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 (200 자 X 92 매)

2005.05.23 04:30

김영문 조회 수:878 추천:77

        태초에 하늘이 있고 땅이 있었다는 말이지?  웃기지 말라고 해라.  태초에 투쟁이 있었다.  이 모든 우주의 생성과 그 돌아가는 법칙의 근간은 투쟁이다.  투쟁의 법칙에 의해서 강자는 살아남았고 열등한 것은 소멸했다.  그렇게 해서 우주는 만들어졌다.  인간의 역사도 투쟁이다.  끊임없는 투쟁에 의해서 사회는 변천되어 왔다.  역사는 인간 투쟁과 그 승자들의 기록이다.  약하고 열등한 자가 설 땅은 없다.  투쟁과 승리만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의 지존이신 조직의 위대한 위원장 동지 대선배님께서는 나를 로스앤젤레스로 보내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설렁탕 뚝배기 밑바닥에 깔린 밥알을 말끔하게 긁어서 입안에 넣었다.

        “형, 뭘 그렇게 중얼거리는 거야?”

        맞은편에 앉아서 이미 오래전에 밥알 한 톨 없이 비워낸 빈 뚝배기를 아쉽게 만지작거리고 있던 김인달이 나를 멀거니 보며 말했다.  비좁고 후덥지근한 설렁탕 집 안은 손님들로 빼꼭 들어차 있었다.  

        “미친 놈.  설명하면 네가 알기나하냐?”

        김인달.  이 녀석은 좀 멀대같긴 하지만 가장 믿을 수 있는 심복 부하였다.  데모하다가 유치장에도 같이 가고 대학도 같이 퇴학당했다.  이렇게 저렇게 굴러다니다가 대선배님의 노동 조직에 가입한 것도 같이 했다.  위대하신 대선배님의 지령을 받고 로스앤젤레스에도 같이 왔고 벌써 반 년 넘게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내가 지상 과제로 삼고 맹렬히 추구하고 있는 혁명과 투쟁의 이념에는 서투른 대신 절대적인 맹종과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나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내 분신이 된 녀석이다.  학교에서 데모하던 시절 전투 경찰 쌔끼의 곤봉에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맞는 걸 내가 뛰어들어 구해 준 적이 있었다.  곤봉을 뺏고 경찰 쌔끼를 무릎 꿇린 후 무수히 구타해서 더러워진 걸레쪽처럼 만들어 골목길에 버렸었다.  별나게도 그날따라 착한 생각이 들어 피 흘리는 김인달을 등에 업고 사지를 벗어나 병원에 입원시켰었는데 이런 일이 있은 이후부터 김인달은 내 밑으로 기어 들어와 나의 심복 부하가 되었다.  

        꽹맥, 꽹맥, 꽹, 꽹, 꽹.  꽹맥, 꽹맥, 꽹, 꽹, 꽹.

       카운터 위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갑자기 사물놀이패들의 꽹과리 소리가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쓰발, 하필이면 저 소리가!  무당 어머니의 손에 맞아서 깨지는 소리를 내던 꽹과리 소리.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야, 인달아.  가서 밥값 내고 와라.  가자.”

       “엉, 알았어.”

       김인달이 일어나서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빼어들며 카운터로 갔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꽹과리 소리가 없어졌다.  심장 뛰는 속도가 정상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을 내 머리 밖으로 맹렬히 쫓아내 버렸다.      

       후덥지근한 실내와는 다르게 해가 막 진 로스앤젤레스의 바깥바람은 신선하고 차가웠다.  해가 있을 때는 그렇게 끓을 듯 뜨겁다가도 해만 지면 이렇게 차가워지니 날씨 하나는 끝내주는 곳이다.  나는 손가락을 입안에 집어넣어 이빨 사이에 낀 고기 조각을 후벼 파서 쩝쩝 씹어 먹었다.  공교롭게도 마악 문을 나서던 젊은 여자 둘이 마침 그런 내 행동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지나갔다.  쓰발 년들.  귀족 가문의 영화로운 딸년들인가?  국민의 혈세를 도둑질해먹는 고위 공무원이나 정치가의 새끼 암컷들인가?  나는 주차장을 어슬렁거리며 기다렸다.  내가 그렇게 한참이나 기다린 다음에야 김인달이 나왔다.

       “왜 그렇게 오래 걸려, 임마.”

       내가 짜증을 내자 김인달이 멋쩍게 뒤통수를 긁으며 대답했다.

       “돈이 일 딸라 모자라는데 안 깎아준대서 통사정하고 간신히 나온 거야.”

       “뭐?  이것들을 그냥!”

       얼굴이 시뻘개져서 설렁탕집으로 다시 뛰어 들어가려는 나를 김인달이 붙잡고 말렸다.

