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by오연희

꿈같은 인연 그리고 만남

posted Jun 1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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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뜬금없는 카톡이 왔다. 남편들이 같은 그룹 계열사 주재원이라는 인연으로 안면 정도 있는 명주네 부부. 미국 여행길에 서부 쪽도 들를 예정이니 얼굴이나 한 번 봤으면 좋겠단다. 매사 반듯한 느낌의 명주 엄마가 떠올라 '우리 집에 짐 부려놓고 여행 다니도록 하세요'라는 말이 그냥 나오고 말았다. 음식 챙기고 차편 제공하는 일로 인해 우리의 일상에 다소의 차질이 생겼지만, 조금의 수고로 짧은 인연 길게 이어진 꿈 같은 며칠이었다.

그때 이웃으로 지낸 분 중 영국에 눌러앉은 가족들의 근황이 고향 소식 전해 듣듯 반가 웠다. 그런데 대화의 내용을 가만히 되짚어보니 어른들에 관한 소식은 간단한 안부 정도이고 어느 댁 아들 혹은 딸은 무엇을 전공하고 직장은 어디고 어느 나라 배우자를 맞았고 혹은 사귀고 있다는 등등. 자녀들 소식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부모 인생에 자녀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우리 존재는 어디 갔나 싶은 쓸쓸한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다 보면 자신을 넘어선 듯한 존재 앞에 웃음이 날 때가 있다. 아들 딸은 그렇다 치고, 손주가 자신의 프로필 사진에 올라와 있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명주 엄마의 카톡 프로필 사진 역시 첫딸인 명주가 낳은 첫 외손주이다. "손자 사진 봤어요" 했더니 배시시 웃으며 백일 지났는데 너무 보고 싶단다. 런던 한 초등학교 한국어 교사로 일하며 보람도 있고 수입도 괜찮았는데, 베이비시트 구하기도 쉽지 않고, 있어도 너무 비싸고, 손주를 봐줘야 할 것 같아 일을 내려놓았다며 아쉽다고 한다.

자녀가 결혼한다고 부모 역할 끝나는 게 아닌 당면한 현실부터, 남편들끼리 공유하는 케케묵은 옛 직장 이야기까지 대화의 소재가 참으로 다양하다. 또한 유튜브를 TV로 연결해 방탄소년단, 복면가왕, 불후의 명곡, 남한예술단 북한공연까지 한국 노래에 심취해 따라부르기도 하며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중 명주 엄마가 던지는 한마디 "여긴 북한사람 얼마나 돼요?"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북한 사람? 글쎄…북한 사람인 줄 알고 본적은 없네요" 했더니 런던에는 칠팔백 명의 북한 사람이 산단다. 문제는 북한에서 바로 망명한 부류와 중국과 한국에서 살다가 망명한 부류로 편이 나누어져 자기들끼리 진짜니 가짜니 언쟁을 하게 된 모양이다. 이런 사실을 영국 정부에서 알게 되어 요즘은 북한사람 망명은 잘 안 받아준다고 한다.

북미회담의 결과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변화의 물결이 어떻게 흘러갈까, 모든 게 미지수인 시점에 듣는 북한 사람 이야기. 같은 조상을 가진 형제자매인 줄 이제야 안 것처럼 안타까운 마음으로 듣는다.

어떤 연유로든 남의 땅에 뿌리를 내리기로 결단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한곳에 잘 정착한 후 어렵게 용기 낸 여행길이 그래서 남다르게 느껴진다. 20여 년 전 꿈처럼 떠나온 땅에서 어렴풋이 알던 사이로 만난 명주네 부부. 우리 이십 년 후에도 만날 수 있을까, 그 말을 하며 함께 웃었다.




미주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8년 6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