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ck

              Ode to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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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와 마녀 사이/ 김승희

 

엄마, 엄마

그대는 성모가 되어 주세요.

신사임당 엄마처럼 완벽한 여인이 되어

나에게 한 평생 변함없는 모성의 모유를 주셔야 해요.

 

여보, 여보

당신은 성녀가 되어 주오

간호부처럼 약을 주고 매춘부처럼 꽃을 주고

튼튼실실한 가정부가 되어

나에게 변함없이 행복한 안방을 보여주어야 하오.

 

여자는 액자가 되어 간다.

액자 속의 정물화처럼

액자 속의 가훈처럼

평화롭고 의젖하게

여자는 조용히 넋을 팔아넘기고 남자들의 꿈으로 미화되어

가화만사성 액자로 조용히 표구되어

안방의 벽에 희미하게 매달려있다.

 

그녀는 애매하다

성녀와 마녀 사이

엄마 만으로

아내 만으로

표구될 수 없는 정복될 수 없는

여인에게 사랑은 별 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여인은 사랑을 통해 여신이 되도록 벌 받고 있는거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영원을 표구하면서

세상을 배경으로 거늘이고 늠름하게 서있지.

 

세상의 딸들은

하늘을 박차는 날개를 가졌으나

세상의 여자들은 날지를 못하는구나

세상의 어머니들은 모두 착하신데

세상의 여자들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구나.

 

- 문학선집『흰 나무 아래의 즉흥』(나남,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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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대표적 페미니스트 여성시인의 오래전 시다페미니즘이란 남녀는 평등하며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이념아래 여성의 사회적정치적법률적인 모든 권리의 확장을 주장하는 주의를 지칭하는 말이다여성해방운동 과정에서 생겨난 새로운 시각 또는 이론 체계를 의미하며 여성해방’ 혹은 여성주의로 번역해 읽기도 한다. ‘여성해방운동은 대체로 시에서 열거된 여성적인 것의 탈피를 전제하기 때문에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요구들과 필연적으로 마찰을 빚게 되어있다. ‘여성적이란 말이 가부장적인 사회에 잘 적응하면서 살아가는지배문화에 의해 타자화된 여성을 의미한다면 그렇다.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하려할 때여성들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가치관과 자신의 가치관 사이에 충돌과 분열을 불가피하게 경험한다현모양처 콤플렉스 또는 천사 콤플렉스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갈등이다남성이 주체인 사회에서 여성은 무조건 착하고 순종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렇게 고분고분 길들여지면 성녀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마녀가 되고 마는 극단적인 양상으로 치닫게 된다가부장적 가치관은 여성으로 하여금 아이들에게는 현모이기를남편에게는 성녀간호사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하기를 바란다최근 까발려지는 추문들도 그 의식과 무관치 않다

 

  그러므로 여성은 늘 사랑을 베푸는 입장이 되어 자신의 감정은 배제된 채 가화만사성이라는 붙박이 액자로 못 박혀 걸려있다필요하거나 생각날 때 그저 바라보아주면여성은 집안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언제나 액자 속 모나리자의 미소가 되어야 한다주체적인 삶은 온데간데없고 사랑이나 관습에 얽매여 사는 성녀로서의 삶이 온당한 여성적 삶이라 할 수 있겠는지 의문이다성녀의 삶이 옳은 것인지과연 마녀의 삶이 나쁘기만 한 건지 곰곰 생각해 볼 일이다하지만 옳고 그름의 판단과 선택은 이 시가 처음 발표된 지 4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오늘의 화두가 되어 그들 스스로의 몫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누구의 아내누구의 엄마로 불리어지며 그리 사는 걸 둘도 없는 행복이라고 여기는 여성들이 적지 않고남성들의 엄마와 아내에게 갖는 기대와 환상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사회의 편견에 싸여 마녀의 본능을 감춘 채어쩔 수 없이 성녀인 척 살아가는 여성들 또한 적지 않으리라. '애매하다' 5만원권 지폐의 여성인물로 신사임당이 최적격으로 거론될 때 남성의 여성판타지에 복무되는 것을 반대한 여성계의 의견을 환기한다면 오늘날 여성운동의 현주소와 방향성을 짐작할 수 있겠다그런데 실제 신사임당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코 남성들이 받들어 모실만한 성정과 행태를 가진 분은 아니었다.


  그녀는 결혼하고도 오랫동안 친정에서 살면서 남편과 시부모 봉양을 소홀히 하였고첩을 본 남편 이원수를 격렬히 질타하고 투기했음은 물론 가출을 감행하면서까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그러나 남성의 기호에 맞게 박제된 사임당의 이미지 속엔 그 사실이 철저히 가려져 있다그럼에도 가부장제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식 잘 키우고 그럭저럭 잘 살았다 해서 최종 낙점을 받았던 건 아닐까어제가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미 투’ 지지와 연대가 성폭력 고발에만 그칠 것 같지는 않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모두 착하신데’ ‘세상의 여자들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구나라는 탄식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전 방위로 뻗어나갈 조짐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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