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하다

2007.09.18 11:40

최향미 조회 수:967 추천:101

                                
        오늘은 고기 먹는 날로 정하고 외식을 하니까 어느 식당으로 갈까 고민하지 않아서 좋다. 아이들이 나이가 드니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 확실해졌다. 전과 같지 않게 서로 원하는 음식이 각기 달라서 가끔은 의견을 맞추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끔씩 먹는 고기구이는 별 반대 없이 모두 즐기는 편이다.

        아직은 제 아빠 키를 따라잡기에는 턱없이 작지만 크느라 한참 먹어대는 아들 녀석에게 실컷 먹어보라며 고기 뷔페를 남편이 택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아이들이 많이 먹지 않는다. 그런데 학교 가면, 입에서 한국음식 냄새가 난다며 음식 선택에 신중한 딸아이가 오늘은 유난히 '고기에는 마늘 구이가 맛있어 '하며 마늘을 계속 집어 먹는다. 아들 녀석까지 제누나 따라하느라 연방 마늘을 뒤집어 대며 신났다. 내일이 주일도 아닌데 '어쭈, 내일 학교 가서 어떻게 할라구' 이렇게 한마디 잔소리를 해보지만 한편으로는 대견한 생각도 든다. 이제 백인 아이들 겁내지 않고 제대로 한국음식을 즐기며 먹어대는 모습을 보니 이제야 한국 아이로 잘 키워놨구나 싶은 마음이다.

        나 역시 오늘은 고기가 많이 먹히지 않는다. 고기 굽기를 중단한 것 같자 곧이어 누룽밥과 된장찌개가 후식처럼 나왔다. 아들 녀석이 '냉면은......하며 머뭇거리자 "여기 물냉면 하나만 해 주세요"라며 남편이 추가 주문을 한다. 곧바로 냉면이 나오고, 아이들이 나눠 먹으며 '엄마는?' 하고 권한다. 한입 먹어보고도 싶지만 내가 거들기에는 양이 적어 보여 사양을 한다. "응, 엄마는 된장찌개가 더 좋아." 사실 구수한 누룽밥과 짭짜름한 된장찌개는 고기로 기름진 비위를 다스리기에는 최고가 아닌가. 아들 녀석이 식초를 넣은 냉면을 한입 베어 물더니 씽끗 웃으며 고기를 끄덕인다. 맛이 좋다는 뜻이다. '엄마는 현진이 입에 뭐가 들어가는걸 보면 제일 행복해' 하며 어려서부터 삐쩍 마른 아들에게 칭찬처럼 해주던 말에 답하듯이 곧잘 이렇게 웃음으로 제 에미를 흐뭇하게 해주곤 한다.

        냉면을 고기보다 더 맛있게 먹어 치운 아들에게 슬쩍 된장찌개를 권한다. "와, 이 집 된장찌개가 끝내주네, 자기, 내가 집에서 끓이면 왜 이 맛이 안 나지?" 조금은 과장된 찬사로 아이들의 숟가락을 된장찌개로 유인한다. 정말 구수하고 얼큰한 뒷맛이 일품이다. 결국 아이들의 숟가락이 뚝배기 속으로 들어온다. 한입 맛을 본 아들 녀석이 눈을 조금 더 크게 뜨며 맞장구를 친다. "엄마, 정말 시원해. 이 고추가 맵게 하니까 더 맛있어." 조금은 어눌한 한국말로 제 부모가 '아! 속 풀리는 것 같아 '를 연발하며 먹는 된장찌개 맛을 평한다.

        고기 뷔페에서 고기보다는 뒤풀이로 먹은 냉면과 누룽밥 그리고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여 나온 얼큰한 된장찌개를 더 맛있게 먹은 저녁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벌서 저희들끼리 영어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운전하는 남편과 나는 '아이들 입에서 내일 마늘 냄새가 심하게 날텐데' 하며 걱정을 한다. 그러면서도 '진짜 된장찌개가 괜찮았지'하며 그 맛을 한 번 더 음미해보다가 문득 아들 녀석이 어렸을 적에 '시-원-해' 하던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옛날 생각이 나니 웃음이 입에 밴다.

        아들 녀석이 다섯 살 때쯤 인 것 같다. 무슨 일이었는지 나와 단둘이만 저녁을 먹던 중이었다. 콩나물국이었던 것 같다. 어린아이에게는 조금 뜨거운 국이었는데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국물을 한입 떠먹더니 '아 시원해' 하는 것이었다. 조금후에 아무 생각 없이 식사만 하던 내 귀로 '아 시원해' 하는 소리가 다시 들린다. 순간 아들 녀석을 쳐다보니 아이는 내 얼굴에 대고 그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엄마 나 좀 보세요'하는 표정으로 말이다.

