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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마음

by 동아줄 김태수 posted Dec 1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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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마음

 

김태수

 

 

  카톡이 울렸다. 윤규 친구에게서 온 전화였다. 어머니가 계시는 요양병원을 방문한 것이다. 보름 전쯤에 어머니 안부를 묻길래 요양병원에 계시니 그날이 그날이겠지 했더니, 여름 방학이 곧 시작되면 요양병원에 들르겠다고 했던 기억이 났다. 고등학교 교사인 친구는 이젠 방학만 되면 연례행사로 여름엔 수박과 참외 등을, 겨울엔 귤과 오렌지 등의 과일을 사 들고 요양병원을 찾곤 한다. 지나 번에는 어머니 침대를 포함하여 열두 분이 함께 생활하시는 2층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보여주더니 이번엔 새로 옮긴 6명이 생활하는 곳을 보여준다. 유난히도 무덥다던 여름 하루를 수박과 참외를 나눠 드시는 모습을 보니 참 좋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죄송한 마음이 인다. 올해는 꼭 찾아뵈어야지 하면서 벼르다가 5년이 훌쩍 지났는데....... 나를 대신한 친구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올해 90세이신 한국의 어머니는 혼자 실버타운에 사시다가 3년 전에 요양병원으로 옮기셨다. 나는 항공기 승무원이 되어, 외국으로만 나다니다가 미국에 이민을 왔다. 형님네가, 모시려 해도 혼자 사는 게 서로 편한 거라고 거절하셔서, 밑반찬, 빨랫감, 청소 등을 보살펴드렸었다. 그러다 형님이 5년 전에 뇌경색으로 쓰러지셔서, 형수님은 형님 간호하느라 병원에서 살다시피 한다. 어머니는 형님이 입원한 병원을 한동안 찾지 않으셨다. 형님이 움직이지 못해도 죄스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으며, 또 의식이 깨어나서 당신을 보면 얼마나 가슴 아파할 것이며, 당신도 그런 아들을 보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어, 환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요양병원으로 옮기시기 전에도 한국의 어머니는 전화를 걸 때마다 건강부터 챙겨야 한다고 말씀하시고선 당신께선 넘어져 허리와 팔목, 다리를 다치셔서 병원 신세를 여러 날씩 지곤 하셨다. 당신이 골절상을 입어 고생하실 때는 내색 한마디 안 하신다. 나중에 형수나 친척으로부터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하면, 늙어서 뼈가 부실해서 그런 거니까 별거 아니라고 하신다. 오히려 조심하지 못해 사고를 당해 여러 사람 고생시킨다고 미안해하시며 당신 탓으로 돌리시곤 했다. 이제는 돌봄이와 간병인이 있는 요양병원에 계셔서 그나마 한 시름 놓인다.

 

  2년 전의 일이다.

“엄마, 나 이번에 문학 공모전에 상 탔어! 잘했지?”

“엄마 아들이 자랑스럽지 않아?” 하고 전화로 말씀드렸더니 시큰 둥 하신다. 별로 기쁜 내색도 안 하시고는 별말씀이 없으시다.

“엄마, 이번에 또 상 탔다고. 이번엔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재외 한인 동포들이 겨루는 국제공모전이라니까. 내가 꼭 받고 싶었던 상이란 말이야.”

“게다가 다른 곳에서 또 하나 받았어. 안 될 때는 죽어도 안 되더니만 되려고 하니까는 한꺼번에 두 군데나 됐다니까. 상복이 터진 모양이여.”하고 좋아하면서 어리광을 좀 부려본다.

그때서야 “그려 잘 혔는디, 너무 글 쓴다고 신경 쓰지 말어. 잠도 잘 못잠시롱 얼마나 그 상 타보려고 고생혔겄어. 상 타는게 어디 그리 싑다냐? 건강 헤쳐감시롱 상타봐야 하나도 안 방가운게 늬 건강부터 챙겨잉.”하며 자식 건강부터 걱정하신다.

 

  이민 온 지 30년이 다 돼간다. 아이들 대학 졸업시키고 나면 좀 숨통이 트여 자주 어머니한데 갈 것으로 여겼는데 뵌 지가 5년째다. 찾아 뵐 때까지 건강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리면 “뭣 하러 와, 거기서 느그나 잘 살믄 됐지. 나는 암시롱토 않응게 엄마 걱정 허들 말어, 밥 걱정, 반찬 걱정 안 혀도 되고 아프면 약주고 치료도 해중게로 괜찮혀. 이렇게 가끔 전화로 목소리 들으면 됐어” 하신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6.25 전쟁 중 헤어져 있다가 아버지가 딴 집 살림을 차리자 어머니 혼자서 형과 나를 갖은 고생을 하시며 키우셨다.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건 고등학교 때이다. 우리 집의 비극은 우리 민족의 비극에서 연유된 거로 생각하면서부터이다.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경찰 아들 둔 죄로 빨치산에 끌려 돌아가시지도 않으셨을 것이고, 어머니도 혼자 고생하지 않으셨을 거라고. 어머니의 헌신적인 희생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나는 계속해서 못된 짓도 서슴지 않는 불량 청소년으로 자랐을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쌓였을 법한데 어머니는 경찰 공무원 정년퇴직하시고 힘이 없으신 아버지께 용돈이라도 자주 드리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아버지는 용돈을 드릴 때면 잘 받지 않으셨다. 어쩌다 받으시면서도 미안해하셨다. 내가 미국에 이민 온 후 얼마 있다가 중풍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 사랑까지 주시려고 어머니는 나를 더 챙기셨다. 생선찌개나 구이를 먹을 때면 어머니는 늘 머리 부분을 차지하셨다. “엄마 이것 좀 먹어봐, 맛있어” 하고 통통한 가운데 부분을 내밀면, “아녀, 늬나 맛있는 살 많이 먹어잉. 어두육미라고 요 대가리 부분은 깨물수록 고소한 맛이 난당게. 넌 아직 어려서 그 맛을 잘 모를 거여.” 라고 하셨었다.

 

  생선을 먹을 때면 어머니의 어두육미 말씀이 떠올라 아들딸에게 그때 이야기를 하며 미소 짓곤 한다. 아빠는 정말 한참 모자란 사람이었다고. 자식을 키워보니 알겠다. 아무리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잘 한다 해도 부모의 자식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내리 사랑이라는 말이 괜히 생기지 않았다는 것을. 부모 마음 상하지 않게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는 것도 때로는 효가 된다는 것을.

 

  어머니와 떨어져 외국에서만 보냈으니, 얼마 동안 나의 노후 일부를 어머니와 함께하려 한다. 아버지 사랑까지 더해서 받은 어머니의 사랑을, 아버지를 기리는 마음마저 더해서 어머니에게 되돌려 드려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