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연희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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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수필
2004.10.21 03:09

러미지 세일/꽁트

조회 수 1443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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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여년 전 남편이 해외 출장비를 절약해서 사준 청자빛 드레스가 있습니다. 얇고 반지르르한 옷감에 몸매의 선을 잘 살려주기 때문에 그 옷만 입으면 괜히 어디 가서 폼잡고 사진 찍고 싶어지던 정말 마음에 쏙 드는 옷이었습니다. 옷에 신경을 써야 할 중요한 모임이 있을 때 몇 번 입긴 했지만 그렇게 화사한 옷을 입을만한 모임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저 제 옷장 한구석을 뿌듯하게 차지하고 있습니다. 옷 중 유일하게 정가 주고 산 옷인데다 유행도 별로 안타는 디자인인지라 즐겨 입을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선뜻 입어 지지가 않았습니다. 아까워 남도 못 주고 이사 다니는 곳마다 끈질기게 챙긴 것이 십년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더 나이 들기 전에 그 옷을 입어봐야 겠다는 충동이 일었습니다. 무릎 위 살짝 걸쳐지는 짧은 치마길이 때문에 더 나이 들면 곤란하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비닐을 걷어내고 옷을 꺼냈지요. 그 옷 살 때의 기분을 생각하며 잠시 행복감에 젖었습니다. 제 몸이 조금 통통해지긴 했지만 뱃살을 지긋이 눌러주는 거들을 하면 문제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거울을 보며 거들을 입었습니다. 좀 답답하긴 했지만 배를 꽉 눌러주니까 허리선이 그런대로 볼만했습니다. 옷을 목으로 집어넣어서는 밑으로 내렸습니다. 등뒤의 자크만 닫으면 우아한 자태가 드러날 차례입니다. 그런데 자크가 옷에 끼었는지 잘 올라가지를 않았습니다. 자크가 고장이 나면 도로아미 타불이 되니까 조심스럽게 거울 쪽으로 등을 비춰 살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자크에 옷이 끼인 것이 아니라 자크가 더 이상 올라가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등뒤의 허연살을 다 덮어주기엔 천이 모자랐던 거지요. 조금 올렸던 자크를 내렸습니다. 거들도 벗어 던졌습니다. 숨쉬기가 훨씬 수월했습니다.

저 옷을 포기할 것인지 선택의 귀로에 섰습니다. ‘포기할 수 없다’ 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체중을 줄여야 했습니다. 언제부터 돌입할 건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침에 남편이 출장을 가기 때문입니다. 남편 밥해주면서 굶기란 정말 힘드는 일이거든요. 갑자기 굶으면 안 된다는 친구의 말이 생각나 아침은 황성주 생식으로 때웠습니다. 점심이 되니 배가 고팠습니다. 고비를 잘 넘겨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석에 여성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쭉쭉빠진 여자들이 멋진 의상을 입고 온갖 포즈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림 속의 멋진 옷을 걸친 홀쭉해진 내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요리코너의 형형색색의 음식들이 ‘멜롱’ 하며 나타났지만 후딱 다음장으로 넘겼습니다. 오후세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머리 저 깊은 어딘가에서부터 통증이 안개처럼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더 심해지더니 눈이 흐릿해 졌습니다. 진통제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빈속에 약을 먹으면 위장을 버릴 것 같아 뭔가 아주 조금 요기를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손으로 음식을 만들 기력이 없었습니다. 가까운 식당엘 갔습니다. 가장 가벼운 음식으로 보이는 칼국수를 시켰습니다. 음식이 나왔습니다. 약을 먹기 위해서 먹는 거니까 삼분의 일만 먹기로 하고 나머지는 모두 투고 박스에다가 담았습니다. 칼국수를 한 젓가락 입에 넣었습니다. 국수가 달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삼분의 일의 양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것은 그렇게 심하던 두통이 사라져 갔습니다. 그 삼분의 일의 칼국수를 다 먹었을 때 제 머리는 아주 맑게 개었습니다. 음식 들어간다고 두통이 사라지다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만히 칼국수의 삼분의 이가 들어있는 투고 박스를 쳐다봤습니다. 제 앞으로 슬며시 당겼습니다. 아직 따끈따끈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닫혀있던 박스를 열었습니다. 이건 정말 저도 모르게 였습니다. 젓가락을 다시 잡고 후루룩 입안으로 밀어넣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칼국수는 제 생전에 처음이었습니다.

