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by오연희

애리조나, 영국, LA에 살아보니

posted Jul 06,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오늘도 어김없이 집 근처 한국 마켓의 '오늘의 세일 품목'을 카톡으로 받는다. 매일 새로운 세일 품목을 보며 '세일은 주말'이라는 생각을 깨뜨린 마케팅이 참신하게 느껴진다. 카톡 전략이 잘 맞아 들어간 듯 평일에도 손님이 적지 않다.

하지만 쇼핑은 역시 주말이 싱싱하고 풍성한 것 같다. 북적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펄펄 살아 있는 채소와 생선을 고르는 맛도 좋지만 시식코너에 멈춰 서서 판촉 제품을 맛보는 재미도 정말 쏠쏠하다. 한국에서 직송되었다는 고추장 된장을 비롯한 온갖 맛깔스러운 밑반찬을 맛보며, 빼곡하게 들어찬 한국 식품 진열대를 지나오며 문득 '감사'를 잊고 산 지 꽤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미국 처음 와서 살게 된 애리조나 조그만 도시에는 한국사람이 많지 않아 한국 마켓이나 식당이 없었다. 외국분과 결혼한 한 한국 부인이 LA에서 떼 왔다는 오징어를 비롯한 몇 가지 생선류와 우리가 즐겨 먹는 한국 식품을 자기 집 냉장고에 보관해 놓고 파는 정도였다. 그 부인이 LA 간다고 하면 이번에는 무엇을 가지고 올까 기대하며 기다렸고, LA에서 돌아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주재원 부인들이 우르르 몰려가 있는 대로 바리바리 사들고 왔다.

그렇게 몇 년 지내다가 1시간 거리에 있는 옆 도시에 한 한국 아저씨가 트럭에 물건을 싣고 와 팔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곳으로 원정 쇼핑을 갔다. 그 부인의 보물창고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먹거리를 파는 그 아저씨도 LA에서 왔다고 했다. 두 분 덕에 한국의 맛을 그런대로 누릴 수 있었고 어쩌다가 동료 중에 LA 갈 일이 생기면 서로 부탁하여 필요를 채우기도 했다.

그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것을 영국 시골 동네 가서야 알게 되었다. 그곳에는 그 부인이나 아저씨 같은 분이 없었다. 김치를 담그기 위해 영국 마켓에 갔더니 배추에 '차이니스 리프(Chinese leaf)'라는 이름이 붙어있었다. 기분이 좀 묘했지만, 부지런히 김치를 담가 먹었다. 얼마쯤 있다가 중국 마켓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애용하게 되었는데, 주재원 부인들의 출몰이 잦아지자 된장과 라면 같은 한국 식품을 갖다 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 된장은 짙은 고동색으로 변해 있고 라면 스프는 떡이 되어 있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LA에 정착하기로 했을 때 가장 신나는 것이 곳곳에 있는 한국 마켓이었다. 세일을 얼마나 세게 하는지, 2.99달러짜리 크고 싱싱한 수박과 5단에 99센트 하는 파를 사며 농부의 수고를 생각한다. 집에서 만들기 쉽지 않은 반찬부 음식과 우리 입에 딱 맞는 한국 과자를 먹으며 마켓에 감사한다.

LA 온 후로 솜씨가 줄어든 건지 원래 솜씨가 별로인데 먹어준 건지 모르지만 직접 담근 배추김치가 슬며시 뒤로 밀려나고, 양념 듬뿍 든 전라도김치와 갓김치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김치를 즐기고 있다. 아무튼, LA는 모든 것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애리조나 시절과 한국 냄새가 그리워 유통 기한 지난 것도 감지덕지하던 영국 시절을 생각하면, 한국 마켓 쇼핑하는 발걸음에 살짝살짝 리듬이 실린다.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5.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