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by오연희

헤어롤, 이젠 웃어넘길 수 있어

posted Apr 0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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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날을 받자마자 미장원 가서 긴 생머리 싹둑 자르고 파마를 했다. 그 후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20여 년을 볶았더니 머리카락이 푸석푸석하니 몸서리를 치는 것 같았다. 핑곗김에 남자처럼 쇼트커트를 했다. 쇼트커트도 제때 잘라줘야 모양이 사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어느새 단발머리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반 곱슬. 파마하지 않아도 쳐지지 않고 아직 염색도 안 해 그저 일 년에 몇 차례 미장원 가서 조금 자르고 다듬어만 주면 된다. 파마, 염색, 코팅 등으로 미장원 출입이 잦은 한 지인이 백만 달러짜리 머리라며 치켜세운다. '아 그런데 그 돈 다 어디 간 거예요?' 혹은 '미장원 안 가서 부자 된 사람 못 봤네요.' 웃으면서 받는다.

요즘 같은 개성 시대에 헤어스타일로 미스와 미세스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뒤떨어진 생각 같다. 적지 않은 나이인데도 긴 머리를 고수하는 분이 내 주위에도 더러 있다. 잘 관리한 긴 머리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몸에 노화가 오듯 머리숱도 줄고 탄력도 없어져 후줄근해진 머리칼 길게 늘어뜨리고 다니기는 쉽지 않다. 이럴 때 많은 주부가 손질 편하고 머리도 풍성해 보이는 파마를 선택한다.

드라이어로 웨이브를 자연스럽게 만들고 헤어롤로 볼륨을 넣으면 조금 더 단아해 보인다. 반 곱슬머리인 나도 드라이어로 손질을 하고 시간에 쫓길 때는 헤어롤 몇 개 말고 외출할 때도 있다. 차에서 내리기 전에 꼭 빼야지 다짐하지만, 깜빡하기 십상이다.

어느 주일날 교회 파킹장에 내려 걸어 들어가는데 뒤따라오던 남자분이 머리 뒤에 뭐가 묻었다든가 뭐라고 하는데 아차차 싶었다. 함께 걸어가던 아무 죄 없는 남편만 원망스레 쳐다봤다.

얼마 전 유학 온 딸을 만나러 LA에 와 있는 친구와 점심 약속이 있었는데, 머리에 말아놓은 구리뿌 빼는 것을 깜빡하고 코리아타운 오는 기차를 탔단다. 우리 엄마 세대나 사용하던 구리뿌라는 말이 새삼스러웠다. 문제는 기차 타고 오는 동안 아무도 구리뿌 매단 것을 말해주지 않더란다. '당연히 안 하지,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것이 미국식이잖아!' 좀 아는 척을 했다.

구리뿌가 일본말 같아 가까운 몇 분에게 한국말로 뭔지 아느냐고 물었는데 아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며칠 전 아는 집사님이 '찍찍이'라는 말을 사용하길래 혹시나 해서 찾아봤더니 이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었다.

헤어롤, 헤어구르프, 헤어찍찍이, 모두 헤어가 붙어있는 것을 보니 순 한국말은 없어 보인다. 무슨 이름으로 불리든, 화장대에 있는 듯 없는 듯 제 역할을 감당해 내던 헤어롤이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대행 덕분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분홍색 헤어롤이 달려있던 그 자리가 머리 전체 모양에 미치는 영향력을 대부분의 여자는 알고 있다. 늘 미용사한테 맡기는 사람은 경험하기 힘든 소박한 일상 속의 미용 도구 헤어롤. 어쩌다가 깜빡하고 매달려 있어도 핑크빛 웃음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미주중앙일보 < 이 아침에> 2017.4.3 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