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산 화전민 움막에서 혼자 사는 남자/정용주시인

2011.12.16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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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 화전민 움막에서 혼자 사는 남자

[서평] 정용주 <나는, 꼭 행복해야 하는가> / 유혜준 2011.09.20

한 사내가 치악산 산골에 홀로 산다. 이 사내가 사는 움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돌로 벽을 쌓고 함석으로 지붕을 한 집이 한 채 있었더란다. 주인은 있되 집은 비어, '마당에는 망초가 우거지고 뒤꼍에는 산딸기덤불이 벽 밑까지 뿌리를 뻗어 내려와 대낮에 지나가기에도 으슥한 기분이 느껴졌다'고 했다.
그  빈집에 꽃이 피는 계절 사내는 가끔 들러 '폐허의 정원'을 즐겼다. 어느 날, 그 집에 한 중년의 남자가 살기 시작하면서 집에 울타리를 쳐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막았다. 사내는 개울을 건널 때 그 집 마당을 가로질러 가면 얕으면서 폭이 좁은 곳을 건널 수 있어 잡초가 우거진 그 집 마당을 오솔길마냥 다녔는데 이제는 그 길이 막힌 것이다.
달랑 혼자 살면서 남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집에 울타리까지 친 남자가 사내는 얄미웠더란다. 그래서 그 집 앞을 지나면서 울타리를 뚫고 망치질 소리가 들려도 모르는 척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사람이 드문 치악산 산골에서 언제까지나 모른 체 하면서 살기는 어려운 법. 어느 날, 사내는 남자에게 말을 건네고 안면을 트게 되었다. 그리고 내심 서운했던 울타리 이야기를 툭 던지듯 지나가듯 꺼냈다.

"울타리를 없애면 이 산이 모두 내건데 뭐 하러 울타리를 쳐요?"

