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 속의 빈곤

 

삼십여 년 전 볼티모어에서 살 때 있었던 일이다. 나는 운전하다가 길을 잃어버려 엉뚱한 곳으로 들어섰는데 갑자기 그 길이 아스팔트 포장이 없는 흙길로 변해 있었다. 먼지가 풀썩거리며 일어나고 길에는 보따리를 들거나 무엇인가를 머리에 인 흑인들이 볼티모어의 뜨거운 땡볕 아래 느릿느릿 걸어 다닐 뿐 차라고는 한 대도 없었다. 놀라서 뛰는 가슴을 누르며 조심조심 사람을 비켜 서행하면서 나는 다급하게 다시 프리웨이로 올라설 수 있는 길을 두리번거리며 찾았다. 주위에 이따금 보이는 집들도 이것이 미국에 있는 집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찌그러져가는 판잣집 같은 것이었고 여기가 미국이 아닌 아프리카라고 해도 두말없이 믿을 수 있을 만큼 동떨어진 풍경이었다.

잠시 보행자를 비키며 조심조심 가다가 나는 코카콜라 간판이 보이는 마켓을 발견하고 얼른 그 앞으로 가서 차를 내렸다. 포장 안 된 주차장의 뽀얀 먼지와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열기가 몸을 감싸왔다. 마켓 입구로 가자 대낮부터 문 좌우 흙바닥에 술 취해서 주저앉아 있던 주정뱅이 몇 명이 마치 외계인을 보듯 나를 보고 있었다. 물론 흑인들이다. 흑인 이외에 다른 인종은 눈 닿는 곳 아무 데에서도 볼 수 없었던 곳이다.

마켓 안으로 들어가서 두리번거리며 길을 물어볼 사람을 찾고 있을 때 저 끝의 카운터에 있던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치듯 물었다. “한국사람입니까?” 놀랍게도 그 사람은 나에게 한국말로 묻는 것이 아닌가. 아이구, 하느님. 이제 살았구나. 나는 부리나케 그 사람에게 뛰어갔다.

아니, 여기가 어딘데 뭐 하러 들어왔습니까? 큰일 당하려고.”

그 사람은 이 흑인빈민가에서 십여 년 동안 마켓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살면서 이 동네 사람들에게 인심을 톡톡히 얻어서 말하자면 터주 대감 노릇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국이 민주주의 국가라고요? 평등한 나라라고요? , , 이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 동네를 보십시오. 이게 평등한 곳입니까? 미국이라는 부유한 국가의 혜택에서 완전히 외면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는 곳이 이 곳입니다.”

마켓주인은 잠깐 사이에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나에게 얼음장처럼 차가운 코카콜라 캔을 따주며 말했다. 사회제도에서 소외되고 교육의 혜택에서 소외되고 따라서 직업의 기회에서 소외되어 빠져나갈 수 없는 빈곤과 무지의 구렁텅이에서 살아야하는 이들은 말하자면 미국이라는 위대한 나라의 사생아인 것이다. 어느 사회학자의 말처럼 미국이 탄생하기 위한 경제제도의 맨 밑바닥에서 아무도 하기 싫어했던 목화밭에서 노동하고 담배농장에서 땀 흘렸던 이들을 이제 부유해진 미국은 눈의 가시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분은 고맙게도 특별배려를 해서 함께 일하는 건장한 흑인청년 한 명에게 나를 프리웨이 까지 안전하게 안내하고 돌아오라고 지시했다.

그 한국 분에게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남긴 후 흑인청년을 태우고 가리켜 주는 대로 잠시 운전하여 나는 마침내 늘씬하게 아스팔트가 깔린 미합중국의 프리웨이로 들어설 수 있었다. 팁을 좀 주려고 했더니 펄쩍 뛰면서 마켓주인이 알면 큰일 난다고 사양하며 이 순박한 흑인청년은 흙길을 뛰어서 되돌아갔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나는 후일 새벽이다, 새벽이다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2019923일 조선일보 김영문의 응접실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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