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오늘:
39
어제:
9
전체:
1,291,785

이달의 작가
수필
2012.07.26 08:31

모전자전

조회 수 678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일본에 도착한 아들에게서 보이스톡 신청이 들어왔다. 반갑기는커녕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면 뭔가 일이 난 것이다. 잘 도착했다. 잠자리도 편하다. 아들의 안부인사가 길게 느껴졌다. 진짜 엄마 생각이 나서? 잠시 착각에 빠질 뻔도 했지만 역시나 그건 착각이었다.

LA공항 121번 게이트 앞에서 랩탑 배터리 충전한다고 아웃렛에 연결해 놓고 중요한 전화 통화에 몰두하고 있었단다. 탑승자는 모두 들어오라는 방송이 흘러나오자 랩탑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우르르 일행을 따라 탑승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엄마가 그 랩탑을 좀 찾아달라는 간단하게 그런 말이다.

또야 싶어 열이 북북 뻗치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데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니에요'라고 한다. 그 말에 내 머리 뚜껑이 들컥들컥 허연 김이 솟구쳤다. 하지만 나는 지그시 뚜껑을 눌러야만 했다.

나 역시 갖다 버리는데 선수라는 질책을 들으면서 자랐다. 아들 말처럼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은 정말 아니다. 어린 시절 일본에 사는 삼촌이 사다 준 눈처럼 하얀 양털모자를 쓰고 나갔다가 그날로 잃어버린 것을 시작으로 언니 시계 몰래 차고 나갔다가 흔적도 없는 손목을 보고 놀라 밤늦도록 시계 찾아 헤맸던 일 남편이 외국 출장 갔다가 선물로 사다 준 목걸이와 팔찌가 사라져 친구까지 동원해서 찾아다녔던 일 등등. 아무튼 '선수'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하나도 없다.

아들 화장실을 들여다보면 대충 나와 비슷하다. 치약 뚜껑 샴푸 린스 뚜껑 화장품 뚜껑… 도무지 제대로 닫혀있는 뚜껑이 없다. 어쩌면 엄마를 이렇게 닮았는지 안 좋은 것은 더 쏙쏙 빼닮는 것이 너무 속상하고 신기하다. 하지만 앞날이 창창한 아들은 어쨌든 고쳐야 할 것 같아 잘못한 것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잔소리를 한다.

이젠 나름대로 어른이 된 아들에게 '엄마니까 이런 말 해 주는 거야'라며 슬쩍슬쩍 눈치 봐 가면서도 어쨌든 한마디 던지고 만다. 나는 '바담풍' 해도 너는 '바람풍'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본이 되지 못하는 부모 이야기가 생각나 뜨끔한 적도 있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들은 신통한 구석도 참 많다. 그 역시 나의 기질을 닮은 것 같다. 내가 모르고 있었던 나의 좋은 성품을 나는 가끔 아들을 통해서 발견한다. 아들의 대견한 마음 씀씀이에 '엄마 닮아서 그런 거야' 했다가 가족 분위기 완전히 썰렁해 진 적이 있다. 그냥 속으로 흐뭇해하고 말걸 후회막급이다

언젠가 아들은 우리가 가진 각별한 버릇이나 생활습관은 그 사람의 장점 혹은 단점이라고 단정지을 일이 아니라 타고난 개성이 다르기 때문이며 그것에 관한 한 연구결과를 가지고 직접 설문조사까지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정리정돈을 도대체 하지 못하는 딸과 늘 부딪치던 어느 엄마가 설문조사 결과를 통해 딸을 이해하게 되었다나 어쨌다나 논리정연하게 내놓은 이론이 그럴 듯했다.

잘못된 것은 고쳐야지 그런 게 어디 있느냐며 반기를 들었다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아무튼 나의 잔소리가 줄어들지는 않았지만 톤은 아주 부드러워졌다.


미주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2.7.24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7 수필 [이 아침에] 내 이름을 불러보자 오연희 2013.02.15 825
56 수필 [이 아침에] 선물을 고르는 마음 오연희 2012.11.27 668
55 수필 [이 아침에]다시 듣는 '어메이징 그레이스' 오연희 2012.11.27 887
54 수필 [이 아침에]꽃 가꾸거나 몸 가꾸거나 오연희 2012.10.25 614
53 수필 자식 결혼과 부모노릇 오연희 2012.10.25 603
52 수필 가을엔 편지를 쓰겠어요 오연희 2012.09.23 867
51 수필 겁쟁이의 변명 1 오연희 2012.09.23 757
50 수필 신선하고 재미있는 문화 오연희 2012.09.04 588
49 수필 이민의 삶이 어때서요? 오연희 2012.09.04 684
48 수필 공공 수영장의 백인 미녀 1 오연희 2012.08.10 1029
» 수필 모전자전 오연희 2012.07.26 678
46 수필 바탕이 다르다, 는 것에 대하여 1 오연희 2012.07.12 674
45 수필 고흐의 '밀밭'을 벽에 걸다 오연희 2012.07.12 1174
44 수필 만화 '국수의 신'을 읽는 재미 오연희 2012.06.13 1179
43 수필 쥐뿔도 없지만 오연희 2012.05.25 990
42 수필 칠흑 같은 밤길의 동반자 오연희 2012.05.04 858
41 수필 좋은 이웃 찾기, 내 이름 찾기 오연희 2012.05.04 875
40 수필 절제의 계절 오연희 2012.05.04 770
39 수필 샤핑 여왕의 참회록 오연희 2012.03.20 674
38 수필 시(詩)가 흐르는 서울 오연희 2012.03.20 685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Nex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