사내는 남자에게 어떤 대답을 들었을까? 사내는 사람이 얼마나 자기 편한 대로만 생각하는지 남자 때문에 깨달았다고 한다. 남자는 자기 구역을, 자기 땅을 표시하고 사람들이 못 들어오게 울타리를 친 것이 아니었다.
깊은 산속에서 홀로 생활하게 된 남자는 밤이 무서웠다. 밤에 산짐승이나 낯선 사람이 불쑥 들어올 것 같아 두려웠던 남자는 그 두려움을 떨치고 싶어 울타리를 쳤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내는 남자를 이해하게 된다. 그 역시도 처음 산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남자 못지않게 밤이 '두렵고 먹먹하고 막연'했기 때문이다.
사내는 시인 정용주. 그가 화전민조차 떠난 치악산 산속에서 화전민이 남기고 간 움막을 찾아들어가 집안 곳곳에 쳐진 거미줄을 걷어내고, 곰팡이가 피어 있는 방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먼지가 잔뜩 내려앉은 아궁이 가마솥에 걸레질을 한 것은 2003년 7월.
그의 치악산 살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바람처럼 잠시 머무르다 떠나는 여행자처럼 그 집에서 살기 시작했는데, 어느 사이엔가 아홉 해가 훌쩍 지났단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는 바람처럼 정말이지 빠르게 흐른다.
그 사이에 시인은 여행자가 아니라 숲의 생활자로 변신했고, 그와 함께 사는 가족(?)은 늘었다가 줄었다. 그가 함께 사는 가족은 개 두 마리와 닭 두 마리, 그리고 벌들이었다. 처음에는 한 통으로 시작된 양봉은 점점 벌통 숫자가 늘어나는가 싶더니, 올해 엄청나게 쏟아진 비 때문에 벌들이 그의 곁을 완전히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났단다. 하긴 가족도 늘 곁에 있는 건 아니다.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하니.
<나는, 꼭 행복해야 하는가>는 이렇게 치악산 자락을 찾아들어가 살게 된 시인 정용주가 '치악산 살이'를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그러면서도 정감 있게 풀어낸 이야기다.
그 이야기들은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이어지면서 도시에서 삭막하게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 내 마음을 울리다 못해 부럽게 만들었다.
에세이가 아닌 산문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마저 자아내게 하는 시인의 글은 시인이 사는 산골 마을의 풍경을 눈앞으로 고스란히 옮겨 놓아 그 속내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느끼게 했던 것이다.
물론 사내 혼자 사는 산골 삶이 숲속에 피어난 야생화들처럼 그윽한 향기만을 간직할 수야 없다. 남루한 삶은 도시를 떠나 산골로 간다고 해도 이어지는 게 이치이므로.
처음에는 시인도 울타리를 치면서 홀로 사는 두려움을 떨치려고 노력했던 중년 남자처럼 무서움을 타기도 했더란다. 하지만 시인은 살면서 깨닫는다. 실상 무서움이란 실제로 있거나 맞닥뜨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내는 상상의 두려움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물론 깨닫는다고 두려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주는 건 아닐 것이다. 대신 두려움이 사라지게 자신을 설득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을 것, 이라고 짐작한다.
산골에서 살고 싶은 도시인들은 텃밭을 가꾸고 싶다는 희망을 품는다. 그건 산골에 살기 시작한 시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 앞에 텃밭을 가꾸던 시인은 어느 날 부터인가 텃밭에서 손을 뗐다. 혼자 살면서 먹을 수 있는 푸성귀의 양이 얼마나 되겠나. 시인이 먹어치우는 속도보다 푸성귀가 자라는 속도가 더 빨랐던 것. 결국 시인은 텃밭을 내버려두었고, 텃밭은 푸성귀들이 웃자라다 못해 꽃을 피우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결국 시인은 텃밭의 푸성귀들에게 자신이 편한 대로 살고자 치악산 산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마음껏 자랄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한 것이다.
결국 시인은 텃밭이 아닌 산속에서 나물을 뜯고, 푸성귀를 대용할 것들을 찾아낸다. 자연은 수고하지 않아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을 나누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사는데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는 사실을 자연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도시의 삶에 지친 도시인들이 시인처럼 죄다 산속으로 들어갈 수야 없는 노릇이다. 시인도 그걸 안다. 그래서 가끔 도시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시인을 부러워하면서 푸념처럼 늘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떠나지 못한 자의 행복'을 떠올리는 것일 게다.
산속에 산다고 시인이 수도승처럼 속세와 혹은 저자거리와 인연을 완전히 끊은 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시인은 집에 TV를 들여놓았고, 전화도 있으며, 전화선을 이용해 느려터진 컴퓨터도 가끔 이용한다. 뚝 떨어진 곳에 사는 이웃도 있어 가끔 안부를 주고받거나, 방문하기도 한다. 덕분에 시인이 기르는 개가 이웃집 닭들을 죄다 물어 죽이는 일도 생겨, 변상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기도 한다. 시인의 친구나 친지 그리고 생판 모르는 남도 시인을 찾아와 밤이면 달이 한껏 차올라 사람을 취하게 하는 마당에서 한담을 나누고, 삼겹살을 굽고, 술잔을 나누기도 한다.
좋겠다고? 그래서 부럽다고? 그렇게 사는 시인이 늘 좋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도시에 사는 보통 사람들처럼 좋은 날도 있고, 싫은 날도 있고, 답답한 날도 있고, 누군가가 몹시도 그리운 날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시인은 그곳에서 별일 없이 사는데 익숙해지다 못해 완전히 적응한것 같다. 그러니 아홉 해를 내리 살아냈겠지. 그리고 별일 없으면 내내 그곳에서 뿌리를 깊이 내린 야생화처럼 살아가겠지.
도시의 삶이 머리를 복잡하게 짓누른다면, 시처럼 풀어내는 시인의 치악산 살이 이야기를 읽는 것도 좋은 기분전환 방법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내가 그랬다.

나는, 꼭 행복해야 하는가 / 저자 정용주 / 출판사 새움

숲의 생활인이 전하는 행복의 순간들!