        늘상 남편이 국을 먹으며 하는 표현이라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세상에 한국말도, 영어도 어눌한 이 꼬마가 뜨거운 국을 '시원해' 라고 하다니..... 신기하고 기특하고 한편으로는 웃음도 나는 일이다. 아이의 얼굴은 '엄마 나도 아빠처럼 할 수 있어'하는 자랑스러움이 묻어있었다. 조금은 당황해서 "야, 우리 현진이가 이제는 시원한 것도 다 아네"하며 칭찬을 해준 기억이 난다. 그 후로 우리 집 밥상에서 아들 녀석의 '아 시원하다' 하는 조금은 과장된 '국 찬사'를 늘 들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그 탄성은 사라져 버렸다. '시원하다'는 표현이 더 이상 근사하게 느껴지지 않았든지, 아니면 그보다 더 멋진 어떤 말에 빠졌지 않나 싶다.

        이제 딸아이는 고등학교 삼 학년생, 아들 녀석은 중학교 이 학년생이다. 유난히 제 누나를 따르는 아들 녀석과 딸아이가 말장난을 잘 친다. 어느 때는 저녁 식탁에서 갓 이민 온 한국인의 영어 발음을 흉내 내며 웃어대느라 제 에미 눈을 흘기게도 만들지만 아이들 속을 안다. 철없는 제 에미더러 '귀여워' 하며 엄마의 세련되지 못한 영어 발음을 흉내도 낸다. "너, 엄마처럼 한국말 잘 할 수 있어? 엄마는 한국말을 끝내주게 잘 하지만 영어도 그 정도면 잘하는 거야. 그리고 미국사람들이 무식해서 원어 발음을 이상하게 하는 거지 진짜 제 대로 된 발음은 이런 거야!" 이런 식으로 늘 아이들 앞에서는 기 안 죽는 당당한 엄마의 모습을 보인 탓인지 서툰 영어를 깔보거나 흉보는 것이 아닌 색다른 문화의 차이나 재미정도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요즘은 아이들과 한국 드라마도 같이 본다. 영문학을 전공하겠다는 딸아이와 함께 드라마의 구성과 대사도 예사롭지 않게 토론하며 보는 편이다. 하지만 교포들이 주로 쓰는 말이 아닌 어려운 한자어나 비유들은 이해가 어려운 모양이다. 가끔씩 줄거리까지 이해하기 어려울 만 큼 낯선 말들은 기억해 뒀다가 물어보곤 한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네' 하며 투덜대던 나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며 캐묻는다. 그럴 때마다 하나씩 설명해주는 재미가 나 역시 새로운 것을 배우는 아이만큼 크다. 어느 때는 아이가 '이제 그만' 할 때까지 신이 나서 떠들 때도 있다.

        한국 드라마를 보다가 '애를 지웠대?' 해서 나를 깜짝 놀래 킨 딸아이. "엄마, 나 바람피는 게 무슨 말인지 알아. 지난번에 누나가 '쾌걸 춘향' 보면서 말해줬어" 라는 말로 엄마를 황당하게 만든 아들. 요즘 우리 집 아이들은 한국말을 배우느라 재미가 붙었다. 그런데 한국 방송을 보면서 배우는 한국어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너무 직설적인 의사표현과 국적이 정말 한국어인지 모를 낯선 한국어 등등이 말이다. 어느새 바뀐 한국인의 정서를 내가 의식하지 못한 탓일까?

        뜨거운 국을 먹으며 '아 시원하다' 하는 한국인의 여유와 반어법적 표현의 해학이 그립다. 그 동안 잊고 살았던 한국어의 진짜 맛을 우리 아이들과 새롭게 배우고 싶다. '엄마, 목걸이 입었어.' 라고 묻는 아이에게 '응, 슈즈랑 매치 되게 했어' 하고 대답하는 무식한 엄마가 '이열치열' 로 여름을 이기는 그런 한국인의 뚝배기 같은 정서를 어떻게 배울까.

        내가 무심결에 한 말을 아이들이 무슨 뜻이냐며 물어올 때는 그저 한국말만 잘 하는 것이 아닌, 한국인의 얼과 문화가 담긴 멋진 한국어를 잘 가르쳐 주고 싶다. 다행히 뜨거운 목욕물 속에 들어가며 "아 시원하다." 하는 그 뜻을,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를 먹으며 '와, 속 풀리게 시원하네.' 하는 그 속뜻이 무엇인지 우리 아이들이 이제는 조금씩 알아 가고 있는 것 같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새끼들' 에게 맛있는 것, 좋은 것 챙겨 먹이듯이 맛깔 나고 유익한 말들을 지혜의 바구니에 꼭꼭 챙겨주는 어미가 되고 싶다. 비록 저희끼리는 영어가 더 쉽고, 각자 식성이 달라도 삼겹살 고기에는 구운 마늘과 된장찌개가 ' 찰떡궁합'이라는 것을 아이들의 입맛이 어느새 알아 버리지 않았는가. 아이들의 미각과 언어에서, 우리는 결국 한국인인 걸 이렇게 새록새록 발견하고 있는 내 속마음이 뿌듯해진다.  



                                                                                                                                                                                                                                                                                                                             2005 글마루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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