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탄

2007.11.07 12:59

김영문 조회 수:832 추천:155

                                카피탄

    평화와 행복 속에서 살던 내 생활에 암운이 깃들기 시작한 것은 한 2개월쯤 전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퇴근하여 집에 들어오니 아내와 딸아이가 중요한 안건이 있어서 즉각 가족회의를 해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보다시피 지금 막 집에 도착했으니까 우선 샤워부터 하고 저녁 먹고 이야기하자니까 그럴 겨를이 없단다. 지금 당장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내는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조금도 양보할 눈치가 아니었다.
    “아빠, 엄마 말대로 해야 돼요. 지금 당장 의논해야 돼요.”
    열다섯 살 생일을 마악 지난 딸아이까지 옆에서 제 엄마 편을 들었다. 이 딸아이는 나하고 비슷한 데는 한 군데도 없고 제 엄마 얼굴만 쏙 빼 닮아서 은근히 서운한 노릇이었는데 한 술 더 떠서 마음 쓰는 것마저도 항상 제 엄마 편이었다. 다른 집 딸들은 엄마와 아버지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면 아버지 편을 든다던데 이 집 딸은 한 번도 아버지의 우방이 되어본 적이 없다.
    여하튼, 할 수없이 나는 붙잡혀 앉아서 아내의 설교를 들어야했다.
    아내의 학설인즉슨, 이것은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인생의 질풍노도라는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 딸아이의 정서 생활에도 좋고 생명의 존엄성을 실제 경험으로 익히게 되며 그 귀중한 경험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과의 대인 관계를 좀 더 슬기롭게 할 수 있는 기술이 터득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집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아지므로 인해서 나쁜 친구들과 사귈 수 있는 기회가 훨씬 줄어들고, 등등, 등등,........
    아하, 그 이야기였구먼. 지금 아내가 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이미 누차에 걸쳐서 이런 비공식 가족회의에 상정되었던 건이었다. 지금까지는 아내와 딸이 동맹한 2대 1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가장의 전통적인 권위와 위엄을 앞세워 항상 거부권을 행사해서 무효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딸이 나이가 들면서 제법 자기 의견을 당돌하게 내세우기 시작하고 또 권위와 위상만으로는 아내를 다스릴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최선을 다해서 버티다가 마침내 나는 약 두 달 전에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즉시 마치 미리 짜여져 있던 각본처럼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아내의 친구가 기르다가 손이 너무 간다고 포기한 세 살짜리 상당히 덩치가 큰 수놈 잡종 개 한 마리가 입양된 것이다. 이름은 카피탄이란다.
    갑자기 괴상한 놈이 하나 들어오자 집안은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꼭 집 밖에서만 기른다는 조건을 내세우려 했지만 이 최후의 보루도 무너져서 이놈은 아내와 딸에 의하여 집안이건 밖이건 관계없이 제멋대로 들락거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리하여 나에게는 큰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 짜식이 딸과 아내에게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온갖 아양을 떨다가도 나만 보면 그르르르 하면서 험악하게 인상을 쓰고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아내와 딸은 재미있다고 손뼉까지 쳐가면서 깔깔대고 웃지만 개를 길러본 경험이 없는 나에게는 이 위협적인 깡패 같은 놈의 존재가 예상치 못했던 불안의 요인이 되어버렸다. 애써 태연한척 하지만 넓지도 않은 집에서 이 놈 카피탄과 코를 맞대다시피 하고 살아야할 판인데 나만 보면 그르르르 당장 공격해올 듯 자세를 낮추고 째려보니 여간 불안한 노릇이 아니었다. 그러다가도 아내와 딸을 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꼬리를 흔들며 뛰어 올라 매달리고 그 긴 혀로 볼을 핥고 난장판을 친다. 그러면 그 여자들은 자지러지게 비명을 지르면서도 쓰다듬고 뽀뽀하고 별 해괴한 짓을 다 해대는 것이다. 내가 마시던 유리잔에는 같이 입도 안대겠다는 까다로운 아내가 이 짜식한테는 온 얼굴을 다 맡기고 그 긴 혀로 핥아대면 꺄르륵 꺄르륵 웃고 소리 지르면서 좋아하고 있으니 말도 할 수 없고 속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혹간 가다가 딸과 아내가 동시에 외출하고 집에 카피탄 놈하고 나하고 둘이만 있게 되면 이건 비상사태가 되는 것이다. 리빙룸에 있는 텔레비전을 보러 나가려도 이 짜식이 어디 있는지 우선 확인해야 하고 소파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흘금흘금 녀석의 눈치를 살피며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녀석도 둘만 있으면 나만큼이나 불안한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앉아서 꼼짝도 않고 계속 나를 째려보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런 때는 그놈이나 나나 모두가 이 집 여자들이 빨리 집에 들어오기를 학수고대하게 되는 것이다.