       “형, 다 됐어.  더 떠들 필요 없다니까.”
       나는 못 이기는 척 김인달에게 등을 떠밀리며 돌아섰다.

       “짜식들, 일 딸라 정도 모자라는 것은 서로 돕고 산다는 차원에서도 협조적으로 해야 할 것 아닌가 말이야.”

       나는 이 “차원” 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뭔가 유식한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여하튼 괜찮게 들리는 말이다.  신문에도 보면 이놈의 “차원”이 여간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민족적 차원에서”, “정치적 차원에서”, “당의 이념적 차원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등등 거의 매일 맞닥뜨리는 차원인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의 번잡한 한인촌 올림픽 가에서 온갖 차량 사이로 쿨렁쿨렁 소리를 내며 기고 있는 똥차의 운전대를 잡고 나는 큰 소리로 내일 할 연설을 연습했다.

       “우리의 투쟁은 곧 승리합니다.  단결된 힘을 과시하는 차원에서 우리는 마지막 언덕을 넘고 있습니다.  어두운 곳에서 핍박받으며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제 곧 빛이 옵니다.”
       김인달이 은근히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형, 이게 좀 너무 오래 끌고 있는 것 아니야?  벌써 삼 주째야.  이 멕시칸 일꾼들이 노골적으로 반발하고 있어.  다들 그만하고 일터로 돌아가자는 이야기야.”

       그건 나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개새끼들.  오합지졸 같은 새끼들.  이 새끼들은 한국의 투쟁의식이 투철한 동지들의 차원에 비하면 형편없는 물렁뼈들인 것이다.  연좌데모를 하는 새끼들이 손에는 코카콜라 컵을 하나씩 들고 히죽히죽 웃고 잡담들 해싸면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말이다.  멕시칸 일꾼들의 대표격인 호세 싼체스와 그 측근으로 보이는 칠팔 명만이 그런대로 악다구니가 있고 나머지는 모두 허수아비들인 것이다.  열등한 새끼들!  악다구니가 없이 어떻게 투쟁을 하겠다는 이야기냐, 이 쓰발들아!




       유나이티드 하이텍.  사장 김효승.  주 사업 대상국은 중국이었으나 최근에 컴퓨터 사업부에서 한국의 일산 무역과 용역 계약이 체결되어 컴퓨터 부품을 들여와 미국 소비자의 요구에 맞게 조립 납품하는 일이 추가되었다.  원래 이 일은 한국에 있는 일산 무역의 하청 업체 원풍 산업에서 하던 일이었다.  대선배님께서 원풍 산업의 공장 근로자들을 노동조합으로 결성하려고 시도하자 일산 무역은 생산의 차질을 우려하여 극비리에 유나이티드 하이텍과 용역 계약을 맺고 모든 작업을 빼돌려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하여 원풍 산업은 도산했고 수백 명의 직원은 모두 실직해 버리고 말았다.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얼마나 큰 손실인가 말이다.  이 쓰발 놈의 매국노들은 자기네 이득만 챙길 줄 알았지 더 높은 국가적, 국민적 차원에서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할 줄은 모르는 개새끼들인 것이다.

       졸지에 실직자가 된 수백 명이 조직의 사무실 앞에 진을 치고 앉아서 일자리 도로 내놓으라고 농성하는 것을 보면서 위대한 위원장 동지 대선배님께서는 이를 갈았다.

       “박석규.  너 잘 들어라.  너는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유나이티드 하이텍으로 잠입해 들어가라.  가서 노동조합을 만들어라.  그리고 우리 조직 산하에 집어넣는 거다.  알겠느냐?  나는 개인적으로 복수를 하고 싶다.  게다가 이 계획이 성공하면 우리는 해외에 지부를 둔 최초의 노동 조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너는 초대 로스앤젤레스 지부장이 된다.  나는 너의 능력을 믿는다.  이것은 조직과 관계없는 내 개인적인 명령이기도하다.”

       나는 갑자기 감격의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이 위대한 대선배님께서는 나를 이렇게 깊이 신뢰하고 계신 것이다.  충성!  충성!  

       이렇게 해서 나는 나의 심복 김인달을 대동하고 로스앤젤레스로 왔고 지령 받은 대로 유나이티드 하이텍에 공장 조립공으로 취직했다.  우리는 신임을 쌓기 위해서 몇 개월을 아주 착실하게 일했다.  공식화할 수 없는 임무이기 때문에 우리는 조직으로부터 한 푼의 금전적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미국이라면 다 근사한 집에서 사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냄새 쿨쿨 나고 더러운 아파트 방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  김인달과 나는 생활비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쥐구멍만하고 더러운 아파트를 구했다.  충청도 서산이 고향이라는 김인달은 집안이 그래도 밥술이나 뜨는 모양인지 심심찮게 이백 불, 삼백 불씩의 송금이 와서 가뭄에 단비처럼 생활에 보탬이 되고 있었다.  마침내 거사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에 나는 그 동안 의도적으로 친해놓은 호세 싼체스에게 말문을 텄다.  호세 싼체스는 수퍼바이저의 직급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멕시칸 공원들의 보스쯤 되어 보이는 녀석이었다.  