다이어트 작심 한끼 만에 실패 했음을 인정해야 했지만 두둑한 뱃속이랑 맑게 개인 머리를 생각하면 그리 후회는 없습니다. 하지만 제 옷장의 애물단지인 그 드레스를 처분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조금 아릿했습니다. 하지만 시원도 할 것 같았습니다.

마침 교회에서 교도소 선교를 위해 러미지 세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못 입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제 옷을 싸구려로 내놓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토요일 새벽 예배를 마친 후 세일을 위해 예배당 입구에 진열해 놓은 옷들을 훑어 보았습니다. 수준을 보니 제 옷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싸구려들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저쪽에 소문난 멋쟁이인 고집사가 진열대 사이를 오락가락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슬쩍 제몸을 숨겼습니다. 멋쟁이 고집사가 평소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게 러미지 세일품에 마음을 두다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휙 둘러보던 고집사가 저 있는 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피하려고 몸을 돌렸습니다. 진열대로 막힌 막다른 장소여서 잠시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만 고집사랑 눈이 마주쳤습니다. 고집사가 더 당황하는 눈치였습니다.
근처에 있던 베이지톤의 롱 드레스를 만지작 거리며 “진짜 비싼건데….” 묻지도 않았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술술 불어댔습니다. “ 제가 내놓은 건데 내 옷 중에 가장 비싸기도 하지만 추억이 담긴 옷이거든요. 십년 이상을 품고 있다가 이번에 내놓았어요. 체중을 줄여보려고 했지만…”

혹시 제 마음 속을 고집사가 꿰뚫어 보고 하는 소리가 아닌가 싶어 코가 시큰했습니다. 그러나 곧 제 가슴 가득 기쁨이 차 오름을 느꼈습니다. 진열된 옷을 하나하나 만져보았습니다. 옷을 입었던 이들의 사연과 체온이 따스하게 전해져 왔습니다.


맑은울림 2005년호
?
  • 오연희 2015.08.19 06:31
    김진영 (2004-10-22 18:43:33)

    <칼국수를 한젖가락 입에 넣었습니다. 국수가 달다는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ㅎㅎ달다는 것을 !!!!!

    <삼분의 일의 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것은 그렇게 심하던 두통이 사라져 갔습니다.>

    ㅎㅎ두통이!!!!!

    <그 삼분의 일의 칼국수를 다 먹었을때 제머리는 아주 맑게 개었습니다. 음식 들어간다고 두통이 사라지다니 믿을수가 없었습니다. 가만히 칼국수의 삼분의 이가 들어있는 To Go박스를 쳐다봤습니다. 제 앞으로 슬며시 땡겼습니다. 아직 따끈따끈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닫혀있던 박스를 열었습니다. 이건 정말 저도 모르게 였습니다. 젖가락을 다시잡고 후루룩 입안으로 밀어넣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맛있는 칼국수는 제 생전에 처음이었습니다.>

    ㅎㅎㅎㅎㅎ이렇게 맛있는 칼국수 생전 처음이라!!!!