    일요일 오후, 전화벨이 울리자 자기 방에서 컴퓨터를 치던 딸아이가 빠른 순발력으로 잽싸게 전화를 받았다. 딸은 두 손으로 계속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리기 위해서 전화 받을 때는 항상 스피커폰을 사용했다.
    “엄마야? 잘 도착했어? 응. 우리 다 잘 있어. 카피탄? 내가 돌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어제 한국에 간 아내가 전화한 모양이었다. 나는 리빙룸에서 신문을 보다가 반가운 마음에 일어나 딸의 방문 앞으로 가서 기웃하고 드려다 보았다.
    “다 별 일 없지? 카피탄 밥은 제 때 먹이고 있어?”
    스피커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엄마. 걱정 안 해도 돼.”    
    마치 사람들의 대화가 자기에 관해서라는 것을 안다는 듯 개는 딸아이의 발치에 앉아서 내가 다가선 것은 개의치도 않고 딸의 얼굴을 진지한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내와 딸이 한참 떠드는 것을 나는 귓등으로 들으며 이제나 저제나 아내가 나를 바꿔달라고 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스피커폰을 통해서 들려오는 아내가 말했다.
    “그래, 잘 있어. 또 전화할게.”
    “응, 엄마, 잘 있다 와.”
    “그러고, 참, 카피탄 밥줄 때 아빠 밥도 잊지 말고 챙겨 드려. 알았지?”
    “알았어, 엄마.”
    “또 전화할게. 빠이.”
    “빠이.”
    전화는 끊어졌다. 스피커폰 스위치를 끄다가 문간에 서있는 나를 발견한 딸아이가 양심은 살아 있는지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잘 도착했대.”
    카피탄의 안부는 물어보면서도 나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이 없었다. 더구나 카피탄 밥줄 때 내 밥도 챙기라는 것은 무슨 말인가.
    “아빠, 저녁 차려놓고 카피탄하고 공원에 나갔다 올게.”
    곤란한 상황을 면하려는 듯 딸은 얼른 부엌으로 들어갔다. 카피탄이 꼬리를 흔들며 뒤따랐다.
    나는 리빙룸으로 가서 텔레비전을 틀었다. 입맛이 쓰다. 내가 거느리고 살던 두 여자가 모두 이 카피탄이라는 수놈에게 온 정신을 팔고 있으니 내 기분이 과히 좋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부엌에서 딸그락거리며 그릇 부딪치는 소리를 내던 딸이 카피탄과 함께 나가고 집안이 조용해졌다. 나는 리모콘으로 이곳저곳 채널을 돌려보다가 소파에 길게 누웠는데 잠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깨어보니 텔레비전에서는 축구 경기가 한창이었다. 배가 고팠다. 점심을 거르고 오후 세 시가 되었으니 배가 고플 만도 하다. 부엌으로 가보니 딸아이가 식탁에 참하게 준비해 놓은 식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밥, 김, 김치, 고기 몇 점, 그리고 아, 이런 세상에, 서양식 햄버거까지. 어린아이인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커서 이렇게 아빠 식사까지 준비해주니 대견했다. 나는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마이크로 오븐에다 덥힐 것을 덥힌 후 텔레비전 앞에 가지고 와서 축구 경기를 보며 아주 맛있게 먹어치웠다.
    한참이 지난 후 딸아이가 그 놈의 카피탄과 돌아오자 집안은 다시 어수선하고 떠들썩해졌다. 카피탄이 음식 냄새를 맡았는지 킁킁거리며 부엌 주위을 돌다가 내게로 닥아 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경계 태세로 돌입하며 녀석의 거동을 예의 주시했다. 녀석도 조심스럽게 경계하며 내 얼굴에 코를 갖다 대더니 냄새를 맡았다.
    “아빠, 이상하다. 여기 놔뒀던 개밥 못 봤어?”
    부엌에서 딸아이가 물었다.
    “개밥?”
    “응. 나가기 전에 내가 깡통 따서 아빠 밥하고 같이 준비해 놨는데 없어졌어.”
    카피탄 이놈이 내 입 근처를 계속 킁킁 냄새를 맡다가 드디어 확신이 선 모양이었다. 몸을 낮추고 공격 자세를 취하더니 이놈은 나를 째려보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그르르르.


김영문 / Youngmoon Kim (110407)(200자 x 21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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