       “멕시칸 동지 호세 싼체스여.  우리는 언제 까지 이렇게 싼 임금으로 뼈가 빠지게 일해서 저 넥타이맨 새끼들 주머니를 기름지게 만들어주고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일만하고 돈은 저 새끼들이 다 챙기고 있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가?  동지.  뭉치자.  투쟁하자.  우리 몫을 찾아오자.  혼자서는 안 되지만 단결하면 우리는 할 수 있다.”

       내 짧은 영어를 김인달이 보완해서 통역하고 설명했다.  주위에서 얻어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호세 싼체스는 왕년에는 로스앤젤레스 갱 멤버였었는데 지금은 개과천선하여 천사처럼 착하게 산다는 것이다.  팔뚝에 그려져 있는 징그러운 총천연색 문신이 그의 사나웠던 과거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내 눈에는 이 녀석이 그렇게 흠잡을 데 없이 어여쁜 천사가 되어서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이따금 으슥한 구석에서 공장 근로자로부터 현금을 받아 내거나 수군수군 얘기하다가 내가 다가가면 뚝 그쳐 버린다거나하는 모든 징후가 꼭 그렇게 천사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호세 싼체스는 나의 성스러운 투쟁 제안에 교활한 눈을 반짝이며 생각하다가 동의했다.  뭔가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맹렬히 포섭 작업에 들어간 후 회사에서 이상한 기미를 눈치 챘을 때에는 나는 이미 삼백 명 가까운 공장 종업원 중에서 약 이백 명 정도의 동조자를 확보해 놓은 후였다.  평소에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안중에도 없던 회사의 한국인 간부 새끼들이 이제 슬슬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는 서서히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는 긴장감을 즐기기 시작했다.  일은 항상 그렇게 벌어지는 것이다.  무관심과 무지랑이 취급.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그 선택받은 잘난 새끼들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히, 히, 히.  나는 서서히 조여 간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약하지 않다.  그 높은 자리에서 넥타이 매고 거만 떨고 있는 대학 나온 새끼들이 내 눈치를 보며 비실거리는 것을 보면 내 마음이 실로 즐거워지는 것이다.  당황한 모습이 역력한 간부들이 허둥대며 뭔가 방어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나는 계속 투쟁 병력을 확보한다.  내가 한 가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인간의 욕심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  일 덜하고 봉급 더 받게 만들어 준다는데 싫다는 놈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얼마나 확실성 있게 그렇게 되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일단 동조자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하면 일은 시간이 흐를수록 쉬워진다.  나중에는 내가 가만히 있어도 일은 자동적으로 터지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투쟁의 영웅이 된다.   히, 히, 히.  적당히 이곳저곳에서 뜯어 챙길 수 있는 돈의 액수도 짭짤하다.  그리고 평소에 거만 떨던 그 모든 잘난 새끼들이 다 내 눈치 보며 비위맞추려고 애쓰는 꼴은 이 투쟁의 클라이맥스가 되는 것이다.  배 밑에 깔린 여자의 질 속으로 질펀하게 정액을 쏘아대는 것보다도 더 몸이 떨리는 쾌감이다.  이런 것을 모르고 소처럼 일만 해서 먹고 살고 있는 우매한 민중을 깨우쳐주는 것은 나의 성스러운 사명이다.




       “단결.  투쟁”

       핏빛보다도 진한 빨간색 바탕에 하얀색으로 선명하게 인쇄된 머리띠를 두른 노조대원들은 광장에 질서정연하게 열 맞추어 앉아 우렁차게 고함질러대고 있었다.

       “단결!  투쟁!”

       천여 명의 조직원이 열 맞춰 앉아서 고함소리에 맞춰 주먹 쥔 오른 손을 기계처럼 허공으로 번쩍 올렸다 내렸다하는 모습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장관이었다.  나는 사열대 위의 장군처럼 상기된 얼굴에 자랑과 위엄을 담고 근엄하게 그 시위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위대한 위원장 동지 대선배님의 옆얼굴을 부러움을 담고 훔쳐보았다.  