    재미있게 웃으면서 글을 읽은 적이...언제였던가? 하도 웃었더니 눈물이 날려고 합니다. 진영이도 먹보라 1년 365일 입맛이 다 좋고 하루에 보통 네끼라...뚱뚱보 안되려고 산행을 집요하게 합니다. 아마도 의사 선생님이 산행 하지 마시요. 해도 할 것입니다. 딸이 하는 말, 엄마는 많이 움직이고 운동도 하는데...잘먹어서 치마도 못입고 불쌍하게 산다네요. 치마가 한개도 없거든요.ㅎㅎ 연희님, 많이 웃고 웃는 모습으로 물러갑니다. 많이 웃는 시간되십시오.^^ (참 다이어트는 평생동안해야 할 여성의 숙제입니다.^^)
  • 오연희 2015.08.19 06:32
    오연희 (2004-10-22 11:43:17)

    진영님...
    사실은 위의 글이 실화거던요.
    그런데 제가 아무리 울퉁불퉁이래도 명색이 여자인데 너무 적나라하게 나를 나타낼려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꽁트로 결론을 내버렸어요.
    아는분들한테 제 사연을 털어놓았더니...
    어찌나 낄낄대던지...
    다듣고 한다는 말이 그 국수집 어디에요?
    이러는거 있죠?
    하여튼 불난집에 부채질하는 여자들
    어떻게 초를쳐야 속이 시원할지...ㅎㅎㅎ
    진영님도 오늘저녁 메뉴는 칼국수로!!
    이러시는거나 아닌지..깔깔^^
  • 오연희 2015.08.19 06:32
    김명남 (2004-10-26 19:59:31)

    김진영님도 태평양 건너 오셨군요.
    좋은 시간들 되십시요.
  • 오연희 2015.08.19 06:32
    김진영 (2004-10-26 23:25:49)

    <제가 아무리 울퉁불퉁이래도 명색이 여자인데 너무 적나라하게 나를 나타낼려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꽁트로 결론을 내버렸어요.
    아는분들한테 제 사연을 털어놓았더니...
    어찌나 낄낄대던지...
    다듣고 한다는 말이 그 국수집 어디에요?>

    ㅎㅎ연희님, 다시 웃습니다.

    안녕하세요. 김명남 선생님, 아이고 한국에서는 뵙기 힘들더니 미국에서는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김명남 선생님, 연희님, 행복한 시간 되십시오.^^
  • 오연희 2015.08.19 06:33
    오연희 (2004-10-27 16:56:27)

    두분 김선생님...
    반갑습니다.!!^*^
    정말 세월이 좋지요? 크릭하나에
    미국서 끊이는 칼국수 냄새을
    한국에서도 찌가닥^^맡을수 있으니...ㅎㅎㅎ
    김명남선생님께선 여전히 사업번창하시지요?
    사업가로 시인으로...
    멋진 삶을 살고 계신거에요.많은분들이 부러워할거에요. 저두 부러운걸요.^^*
    진영님!
    어제 친구언니를 만났는데 외출좀 할려면
    예전엔 남편이 "어디가?"하면서 싫어하더니..
    요즘은 "나도 따라가면 안돼?"하면서 마눌
    눈치를 본다네요...
    으~~통쾌한 인생살이...깔깔^^
    두분 행복한 하루 엮으세요!^*^
  • 오연희 2015.08.19 06:33
    김명남 (2004-10-28 20:43:02)

    미국에서의 진영님 수다(?)는 또다른 맛이 있군요. 늘 행복하시고 연희님도 행복하시고...
  • 오연희 2015.08.19 06:33
    오연희 (2004-10-29 15:16:25)

    김명남 선생님..
    잊지않고 찾아주시니 늘 감사드려요.
    진영님의 기발하심에 혀를 내두르게 되요.
    두분은 평화문단의 두보석이세요.
    김진학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실거에요.
    그쵸?
    하모하모(김진학쎄엠의 답이셨습니다.^*^)
  • 오연희 2015.08.19 06:33
    이 상옥 (2006-05-01 00:34:52)

    내 문학 서재에 첫 번째 꼬리말을 올리셨드군요. 사실 촌뜨기처럼 어 벙벙한 기분이였는데 따뜻한 격려를 해 주셨지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문학적인 꿈이 꼭 이루어 지기를 기도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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