<나는 숲속의 게으름뱅이>의 저자인 정용주 시인의 에세이『나는, 꼭 행복해야 하는가』. 이 책은 9년간 치악산 남쪽 산자락을 흘러내리는 금대계곡을 거슬러 올라 해발 700미터에 있는 질아치 골짜기의 움막집 ‘몽유거처’에 살고 있는 저자의 숲살이의 기록을 담고 있다. 도시에서의 삶에 지치고 무력해졌던 저자는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살아보자고 마음먹고 치악산으로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최대한 자신을 풀어놓아 매일 눈뜨면 마주하는 나무와 풀, 새소리 바람소리 짐승의 발자국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흘러가는 봄날의 흙벽에 기대 스스로를 위로하며 무료한 것은 따분한 것이 아니라 평화로운 것이라며 중얼거리기도 하고, 짧은 시간에 놀랍게 집중하는 식물의 생명력에 설레고 감탄한다. 이처럼 사계절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며 있는 그대로의 숲을 느끼는 저자의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준다.
치악산 ‘몽유거처夢遊去處’에서 9년째 살고 있는 남자의 소박하고 유쾌한 숲살이
생에 대한 눈부신 통찰이 그려진 사람 냄새, 숲 냄새 나는 에세이
많은 사람들이 숲속의 삶을 꿈꾼다. 모닝콜 대신 새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시작하고, 자기가 먹을 것은 자기가 직접 재배하며, 맑은 공기를 마시며 하루하루를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데에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숲에서 사는 대신, 잠깐이라도 도시에서의 일상을 벗어나 자연이 주는 위안을 느끼고자 주말마다 산을 찾아 떠나는 이들도 많다. 이런 많은 사람들의 꿈을 현실로 살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여행자’가 아니라 ‘숲의 생활인’이 된 그는 시인 정용주이다.
2003년 7월, 열심히 일해도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는 도시에서의 삶에 지치고 무기력해졌던 그는 도시를 벗어나 치악산으로 갔다. 뚜렷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무엇이 되어야겠다거나 무엇을 해야겠다와 같은 규정이 싫어 떠나온 삶이니 그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살아보자’, 그게 유일한 그의 계획이라면 계획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그의 숲살이는 9년차에 접어들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마당에 달빛을 들여놓고 유리가루 흩뿌린 것 같은 별을 보고 살자, 뭔가 바뀌기 시작했다. 맑은 물과 깨끗한 공기가 열정도 욕망도 식어버렸던 그의 몸과 마음에 생기를 불어넣은 것이다. 때로는 직접 만든 그네에 앉아 먼 능선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방문객이 찾아올 때면 취나물, 당귀잎, 씀바귀 등 산이 준 온갖 나물과 함께 돌판에 구운 삼겹살을 먹으며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몽유거처夢遊去處’라는 이름에 걸맞게 산속에 둘러싸인 그의 움막은 많은 방문객들에게 즐거움과 부러움을 느끼게 했다.
게으르고 싶을 때 게으르고, 부지런하고 싶을 때 부지런한 그를 숲은 가만히 감싸주었다. 그렇게 해가 거듭되면서 이제 그는 한곳을 오래 바라보는 것을 견딜 수 있게 되었고, 어느덧 숲에서 한 생명이 태어나 죽음에 이르는 일생의 과정을 천천히 지켜보는 여유로움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별 생각 없이 그냥 알아지는 것들과 마주하며 살다 보니 머릿속은 단순해지고 마음은 편해졌다. 그는 여전히 숲의 생활인이며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스스로의 뜻대로 사는 그의 단순하고 또 자유로운 삶이 전하는 일상은 그 자체로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준다. 그에게 숲은 잠시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삶의 공간이기에 사람 냄새, 숲 냄새 가득한 글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또한 소박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숲을 느끼게 해주는 사진까지 더해져 숲의 삶을 꿈꾸는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조금 게을러도 괜찮아, 굶어 죽지 않아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은 게 진짜 행복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주, 열심히 ‘행복’을 얘기한다. 행복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행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무엇이 행복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하지 않는 듯하다. 넓은 집에 살고, 비싼 차를 타고 다니면 행복할까?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그게 행복일까? 사람의 마음 상태는 그것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한 가지의 감정만 오래도록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진정 자신이 행복한 순간이 어떤 순간인지는 알지 못한 채 그저 관념으로서만 행복을 체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도시는 모두가 일해야 한다고,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뒤처진다고, 바쁘게 살아야 한다고, 여유는 사치라고 말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남과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고, 그렇게 사는 것이 성공이고 행복한 삶이라고 말이다. 시간에 쫓기는 도시에서의 삶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누구를 위한 삶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답을 찾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아니 그런 질문조차 하지 못한 채 그저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살아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저자는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대신 흙과 나무가 있는 곳을 자신의 거처로 선택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은 맑고 깨끗하지만, 홀로 사는 그의 움막은 적막하고 쓸쓸하다. 그 적막 속에 그가 느끼는 고독마저도 이제는 그의 친구가 되었다. 숲은 봄에는 온갖 나물을 주고 가을에는 열매를 주었다. 조금 게을러도 사람을 굶겨 죽이지 않는 숲에서 그는 자신의 시간을 좀더 스스로가 원하는 곳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고독과 함께 자유도 얻었다. 일하고 싶을 때 일하고, 놀고 싶을 때 놀 수 있는 자유. 가만히 앉아서 물웅덩이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들여다보며 내가 나무인지 물인지 싶은 시간, 나는 나무이기도 하고 또 물이기도 하다는 깨달음 역시 숲의 삶이 주는 선물이다.
행복한가 행복하지 않은가 하는 판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정 ‘나의 행복’이고 ‘내가 원하는 삶’인지 질문하는 게 아닐까? 봄에 씨 뿌리고 가을에 열매를 거두는 농부, 밤이면 노란 종이 등을 밝히고 시를 쓰는 시인, 필요한 물건은 직접 만들어 쓰는 창조적 인간…… 물질에 지배받기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그의 삶. 관념으로서만 존재하는 행복이 아니라 실존을 통째로 사는 그의 삶에, 행복에 가까운 무엇이 있는 것은 아닐까.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저자의 글들은 무엇이 행복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가치 있는 삶인지 우리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나는, 꼭 행복해야 하는가(정용주, 새움. 288쪽. 1만3천원) [연합뉴스] 2011.08.22

