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by오연희

아픔을 이해하는 공감능력

posted Sep 2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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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한번 떠나자는 소리가 친구들 사이에 수시로 흘러나왔다. 멀리 뛰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의논 끝에 연휴를 이용해 가까운 온천장을 다녀오기로 했다. 남편들은 온천장 근처 골프장에 내려 주고 아내들은 온천욕 하면서 수다를 떠는 풍경, 괜찮을 것 같았다.

'여행의 즐거움은,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시간부터'라던가. 하지만 나는 여행 떠나기 며칠 전 시작한 치통으로 부리나케 치과 진료받고 항생제와 진통제 챙기는 일에 신경을 더 써야 했다.

준비해 온 두툼한 스테이크와 근처 바닷가에서 공수해온 고들고들한 굴, 알찬 게, 싱싱한 횟감, 좋은 음식을 앞에 두고도 즐기지 못하는 처지라니. 참지 못해 한 입 베어 먹다가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먹는 것은 그렇다 치고, 강력한 진통제로도 통증이 가시지 않아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분위기 깰까 봐 괜찮다며 웃었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으로 여행의 즐거움이 저만치 달아나버렸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검진받은 후, 추천하는 신경치료 전문의한테 찾아갔다. 치통에 시달리느라 의기소침해진 나, "이를 잘 관리 하셨네요. 뺄 필요는 없고 신경 치료하고 크라운 하면 됩니다"라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긴장감으로 몸이 꽁꽁 얼었지만 마취하고 수술하고, 며칠 후 한 번 더 오라길래 수술이 잘 되었는지 점검하나 보다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이빨 괜찮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난 우리 아버지 닮아서 이가 좋은 편이야. 84세 돌아가실 때까지 틀니 하나 없으셨거든. 아버지까지 들먹이며 치료만 잘 하면 된다는 의사의 말을 종달새처럼 지저귀었다.

그런데 두 번째 진료 후 의사 선생님 왈 "첫날은 이머전시 치료였고 정밀검사를 해 보니 이 뿌리 쪽까지 금이 가 있어요. 신경 치료하고 크라운 해봐야 이삼 년 정도밖에 못가니 관련 전문의한테 가서 이를 빼고 임플란트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란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정신이 벙벙했지만, 의사 선생님 태도가 얼마나 정중하고 정직해 보이는지, 이의를 제기하려는 마음이 쏙 들어가 버렸다.

임플란트나 브리지 혹은 틀니 하는 중이라는 주위 분들의 편치않는 표정이 떠오른다. '힘들어'라고 해도 그들의 말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나의 일이 되고 난 후부터 저분은 어떤 상태일까, 오가는 사람들의 입안을 상상한다. 언젠가 나에게 하소연하던 이웃분의 이빨 안부도 묻고 싶어진다. 어금니 하나 탈 나도 사는 재미가 이렇게 감하는데 큰 병 걸린 사람은 어떨까. 그분들의 외로움도 생각한다.

'경험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 경험하고야 깨닫는 사람은 보통사람, 경험하지 않고도 깨닫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깨닫는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겪을 때는 뭔가 좀 깨달은 듯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곧잘 잊어버리는 나 같은 사람은 보통 사람에 들기도 어려울 것 같다. 아픈 사람을 다독이는 데 자신의 건강·돈·재능·시간을 쓰는 이들, 그들의 지혜가 너무도 크게 보인다.




미주중앙일보 < 이 아침에> 2017.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