       오늘 로스앤젤레스의 아파트로 배달된 소포에는 그 대선배님의 이름이 상자 표면에 적혀 있었다.  나는 김인달이 더러운 카펫 위에 무릎 꿇고 앉아서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벗기고 상자 뚜껑을 여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에서는 “단결.  투쟁”이라고 하얀 글씨로 인쇄되어 있는 눈에 익은 핏빛 빨간 머리띠가 뭉텅이로 나왔다.  나는 대선배님의 크나큰 배려에 코가 시큰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그 넓은 광장을 메우고 질서정연하게 앉아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통일된 행동으로 “단결.  투쟁”을 외쳐대던 그 천여 명 노조원의 전설적인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나는 소포 상자 속에서 나온 편지 봉투를 김인달에게서 받아서 경건한 마음으로 들고 내용물을 꺼내 읽었다.

       “동지.  머리띠 이백 개를 보낸다.  이역만리 로스앤젤레스에서 수고가 많다.  성스러운 투쟁의 끝에는 우리의 승리가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기 바란다.  핍박받는 노동자의 편에서 정의구현을 위하여 애쓰는 용기 있는 동지에게 다시 한 번 건투를 빈다.”
       나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이 대선배님께서는 나를 “동지”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그것도 두 번씩이나.  드디어 나의 시대가 도래하는도다.

       나는 앉아있던 더러운 카펫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희열에 참을 수 없어서 나는 짐승처럼 소리를 질렀다.

       “아, 아, 아, 아, 아!”

       그리고 맹렬히 벽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길로 찼다.

       옆에 있던 김인달이 질겁을 해서 일어나 나를 붙잡아 말렸다.

       “형, 참어.  옆방 깜둥이가 또 달려 나와서 개지랄 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나는 대선배님의 편지에 미국식으로 입술을 대고 키스했다.  대선배님.  절대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맹세합니다.  충성!  충성!

       “야, 인달아.  소주 사와라.”

       “소주?”

       “그래, 임마.  소주 사오란 말이야.”

       “돈이 ..........”

       “돈?  임마, 돈 문제는 조만간에 곧 해결돼.  내가 대선배님처럼 유명한 노동 운동가가 되면 돈 소나기를 맞게 된단 말이야.”

       현대의 위대한 혁명 전사는 배가 고플 수 없다.  애국 열사가 가난했던 것은 옛날 얘기다.  물질적 풍요는 승자의 특권이다.  나는 닥치는 대로 긁어모아서 내 방은 온통 최고액 권 지폐로 도배를 하겠다.  히, 히, 히.    

       꽝, 꽝, 꽝!

       나의 달콤한 상상을 송두리째 깨버리며 누군가가 밖에서 문짝이 부서져 나가도록 두들겨댔다.  나와 김인달은 심장마비가 걸릴 정도로 놀라서 문을 보았다.

       꽝, 꽝, 꽝!

       이번에는 문만 두들겨대는 것이 아니고 밖에서 갓댐, 썬 오바 비치, 머더 훠커, 맹렬하게 고함까지 질러대고 있었다.

       “옆 방 깜씨야, 형.”

       김인달이 겁에 질려서 토끼 눈을 하고 나를 보았다.

       쓰발.  이 우매한 민중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중차대한 일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쌔끼들은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는 하등 동물에 불과하다.  이념도 이상도 없고 투쟁 정신도 없는 차원이다.  쌔끼!

       “문 열어.  내가 얘기하겠다.”

       김인달이 겁에 질려서 고리를 벗기고 문을 열었다.  밖에서 고릴라 권투 선수처럼 생긴 찐한 검둥이가 몸에 걸친 거라곤 삼각 팬츠 하나밖에 없는 상태로 태풍처럼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좁은 방안에 머리가 천정에 닿을락말락한 거구의 사나이가 들어오니까 꽉 차는 느낌이었다.  녀석은 온 아파트가 다 떠나갈 것 같이 큰 목소리로 연신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는데 영어를 못 듣는 내 귀에도 그것은 정녕 즐거운 기분으로 떠드는 것이 아닌 것이 확실했다.  나는 이 쌔끼의 거구에 좀 겁이 났지만 온몸에 힘을 주고 의연하게 서서 이 고릴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하우 아 유?”

       자세히 보니 이 찐한 털투성이의 검둥이 쌔끼 삼각 팬츠 밖으로는 음모가 무수히 삐어져 나와 있었다.  약간 구부러진 소시지 같은 성기가 불뚝 서서 팬츠 밖으로 뚫고 나올 것처럼 성나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쌔끼들은 기분이 나빠서 성이나면 그 놈도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모양이다.  

       뜻밖의 하우 아 유에 좀 주춤해진 녀석에게 김인달이 아이 엠 쏘리를 아마 열 번도 넘게 한 것 같다.  나도 아이 엠 쏘리를 했다.  우매한 자와 소득 없는 싸움을 벌릴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나는 더 큰 할 일이 많지 않은가.

       녀석은 계속 큰 소리로 고함질러대며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뭐래?”

       나는 위엄을 잃지 않으며 김인달에게 물었다.

