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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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다녀온 한 지인이 흘린 한 마디가 귀에 쏙 들어왔다. '남편이 작은 부인 아들이라서 속상한 일이 좀 있었어….' 그녀는 별 생각 없이 했는지 모르지만, 난 생전 가본적 없는 충청도 시골에서의 한 사건이 마치 드라마처럼 떠올랐다.

신혼 시절 남편의 한 대학선배 가정과 같은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선배의 어머니는 손수 기른 채소와 곡물을 수시로 아들네 집에 가지고 오셨는데 가끔 우리집 몫을 따로 챙겨 주셔서 두 가정의 정을 더욱 돈독케 했다. 어느날 시골에서 함께 사신다는 선배의 어머니와 할머니, 즉 고부간인 두 분이 나란히 선배네 집에 다니러 오셨다. 투박한 시골 아낙네 모습의 어머니에 비해 할머니는 그 시절에 보기드문 정갈하고 고운 분이셨다.

그렇게 한번 뵈었던 할머니가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장례식에 다녀온 선배가 눈가를 붉히면서 들려 준 사연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으로 아프게 스며들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작은 부인이셨으며, 할아버지의 본부인 자손들이 할머니의 묫자리를 허락하지 않아 대판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할아버지의 친인척이 살고 있는 그 시골을 떠나지 않았던 선배 할머니의 사연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시신을 옆에 두고 벌어진 그 상황, 선배를 통해 들은 대략의 줄거리에 나의 상상력이 더해져 더욱 아프게 내 기억의 창고에 저장되었다.

아버지의 작은 부인을 평생 미워하며 살았던 한 유명인사를 알고 있다. 남자를 믿지 못해 남편하고도 일찍 헤어진 그녀의 아픔을 생각한다. 작은 부인의 자식으로 살아 온 한스러운 세월을 눈물로 토로하던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만난 그 여인의 지난 날을 생각한다. 어떤 생명도 자의에 의해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고, 이 땅에 태어난 인생은 모두 신의 섭리 아래서 존엄하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 자손들의 참으로 힘들었던 혼란의 세월을 생각한다.

몇 해 전 그 선배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다. 할머니보다 더 나이들어 보였던 선배 어머니의 구릿빛 얼굴이 생각난다.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는 대부분 이 땅을 떠나고 다음 떠날 차례가 된 자손들끼리 이젠 서로 용납하고 사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부모님 혹은 그 윗세대의 애정 문화나 평범하지 않은 가족형태는 자손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일을 떠올리게 한 그 지인처럼 한국을 떠나도 인연의 실타래는 계속 이어지게 되어 있나보다. 모두 각자의 삶을 꾸려 가다가 누군가의 죽음 앞에 혹은 재산 문제로 다시 만나는 일이 생기기도 하나보다.

자손들 모두, 그들을 그늘지게 했던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의 길을 담담히 또 당당히 걸어가는, 뒷모습이 견고한 사람이 되어 있으면 좋겠다.

회한 가득한 눈빛으로 그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 자체에 있음을 깨닫고 서로를 반기는, 해피엔딩 드라마 한편 마음 속으로 그려본다.

미주 중앙일보 2013.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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