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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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수필
2003.08.07 03:05

아련한 추억하나

조회 수 86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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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여년 전 나의 가족이 미국에 첫발을 디디고 살게 된 시골엔 조그만 한인 교회가 하나 있었다.  미국 교회의 한 채플을 빌려 예배를 드렸고 부엌은 미국인들과 같이 사용했다. 한국인과 관련된 대부분의 행사는 교회에서 행해졌고 행사 후에는 미국 식당을 사용했다. 미국인들이 친절하게 대해 주었지만 김치를 비롯한 한국음식 냄새 때문에 언짢은 소리를 듣기가 일쑤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인들의 내 교회를 갖고자 하는 소망은 커지게 되었다.  다행히 그곳에 일찍이 터를 잡고 사시는 한 분의 적극적인 지원과 여러 사람의 정성이 모여 폐허가 된 허름한 건물을 하나 샀다.   교회를 다니는 교인 뿐만 아니라 전혀 다닌 적이 없는 분들까지 나와서 폐허 같은 건물을 예배를 드릴만한 장소로 만들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개조해 나가기 하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돌아가며 국수나 비빔밥을 만들어 오고 남자들은 건물 안을 수리했으며, 건물에 딸린 오렌지 밭을 주차장으로 만들기 위해 나무를 자르느라 온몸이 상처 투성이가 되었다.  하지만 모두의 얼굴에서는 우리만의 것을 갖는다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 남편들까지 도움을 주었다.  오 육십 명 정도의 교인들 중에는 외국인과 결혼한 한국 부인들이 여러 명 출석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 도시 근교에 공군 부대가 있어서 미군과 결혼한 한국 부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백인과 결혼했지만 그 중엔 멕시칸과 결혼한 분도 있었고 또 흑인과 결혼한 분도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두 부인은 남편이 흑인이었는데 나와는 이웃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두 가정의 남편들은 어찌나 부지런한지 아침 일찍 일어나 정원을 가꾸고 주말이면 자신의 자동차나 집안 밖의 부실한 곳을 찾아 고치기를 즐기는, 가정에 충실한 전형적인 미국 남편들이었다.  또한 자신의 자녀들이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도록 열심히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내 아들이 몸살로 힘들어 하는 것을 알고는 당장 자기 집에 가서 약을 찾아 가지고 왔다.   빨리 완쾌되기를 바란다며 염려하는 그의 모습이 얼마나 정겹던지 좋은 이웃을 둔 것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 교회에 행사가 있는 날은 그야말로 한국인들의 동네 잔치 같은 분위기였다. 외국인과 결혼한 한국 부인들은 남편과 함께 나와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때로는 한국교회에 주요직책을 맡아서 봉사하기도 했다.

그 당시 난 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를 하고 있었는데 한국인 부인과 외국인 사이에 태어난, 흔히 우리가 말하는 혼혈 자녀들을 한국 교회의 주일학교나 여름 성경학교에 보내왔다.  이런 아이들의 수가 늘어나다 보니 영어에 불편이 없는 주일학교 교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나를 비롯한 한국부인 몇 명이 가까이 있는 대학에서 영어를 배워 부족한 대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외국인과 결혼한 한국 부인들이 영어권 아이들을 위해서 봉사하게 되어 한국학교와 주일학교 분위기가 더욱 활발해 졌다.   외국인 남편들도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는데 그 두 흑인 남편들은 아이들을 데려오고 데려다 주는 일을 잘 감당해주어 참으로 든든하고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 후에 LA에서 흑인폭동이 났다. 난 먼저 그 한국 부인들의 흑인 남편이 떠올랐다. 사람 나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TV 화면에 나타난 그들의 만행을 보니 흑인은 무지막지한 인간들이라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바뀌어져 갔다. 그러나 뭔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억눌린 서러움이 있었겠지 하는 일말의 동정심이 늘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 부인들의 성실한 흑인 남편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느 한국 분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흑인을 겪어보지 않아서 너무 모른다고 한다.  그 한국 분은 LA흑인 폭동 때 자신의 비즈니스에 막대한 타격을 가했던 실상을 이야기 하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참으로 개인적인 경험이 다르니 입에서 나오는 말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새로 이사 온 동네는 LA중에서도 한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미국 땅이라고 하지만 한국은행, 한국식당, 노래방, 당구장, 사우나…등등 그야말로 불편한 것이 없을 정도다.   얼마 전 미국 온 후 처음으로 한국식 목욕탕을 가게 되었다. 그곳의 카운터 보는 한국 할머니가 무슨 말끝에 깜둥이가 많은 동네는 안 좋은 동네라고 했다. 흑인이라는 말은 백인, 동양인, 흑인 이렇게 피부색깔로 구분하는 어감이 들었는데 “깜둥이”라고 하니까 기분이 묘했다. 행여나 흑인과 결혼했던 오래 전의 그 이웃 생각에서였는지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마 전 전화 연결한 것에 문제가 생겨 SBC 전화 회사에 연락하여 기술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아주 새까맣고 쪼끄만 흑인 남자가 허리엔 줄줄이 연장을 매달고는 나타났다. 새까만 피부에 머리를 숨 쉴 구멍도 없이 쫑쫑 땋아서는 얄궂게 생긴 모자를 뒤집어 쓴 광대 같은 모습이 참으로 우스꽝스러웠다.  

외국인이 오면 종종 겪는 일이지만 그 남자도 신발을 신은 채로 집안에 들어 오려고 했다.   이사오기 전에 새 카펫으로 갈았기에 신발 좀 벗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자신의 차있는 데로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조금 있으려니 신발 위에 덧신을 수 있는 하얀 비닐 버선을 들고 들어왔다. 얼마 전부터 저런 버선을 하나 구비해 놓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라 “너 정말 좋은 것을 가지고 있구나! 그런 버선은 어디서 사면 되냐? “ 고 물어보았다. 어디서 파는지는 모르고 원래 SBC엔 이럴 때를 대비해서 버선이 늘 준비되어 있다고 대답했다.

기분 좋게 신발 건이 해결된 후 조금 있으려니 이웃에 사는 김 선배께서 이사한 후 첫 방문이라며 예쁜 액자랑 방금 구운 도넛을 한 상자 사 가지고 오셨다.

그녀는 밖에서 일하는 그 남자를 보고는 우리 이 따끈따끈한 도넛을 저 사람이랑 함께 즐기면 어떻겠냐고 물어 오셨다.  내가 좋다고 반겼더니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내 집의 다이닝 룸 식탁에 셋이 오순도순 앉아 맛난 도넛을 나눠 먹었다.

참으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때의 그 한국 부인들과 흑인 남편들의 모습이 떠 올랐다.   이민의 삶을 사는 우리의 서러움과는 다른 그들의 슬픔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지금은 어디 사는지 모르지만 많이 많이 행복 했으면 좋겠다.


2004년 문학의 향기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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