       “한 번 더 소리를 내면 도끼로 다 때려 부수고 우리를 바닷물 속에 처넣어서 코리아로 헤엄쳐 가게 만들겠대.”

       쓰발 새끼.  투쟁의 의미를 모르는 쓰발 새끼.  우매한 쓰발 새끼.




       아침에 회사 복도에서 잠깐 마주친 김효승 사장이 나를 쏘아보는 눈초리는 싸늘했다.    

       노동쟁의를 시작한지 세 번째 주 수요일.  쟁의에 참가한 인원은 전체의 약 삼분의 이 정도 되는 백 팔십 명쯤이었다.  나머지 구십 여명은 쟁의 참가를 거부하고 정상 근무를 하고 있었다.  어느 쓰발 새끼가 유식한척 하고 연방 노동법에 의하면 노동 쟁의 중에는 업주가 임금을 지급할 의무가 없다는 둥, 정부에서 주는 실직 수당도 타먹을 수 없다는 둥 떠들어대서 거부자가 생긴 것이다.  근로자의 백 퍼센트를 끌어들일 수 없었다는 것은 치명적이었음을 나는 자인한다.  그러나 이만한 숫자가 가담해 주었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회사 주차장 입구에는 경찰차가 두 대 서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돌발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정상 출근하는 근로자가 일터로 들어갈 때 마다 쟁의에 가담한 근로자들은 야유를 퍼부었고 그 때 마다 경찰관들은 긴장하여 사태를 주시했다.  그러나 이 멕시칸 새끼들은 한국 사람들처럼 진지하거나 잔인할 정도의 악다구니가 없다.  쟁의를 반대하는 새끼들이 근무하러 들어가는 것을 보면 욕지거리를 해대고 몸싸움까지 마다하지 않을 만큼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야기 시켜야 할 텐데 천만의 말씀이다.  야유를 퍼붓다가도 농담하면서 웃고 떠들어댄다.  여자 직원에게 하는 야유는 쟁의를 위한 것인지 성적 희롱인지 알 길이 없다.  빌어먹을 새끼들.  쓰발 새끼들.  

       나는 쟁의 참가자 모두를 모아놓고 아침 연설을 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이제 쟁의가 삼 주째입니다.  승리는 바로 눈앞에 와 있습니다.  틀림없이 이번 주 안에는 우리가 원하는 급료 인상과 유급 휴가 제도를 쟁취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노동조합을 만들어 굳게 뭉칩니다.  피를 나눈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김인달이 영어로 통역을 했고 그것을 다시 다른 멕시칸 쟁의 참가자가 스페니쉬로 옮겨서 모두에게 전달했다.  왁자지껄 불만 섞인 목소리가 떠들썩하게 여러 가지의 항의를 해왔다.  옮기고 옮겨서 김인달이 내게 전달해주는 사항은 대개 아래와 같았다.

       생활비가 떨어졌다.  실직 보조금도 못 타먹고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

       대충 끝내고 일터로 돌아가자.  처음부터 다른 회사에 비해서 급료 수준은 되레 높은 수준이었지 않은가.      

       회사에서 우리 요구를 다 안 들어 준다면 절충해라.  매일 회사에 나와서 주차장만 맴돌기도 지쳤다.  우리는 일을 하고 싶다.

       쓰발 새끼들.  노동 쟁의의 기본 이념조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무식한 새끼들.

       나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고 이 무지몽매한 인민을 선도의 차원에서 살살 달래가며 끌고 나가기로 했다.  나는 김인달에게 대선배님이 보내오신 빨간 머리띠를 하나씩 지급해주라고 지시했다.  그런 걸 본 사실이 없는 이 멕시칸 쟁의 참가자들은 아연 활기를 띄고 머리띠를 하나씩 지급받아서 희희낙락 떠들며 머리에 두르고 장난치기 시작했다.  어떤 놈들은 그 머리띠가 어디선가 본 쿵푸 영화하고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머리에 두르고 쿵푸 싸움하는 흉내를 내기도 했다.  멀찌감치에서 구경하고 있던 경찰관들도 까만 썬글라스 안에서 씨글씨글 웃으며 재미있어했다.  그러나 이 오합지졸들을 대선배님이 하셨듯이 질서정연하게 열 맞춰서 앉혀놓고 건전지로 작동하는 장난감처럼 통일된 동작으로 오른쪽 주먹을 허공에 펌프질하며 단결! 투쟁! 을 외쳐대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나는 판단하고 단념하기로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지금 차곡차곡 착실하게 해외에서의 위대한 노동쟁의의 금자탑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틀림없이 승리한다.  나는 금의환향한다.  히, 히, 히.  나는 위대하다.  더 이상 무당의 새끼라고 놀리는 놈도 없다.  모순 덩어리의 자본주의 체제를 송두리째 뽑아버리고 우리는 인민의 낙원, 우리의 이상향을 건설한다.  나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선택받은 위대한 일꾼이다.  나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니다.  나는 이제 공격자다.  나는 강하다.




