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by오연희

[이 아침에] 슬픔마저 잊게 하는 병

posted Jul 3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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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서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의 포옹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특히 노년의 부부가 다정스레 서로의 몸을 기대거나 가볍게 키스하는 장면을 보면 잔잔한 감동마저 인다. 하지만 멀쩡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어쩌면 몸과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생각도 해 본다.

온화한 외모와 함께 단단한 성품을 지니신 친구 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셨다. 미국 사는 딸 집에 다니러 오신 친구 부모님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60여 년 결혼생활을 그 시대에 맞는 은근한 사랑으로 일관하셨다는, 여든이 넘으신 친구 아버지는 여전히 흐트러진 구석이 없는 반듯한 노신사였다. 인사를 드려도 멀뚱멀뚱하시고 말씀이 없으셔서 고개를 갸웃했지만, 연세가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대충 넘겼다. 그런데 그 부모님께서 한국으로 돌아가신 후 친구는 그동안 있었던 몇 가지 일을 털어놓았다.

아버지에게는 정기적으로 인사드리러 찾아오는 몇 명의 제자가 있는데, 그중 한 명이 10여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번에 한국에 돌아가면 그 제자와 어느 식당에서 만나 무슨 음식을 먹기로 했다며 굉장히 행복해하셨다. 많이 그리워서 그런가 보다, 고 생각하기에는 뭔가 이상했다. 며칠 전 집안 살림살이들을 꺼내 방바닥에 온통 어질러 놓았던 일이 생각났다. 실망스럽지만 오랫동안 함께 살지 않아서 몰랐던 아버지의 다른 면인 줄 알았다. 워낙 당신의 건강이나 주변관리를 잘 하셨기 때문에 몇 가지 증세가 겹쳐 일어났어도 '치매'라는 생각으로 얼른 가 닿지 못했다.

한국으로 떠나기 며칠 전 아버지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래전에 세상을 뜬 그 제자에 대해서 그리고 아버지의 기억력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치를 챈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난…비켜갈 줄 알았는데…"라시며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셨는데 그 모습이 떠올라 자꾸 눈물이 난다, 대략 그런 이야기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들은 소식에 의하면 친구 아버지의 치매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변 관리를 제대로 못하는 등... 집에서 감당치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자식들이 의논하여 아버지를 치매전문 병원에 입원을 시키고 아버지를 보살피던 엄마도 몸이 너무 나빠져 일반 병원에 입원하셨다. 엄마가 퇴원하여 아버지 병문안 갔던 날의 이야기가 다시 우리를 슬프게 했다. 아버지가 어느 할머니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아이들처럼 순수한 눈빛으로 서로를 보듬던 두 노인, 과거를 잊은 두 분의 소꿉장난 같은 사랑을 보고 온 엄마가 "다행이지 뭐니…"라고 하셨다며. "이럴 때 웃어야 하니, 울어야 하니?"라던 친구의 말이 내 가슴을 울린다.

평소의 인품이나 지위고하, 종교 유무에 상관없이 정신을 가진 그 누구도 이 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일단 증세가 시작되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에 '정신 있을 때 잘해'라는 말 마음에 다시 새겨볼 뿐이다.

미주 중앙일보 2013. 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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