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

2007.11.02 11:20

정용진 조회 수:934 추천:249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수숫대를 모아
나이 숫자대로 새끼줄로 묶어
단을 만들어 둘러메고
키 큰형들을 따라
뒷동산에 올라
둥근 보름달을 향해
불붙인 수숫단을 흔들며
한해의 소원을 빌었지.

이 마을 저 동산
천지 사방에서
꽃처럼 피어나
그림처럼 아름답던
염원의 불꽃.

이제는
세상인심이 사악해져
물의수난, 노아의 방주가 아닌
불세례로 세상을 심판하려 하시는 가?

외적이 침공하여 봉화가 올라오듯
이산 저 봉우리에서
불이야!
불이야!
돌풍은 역마(力馬)를 타고
노도와 같이 강산을 누비고
풀과 나무는 벌벌 떨며
검붉은 깃발을 흔들어댄다.

평생을 땀 흘려 일궈놓은
전 재산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고
모텔 베란다 의자에 앉아
욥이 처럼
재를 뒤집어 쓴 채 눈물 짖는
노부부의 허탈한 얼굴.

경찰의 성화에 떠밀려
강아지 두 마리와
앨범, 비디오테이프,
추억서린 사진 몇 점을
서둘러 가방에 집어넣고
농장을 향해 몰려오는
불기둥을 바라보며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고
고개를 숙여 간절히 기도드렸다.

풀과 나무들은 겉이 타고
새봄이 되면 다시 움이 돋겠지만
아내와 나 그리고 이웃들은 속이 탄다.

세상모르고
뒷마당 연못에서 물장구를 치는
비단잉어와 자라들
내 가슴속에는
조용히 파문(波紋)이 일고
멀리서 안부를 묻는 벗들의
빗발치는 전화벨소리를 뒤로하고
황급히 집을 나섰다.

오, 오, 주님
할 수만 있으시다면 이 재난을
나에게서 멀리하여주시옵소서. (시인. 전 미주한국문인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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