       무당의 새끼.  야, 무당 아들 온다.  동네 쌔끼들이 달려들었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 보따리에서 책들이 날아올라 논두렁으로 곤두박질쳤다.  개새끼들.  개새끼들.  나는 울면서 미친 것처럼 주먹질을 해댔다.  놈 쌔끼들은 모두 달려들어서 한 대씩 때려댔다.  무당 아들 죽여라.  귀신 붙는다.  한참이 지난 후 아이들은 모두 가버리고 나는 엉엉 울면서 길바닥에 앉아서 헐떡거리다가 흙투성이가 된 책을 주워 모았다.  코피가 흐르고 두 무릎도 모두 까져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내 마음은 몸보다도 더 아팠다.  냇물 가에 주저앉아서 코피를 닦아내고 무릎도 씻었다.  그리고 나는 흑, 흑 울었다.  엄니야, 무당 안하면 안 돼나?  부엌의 부뚜막 위에 알록달록한 부적들을 올려놓고 주문을 외우고 있던 어머니의 눈이 파랗게 꼬였다.  뭬이야?  눈앞에 불이 번쩍하고 간신히 멎어가던 코피가 다시 터져서 빨갛게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나는 깨어진 무릎을 절룩거리며 죽을힘을 다해서 억센 어머니의 손을 피해 밖으로 도망쳤다.  해는 어둑어둑 지고 있었고 나는 배가 고팠다.  몸과 마음이 모두 아팠다.  마음이 더 아팠다.  쓰발 놈의 마음이 더 아팠다.  나는 목을 놓고 엉엉 울었다.  나는 강해진다.  나는 복수한다.  내가 어른이 되고나면 이 쓰발 놈의 세상을 송두리째 다 뜯어고친다.  나는 울면서 맹세하고 또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주차장 안에는 벌써 런치 트럭이 와서 지글지글 음식을 볶아대고 이 오합지졸 같은 쓰발 새끼들은 파리 떼 몰려들 듯 까맣게 트럭 주위에 몰려서 음식을 사먹고 있었다.  또 한쪽에서는 다른 한 패가 맨 바닥에서 편을 갈라 축구를 하느라고 시끄럽게 소리 지르며 뛰어다녔다.

       나는 김효승 사장의 요청에 의해서 그의 사무실에 가서 앉았다.  쌔끼가 드디어 무너지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박석규.  한국에서는 노동 운동으로 여러 번 검거된 기록이 있더군요.  노동 쟁의, 폭력, 기물 파손, 무단 점거, 불법 감금.  화려한 경력입니다.”

       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똑바로 드려다 보았다.  쓰발 놈의  김효승 사장은 두려운 기색 없이 내 눈을 받고 있었다.  

       “이 회사는 내가 20 년 전에 맨 손으로 시작한 회사입니다.  그 때에는 한인이 얼마 안 됐고 소수 민족에게 오는 인종 차별과 불이익도 많았습니다.  모든 어려움을  묵묵히 감내하면서 나는 내 인생의 황금기를 모두 바쳤습니다.  나에게는 이것이 다만 일개의 회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내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보스턴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는 내 아이가 졸업해서 돌아오면 뒤를 이어 더 크게 만들어야하는 회사입니다.”      

       김효승 사장이 조용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것을 박석규씨는 훼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창문 밖에서 축구하던 근로자들이 와아! 함성을 질렀다.  골인이 됐나보다.

       빨리 끝내라, 이 쓰발아.  나는 조급해지는 마음으로 김효승 사장을 윽박지르고 싶어졌다.  

       “한국과 하던 컴퓨터 일은 모두 중국으로 이관하기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원가와 판매가 사이에 거의 차이가 없어서 사업으로써의 가치가 없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따라서 박석규씨가 소란을 피우지 아니했더라도 작업이 인건비가 낮은 중국으로 점차 이관되면서 많은 해고를 했어야 했습니다.”

       “뭐라고?”

       나는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것을 감추려고 애썼다.  내 얼굴에 화끈거리며 열이 올라왔다.      

       “스트라이크를 하고 있는 근로자에게 최후통첩을 하겠습니다.  오늘 오후 세 시 까지 근무처로 복귀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정리 해고하겠습니다.”

       이 쓰발 새끼는 내가 숨 쉴 틈도 안 주고 있었다.

       “당신, 나에게 공갈치는 거야?”

       나는 의자를 차고 일어나면서 위협적인 어조로 소리 질렀다.  그러나 이 개자식 김효승 사장은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고 조용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회사에서 근무를 계속 하고 싶은 사람은 오늘 오후 세 시 까지 자기 근무지로 복귀하십시오.  복귀하지 아니한 사람은 근무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해고하겠습니다.”

