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by오연희

'우두커니'를 거부하는 사람들

posted Nov 3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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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던진 누군가의 한마디가 마음에 꽂힐 때가 있다. 수영장에서 종종 마주치는 할머니 입에서 나온 '우두커니'라는 말이 그중 하나이다. 완전 백발에 화려한 색상의 옷을 자신 있게 소화해 내는 멋쟁이 할머니, 동네 쇼핑몰을 혼자 빙빙 다니는 모습도 보이고 멀찍이 큰길을 건너는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정말 부지런하셔요' 했더니 '우두커니 있으면 못써!' 라신다.

할 일이 턱까지 차올라 언제 여유 있게 숨 좀 쉬나 할 정도로 동동거리며 사는 나에게 '우두커니'의 순간이 온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어르신들을 만나면 실례지만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조심스레 묻곤 한다. 한국의 친정엄마는 전화 드릴 때마다 거의 식사 중이거나 누워계신다고 한다. 엄마 운동 좀 하세요, 하면 '난 누워있는 게 제일 좋아'라신다. 수영장에서 만나는 엄마 또래의 할머니들은 '우두커니'를 거부한 분들 같아 부러움의 눈길로 다가간다.

일본 할머니 레이꼬는 인사성이 얼마나 밝은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손을 씻으면서도 대합실에 앉아 뜨개질을 하면서도 친구와 수다를 떨면서도 언제 봤는지 인사를 당긴다. 너 괜찮냐 하면 살짝 표정이 어두워진다. '늙으면 다 아파. 안 아픈 데가 없어'라신다.

탈의실 옷장이 내 근처인 또 다른 일본 할머니는 작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몸놀림도 굼뜨고 귀가 부쩍 안 들리는지 인사를 드려도 전혀 반응이 없다. 몇 달 전부터는 물속에 들어가고 샤워하고 하는 모든 움직임을 세세히 도와주는 아줌마를 대동하고 오신다.

그 외에도 불편한 몸을 거의 끌다시피 해 오셔서 물 운동을 하시는 빨간 입술 문신의 미국 할머니, 물속에서 두 손을 번쩍 들어 아이러브유 사인을 보내오는 이웃 권사님 등. 모두 '우두커니'를 사절하는 분들이다.

나이 들어 몸 아픈 것도 서러운 일이지만, '우두커니'로 살아가는 외로운 어르신의 사연(중앙일보 독거노인 실태 시리즈)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절된 노후를 맞은 사연에는 답을 찾을 길 없어 더욱 슬프다. 그분들도 빛나는 젊음을 지나왔으리라. 그러나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은 현재의 삶이 어느 정도 받쳐 줄 때 빛날 것 같다.

아름다운 시간도 서러운 시간도 마구 흐른다. 서러움이 가장 크게 느껴질 때가 아무래도 연말인 것 같다. 아무리 준비한다 해도 우리의 미래를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쓸쓸한 노년을 보내는 분들에게 이웃과 커뮤니티 차원의 관심과 도움을 갖자는 기사에 동의하면서도, 스스로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의지력을 심어주는 훈련도 병행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무튼 '우두커니'에 남은 시간을 맡길 수 없다며 단호하게 일어선 어르신들, 몸이 작동을 거부할 때까지 주저앉지 마시기를 바라며 큰 응원의 박수를 올려드린다.




미주중앙일보 < 이 아침에> 2017.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