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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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04 05:14

절제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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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평소와 다름없이 아들 페이스북을 클릭했다. 그런데 '요청하신 페이지를 찾을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떴다. 잘못 클릭했나 싶어 몇 번 다시 시도해 보았지만 마찬가지다.

요즘 아이들 엄마.아빠가 자기 소셜네트워크 방에 들어오는 것이 싫어서 문을 닫아버리거나 부모 눈치 못 채게 방을 따로 만든다는 말을 들은 다음 날이다. 아들에게 거부당한 느낌이 들어 참으로 기분이 착잡했다.

웹사이트에서의 사귐도 시간과 열정이 필요한 일이라 나는 아예 딸과 아들 그리고 몇 명의 친척들만 친구로 등록해 놓았다. 같은 주에 살아도 마음껏 만나지 못하는 내 아이들과 한국 사는 조카들, 활발하게 오가는 편은 아니지만 근황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방을 만든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 쏠쏠한 즐거움을 차단당한 것이다.

일단 심호흡부터 하고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섭섭함이 그대로 전해질까 봐 음성을 낮추고 은근하게 물었다. 엄마의 속 마음은 아랑곳없이 아들이 차분하게 사정 설명을 해 주었다. 사순절에 즈음하여 절제의 실천을 위한 대상으로 소셜네트워킹을 선택했다며 40일이 지난 후에는 계정이 다시 살아나도록 장치를 해 놓았다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을 대변하는 신선한 발상에 머리가 띵했다. 그리고 가슴이 뜨뜻했다. 작년에는 40일 동안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것으로 절제의 나날을 보내더니 이젠 소셜네트워크다. 절제의 내용이 무엇이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려는 젊은 마음들이 참으로 귀하다.

'정도에 넘지 아니하도록 알맞게 조절하여 제한하는 것'이 절제의 사전적 의미이다. 어려운 말이다. 얼마 만큼이 '정도'인지 좀 막연하다. 그래도 예전보다 우린 너무 많이 먹고 너무 많이 가지고 있고 또 너무 많은 사람과 만나고 있음은 인정해야 할 것같다.

온라인 오프라인 모두 우리의 충족을 위해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선의의 일도 많지만 악의의 일들 역시 함께 돌아간다. 모두 다 함께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혼자만 멈출 수는 없다.

반드시 사순절의 이유가 아니더라도 온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에 알맞게 조절하여 제한하는 절제와 잘못된 것을 짚고 돌이킬 수 있는 회개의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일 것같다.

먹고 입고 자는 의식주와 관련한 지나친 풍족에 대해 절제와 회개의 시간을 가진다. 밥 먹는 식탁에까지 스마트폰을 끼고 앉아 가족끼리의 대화도 단절되는 알고 싶은 욕구에 대해 절제와 회개의 시간을 가진다. 또한 다른 사람을 거꾸러뜨리려는 악의의 마음을 품은 적은 없는가 돌아볼 일이다. 한 번 절제를 잃어버린 악의는 점점 걷잡을 수 없게 휘몰아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태연한 것 같으나 마음은 피곤할 것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한 선의의 마음으로 이 계절을 맞고 있는가. 절제하려고 해도 자꾸만 웃음이 나고 괜히 행복할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 한 해도 가야 할 길이 멀다. 절제하지 못해 마구 새어나가는 나의 시간과 열정을 충실하게 다지고 또 가정 직장 교회 내가 속한 어디든 그곳을 환하게 밝히는 선의의 일에 마음을 쏟기로 결단하는 것도 이 계절의 할 일이다.

욕심 많고 변덕 많은 인간의 본성으로는 참으로 요원한 길이기에 고난의 십자가를 붙드는 것일 게다.


미주중앙일보 "삶의 향기" 3/3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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