       공고문이 영어와 스패니쉬로 나붙자 아연 긴장이 감돌았다.  나와 김인달은 갑작스럽게 험악해진 근로자들에게 에워싸여서 온갖 질문에 답해야했다.  이 개새끼 김효승 사장은 뜻밖에도 나를 괴로운 상황 속으로 처박아 놓고 있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같으면 회사로 뛰어 들어가 점거해 버리면 실로 간단한 일 일 텐데 여기 개떡 같은 미국에서는 그렇게 하면 모두 잡혀 들어간다는 것이다.  쓰발 새끼.  

       함성 소리와 함께 두꺼운 유리문이 와장창 깨져 나갔다.  단결.  투쟁.  핏빛 머리띠를 두른 노조원들이 물밀 듯이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 손닿는 대로 때려 부수며 회사를 점거했다.  나는 심복 행동대원 이십여 명을 이끌고 이층으로, 삼층으로 몸을 날려 뛰어다니며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온 몸에 응어리지고 누질러져 있던  피해의식과 분노가 몸속에 팽창하며 압축되어 쌓이다가 어느 폭발점에 도달하자 맹렬히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투쟁.  투쟁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지금이다.  일어나라.  부당하게 핍박받고 살던 노동자 계급은 모두 일어나라.  부숴라.  때려 부숴라.  

       알록달록한 무당 옷을 입고 신들려 맹렬히 몸을 떨어대던 어머니는 헐떡이며 구석에 서서 표독스런 눈으로 읍에서 나온 두 명의 미신 단속반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은 차려놓은 굿판 위의 음식과 부적들을 막대기로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걷어찼다.  굿을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왜 말을 안 듣는 거야?  나는 겁에 질려 울면서 마당 구석에서 이 모든 광경을 보고 있었다.  무당 어머니의 눈에 이글이글 불꽃이 일었다.  난장판을 치던 단속반원들은 무당 어머니의 타오르는 눈빛에서 슬그머니 두려움을 느꼈는지 기세가 다소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개새끼들.  나는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뒤에 어른들이 쉬쉬하면서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때 그런 일이 있고난 다음, 일주일 후 한 놈은 비번일 때 읍에서 술 처먹고 가다가 차에 치어서 죽고 다른 한 놈은 기침을 하다가 피를 토한 후 병원에 가서 폐암 진단을 받고  삼 개월이 채 되지 않아서 병사해 버렸단다.  개새끼들.  쓰발 새끼들.  잘 죽었다.        

       “침착하십시오.  회사의 술수에 넘어가면 안 됩니다.  해고는 없습니다.  회사는 순진한 우리들에게 공갈을 치고 있습니다.”

       나는 목청을 높여서 떠들었고 김인달도 열심히 통역해댔다.

       “야, 어떻게 그걸 보장하겠다는 거야?  회사의 작업량이 그전보다 훨씬 줄어서 그렇잖아도 해고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호세 싼체스의 심복 하나가 험악한 얼굴로 소리 질렀다.  여기저기서 와악 동조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이 가소롭고 의지력이 약한 쓰발 새끼들에게 분통이 터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투쟁과 혁명의 큰 차원을 전연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쌔끼들인 것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기다려라, 쌔끼들아!  우리는 틀림없이 이긴다고 말했잖냐!  일 덜하고 봉급 더 받게 만들어 주겠다는데 왜 개지랄들이야, 이 쌔끼들아!”

       나는 분노감에 참을 수 없어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놀랍게도 이 멕시칸 근로자들은 내 저주 섞인 한국말을 잘도 이해하는 모양이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앉은 자리에서 벌떡 벌떡 일어나면서 왁자지껄 삿대질까지 해가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김인달이 당황스럽게 나서서 뭐라고 영어로 외치면서 불을 끄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다급하게 나에게 말했다.

       “형, 성깔 부리지 말고 이성을 가지고 하란 말이야, 이성을.”

       호세 싼체스가 나에게 와서 물었다.

       “어떡할 거냐?  오후 세시까지라는데.”

       나는 표독스럽게 부릅뜬 눈으로 호세를 보면서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호세 싼체스여.  나를 믿으라.  회사는 우리를 해고할 수 없다.  더 높은 급료를 받으며 우리는 일터로 복귀하게 된다.  우리는 이 투쟁에서 승리한다.  우리는 위대한 승리자가 된다.  나를 믿으라.”

       호세 싼체스의 눈에 기분 나쁜 음흉한 빛이 돌았다.  이 새끼가 갱단 멤버였다더니 역시 눈빛이 더럽다.

       “오우 케이.  그러나 만약 한 명이라도 해고자가 생기면 너는 내가 개인적으로 손을 보겠다.  알았지?”

