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와 숙녀 - 박 인환 -

2007.11.05 07:46

성민희 조회 수:378 추천:21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고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庭園)의 초목(草木) 옆에서 자라고 문학(文學)이 죽고 인생(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作別)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記憶)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雜誌)의 표지(表紙)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詩 * 버지나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 * 이 시가 발표된 1955년은 6.25 전쟁 직후, 절망감과 허무주의가 극에 달했던 시절이다. 1950년대 모더니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 시에는 이런 절망감과 허무주의가 비관적인 색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영국 출신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이자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인 버지니아 울프는,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의 어느 날 주머니에 돌멩이를 가득 넣은 채 우즈 강에 걸어 들어가 자살했다.어린 시절 의붓오빠들의 연이은 성폭행으로 만성적인 정신분열증을 얻게 된 그녀는, 창작 활동에 전념한 30년 동안 성차별과 폭력이 없는 사회를 꿈꾸며 남성 중심의 사회와 부단히 싸웠지만, 세계 대전의 암울한 현실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시인은 그런 버지니아 울프를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라 말한다.그리고 이제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가을 속으로 떠났다.'고 말한다. 제목에도 등장하는 '목마'는 이 시에서 가장 핵심적인 상징이다. * 목마가 말이 아님을 알았을 때 * 당연한 얘기지만 '목마'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시인은 자기 세대 젊은 지식인들이 꿈꿔 왔던 이상을 진짜 말이 아니라 '목마'라고 부르고 있다. 시인은, 그들이 미처 그것이 진짜 말이 아님을 몰랐고, 그래서 그 이상(理想)을 철저히 신봉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가 삶의 마지막에야 깨달았듯이, 그들의 이상이 가짜 말에 불과했음을 6.25 전쟁이라는 절망적인 현실이 깨닫게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그들의 이상은 '목마'라는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고서, 깨어진 이상의 상처(방울소리)만 남긴 채 그들(주인)을 버리고 떠나갔다고 시인은 말한다. 그러니 '한 잔의 술을 마시고' 그들의 '상심한 별'에 대해, 혹은 자신의 이상이 '목마'였음을 깨닫는 순간에 자살을 택한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에 대해 넋두리를 나눌 뿐, 무엇을 하겠느냐고. 시인은 자신의 시대를 문학과 인생이 죽어 버리고 사랑의 진리마저 배반당한 시대라 말한다. 이제는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 허무하나마 찬란한 이상을 품은 사람마저 찾아볼 수 없을 수밖에. 이제 등대의 불은 꺼졌고, 그들은 무엇을 지향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 시의 후반부에서 시인은 '~야 한다'라는, 당위(當爲)를 주장하는 표현을 계속 사용한다. 페시미즘 (pessimism.비관주의 염세주의) 의 미래를 위해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해야 하며,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당위를 뜻하는 '~야 한다'라는 표현 때문에, 이런 말들은 얼핏 새로운 의지를 다지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런 생각이 오해였음을 알 수 있다. 깨어진 이상의 상처를 되새기는 '목마소리' 혹은 목마의 '방울 소리'는 결국 그들을 페시미즘에 빠지게 할 수밖에 없다. 버지니아 울프의 절망도, '한 잔의 술'도 삶의 모든 희망과 이상을 잃어버린 절망을 뜻할 뿐, 시인의 말에서는 새로운 삶을 위한 어떤 의지도 찾을 수 없다. 시인은 말한다. '인생은 원래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적인 것일 뿐, 진지하게 절망할 이유도, 한탄과 외로움에 빠질 이유도 없다고. '목마'는 이미 하늘로 날아가 버렸고 방울 소리만 귓전에 울릴 뿐, 이제 스러진 술병과 함께 뒹구는 일 밖에 무엇을 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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