른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 노 매너' 하며 겸연쩍게 웃는 그 백인 남자를 보고 안심했다. 그런데 나오면서 유리 벽으로 들여다보니 그 인간은 혼자서 한 레인을 제 세상인 양 휘젓고 있고, 그 백인 남자는 옆 레인으로 옮겨서 수영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 기분 알고도 남았다.

수영으로 온몸을 푼 후 샤워하고 YMCA 문을 나설 때, 하루가 온전히 내 품 안에 안겨드는 상쾌한 기분 정말 그만이다. 하루의 시작이 엉망이 될까 봐 혹은 수영복 차림으로 다투는 것도 꼴사나운 일이라 피하고 있지만, 드센 사람 만나 호되게 한번 당해야 할 텐데 싶은 마음 굴뚝이다. 그 인간이 깨지는 고소한 광경을 상상하는 내 속을 들여다보다가 깔깔 웃음보가 터진다. 놀부 마누라 심보 같으니.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4.11.26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77 수필 "결혼 생활, 그거 쉽지 않지" 오연희 2015.07.06 291
176 수필 "내가 뭐랬냐?" 오연희 2003.06.29 906
175 수필 "정말 충분했어" 오연희 2003.07.12 832
174 수필 '드롭 박스'에 버려지는 아기들 오연희 2015.07.06 174
173 수필 '아니오'라고 할 수 있는 용기 오연희 2018.09.26 177
172 수필 '우두커니'를 거부하는 사람들 4 오연희 2017.11.30 182
171 수필 '우리'의 정서 오연희 2007.08.07 1694
170 수필 '조심조심, 미리미리' 오연희 2017.08.02 142
169 수필 '카톡 뒷북녀'의 카톡 유감 4 오연희 2017.03.14 231
168 수필 94세 시어머니 1 오연희 2006.05.09 1308
167 수필 [나를 일으켜 세운 한마디]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9/22/14 오연희 2014.10.07 327
166 수필 [열린 광장] 엄마 곁에서 보낸 짧은 나날들 11/22 오연희 2013.12.08 377
165 수필 [이 아침에] "거라지 세일, 장난이 아니네요" 4/22/14 오연희 2014.04.28 320
164 수필 [이 아침에] "엄마, 두부고명 어떻게 만들어요?" 10/22/14 오연희 2014.10.24 554
163 수필 [이 아침에] '길치 인생'을 위한 우회로(2/19/14) 오연희 2014.03.07 456
162 수필 [이 아침에] '백년칼라사진관'아직 있으려나 오연희 2013.05.31 826
161 수필 [이 아침에] 값이 싼 티켓은 이유가 있다. 5/20/14 1 오연희 2014.05.22 523
» 수필 [이 아침에] 공공 수영장의 '무법자' 11/26/2014 오연희 2014.11.26 248
159 수필 [이 아침에] 기다림의 낭만이 사라진 시대 오연희 2013.07.08 498
158 수필 [이 아침에] 기찻길 따라 흐르는 마음 여행 오연희 2013.07.08 759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Nex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