       호세 싼체스는 엄지손가락을 세워서 내게 보인 후 아래를 향해서 돌렸다.  




       오후 세 시.

       쓰발 새끼들은 그렇게 공갈치며 말렸는데도 모두 일터로 복귀했다.  남아 있는 것은 일보다는 말썽거리에 더 관심이 있는 호세 싼체스 패거리들 칠팔 명과 깡패 새끼들 같은 골칫덩어리 직원 십여 명뿐이었다.  잠깐 동안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빨간 머리띠가 초라하게 구둣발 아래 짓밟히고 있었다.  나는 입술이 타들어가는 초조감과 함께 비로소 패배의 가능성을 현실적 차원에서 느끼기 시작했다.

       오후 네 시.  

       오후 다섯 시.  

       하루 종일 서 있던 경찰차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섯 시 십 분.  

       근무를 끝낸 근로자들이 갑자기 왁자지껄 쏟아져 나와서 퇴근하기 시작했다.  잠시 김빠진 야유 소리와 되받아치는 소리가 주위를 시끌시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모두 퇴근해 버린 후 투쟁하고 있는 이십 명이 될동말동한 인원만 주차장에 남고 조용해졌다.  그들은 뭔가를 계속 먹어대며 규정 위반인 맥주도 사다가 숨어서 마시기 시작했다.

       오후 다섯 시 삼십 분.  

       누군가가 불러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던 호세 싼체스가 종이 한 장을 들고 살인이라도 할 것 같은 기세로 뛰어나왔다.  그는 기분 나쁘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쏘아보며 종이를 내밀었다.  입에서는 맥주 냄새가 쿨쿨 나고 있었다.  쓰발 새끼.

       내가 받아든 종이를 김인달이 드려다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말했다.

       “큰 일 났어, 형.  해고자 명단이야.”

       거기에는 작업장으로 복귀하지 않은 모든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모두들 나를 에워싸고 모여들었다.  분위기가 험악한 차원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빌어먹을!  김효승 사장.  이 쓰발 새끼.  죽인다!

       온 몸의 피가 모두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나는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머리띠 하나를 집어서 내 머리에 질끈 동여맸다.  그리고 번개같이 공장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실패할 수 없다.  나는 대선배님의 기대에 한 치도 어긋날 수 없다.  충성!  충성!  

       김인달이 뒤쫓아 오면서 다급히 소리 질렀다.  

       “형, 뭐하는 거야?  참어!  여기는 미국이야.  한국식으로 하면 안 돼.  여기서는 법대로 해야 돼.”

       호세 싼체스와 그 패거리도 왁자지껄 떠들며 뒤따라 왔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벽에 붙어있는 유리문 안의 화재 비상용 도끼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구둣발로 유리문을 깨고 도끼를 꺼내들었다.            꽹맥, 꽹맥, 꽹, 꽹, 꽹.  꽹맥, 꽹맥, 꽹, 꽹, 꽹.

       갑자기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이 큰 꽹과리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핏발선 눈을 부릅뜨고 김효승 사장의 방으로 뛰어 들었다.  

       “형, 안돼!”

       뒤에서 들리는 김인달의 목소리가 울고 있었다.

       김효승 사장은 방에 없었다.  개새끼.  몸을 돌려 나오려는데 호세 싼체스와 그의 패거리들이 문을 막으며 들이닥쳤다.  

       "비켜, 이 새끼들!“

       나는 도끼를 위협적으로 들어올렸다.  

       빡!  호세 싼체스의 주먹이 내 턱을 호되게 강타했다.  그리고 그 쓰발 새끼들 모두가 나에게 달려들어서 때리기 시작했다.

       무당 아들 온다.  동네 새끼들이 와아 뛰어 들었다.  돌팔매질이 들어왔다.  야, 이 쓰발 새끼들아, 쓰발아.  나는 울며 울며 내게 맞은 돌을 되받아 던졌다.  흰창이 뒤집어진 눈으로 나는 던지고 또 던졌다.  얼굴 오만군데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쌔끼들아.  개새끼들아.  맹렬한 반격에 쓰발 새끼들이 주춤해서 물러났다.  귀신 나왔다.  히, 히, 히.  무당 어머니의 표독스런 눈이 허공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스톱.  스톱.  노 모어.  히 이스 고우잉 투 다이!  가물가물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호세 싼체스가 소리 지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내 몸에서는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히, 히, 히.  쓰발 새끼들.  소리를 지르다 나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잠겨 버렸다.  이제 소리는 입안에서만 맴돌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개새끼들.  쓰발 새끼들.  나는 악을 쓰다 지쳐서 꺼억꺼억 울기 시작했다.  

       형, 정신 차려!  죽으면 안 돼!  나의 심복 김인달의 떨리는 목소리가 먼 곳에서, 아주 먼 곳에서 조그맣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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