산문집 '나는 숲속의 게으름뱅이' 등을 쓴 저자가 치악산에서의 삶을 에세이로 펴냈다. 9년째 치악산에서 사는 저자가 아스팔트 대신 흙과 나무가 있는 곳을 거처로 선택한 이유와 자연 속의 자유로움 등을 전한다.

나는, 꼭 행복해야 하는가(정용주 지음) [대전일보] 2011.08.26

도시에서의 삶에 지치고 무력해졌던 저자는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살아보자고 마음먹고 치악산으로 떠났다. 흘러가는 봄날의 흙벽에 기대 스스로를 위로하며 무료한 것은 따분한 것이 아니라 평화로운 것이라며 중얼거리기도 하고, 짧은 시간에 놀랍게 집중하는 식물의 생명력에 설레고 감탄한다. 이처럼 사계절의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며 있는 그대로의 숲을 느끼는 저자의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준다. <새움, 1만3000원>

정용주 시인 움막을 찾아서/정용진 시인

9월 23일(금)
  충북 진천 맹동을 찾아 13대 선조의 묘가 있는 선산에 성묘하고, 친척들을 만난 후 동생 정용주 시인이 사는 원주 치악산 금대계곡 화전민 집을 찾았다. 가정을 버리고 화전민이 버리고 떠난 깊은 계곡에서 수도승처럼 홀로 사는 막내 동생의 거처를 확인하기 위하여 오르는 산길은 험하기도 하였다.
홍수로 인하여 징검다리가 다 떠내려갔고 다리도 불편한 아내는 발을 벗고 머루 다래 넝쿨을 잡으며 2 킬로메터를 힘겹게 올랐다. 징검다리를 세 번이나 건너야하는 가파른 산길이었다. 혈육이나 집안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산행 이었다.
운반 수단은 알미니움 지개 하나. 이를 등에 지고 식량과 일상 용품들을 져 나른다. 이 사람은 무슨 운명으로 이런 고행을 사서하나 싶어 마음이 찡하였다. 저널리즘의 보도로 등산객이나 시인들이 더러 찾아와 쌀, 간장, 된장, 참기름, 라면 등을 전해준다고 하며 더러는 고기 양념을 하여 가지고와서 식사와 함께 대접도 해주고 간다고 한다. 이웃이라고는 퍽 멀리 염소를 키우며 사는 노 부부 뿐이라고 하였다.
주위에는 낡은 화전민 집과  야생  벌통 몇 개, 물은 산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를 호수로 끌어다  마시고 쓰고 있었다.

산머루
           정용진
꽃사슴도
입 맞추는
숲길 사이로
조각하늘이 열리면

그리움 못 견뎌
고목 등걸을 휘감던
산머루가 익는다.

바람이
세월로 흐르고
세월이
바람으로 흐르는
외진 산록.

길 찾는
너의 옷 빛도
주홍으로 물들고

머루 향에 취한
이 저녁
산 노을이 붉다.  

*이 시는 박환철 작곡가에 의하여 가곡으로 작곡 되었음.

방에는 시인답게 책들이 가지런히 정돈 되어 있고 많은 음악 씨디가 진열되어 있었다. 이런 심산유곡에 전기와 전화가  들어 온 것이 신기롭다.
시인 동생은 힘겹게 찾아간 우리 내외에게 된장찌개와 찬 이 부실한 저녁상을 드리며 멋쩍게 웃는다. 머리는 산발을 하고 어느덧 얼굴에는 주름이 잡혀 있다. 김삿갓 시인이 천하를 방랑하던 중에 가난한 산골 친구를 찾았는데 소반에 멀건 죽 한 그릇을 받고 김삿갓 시인은 “네다리 소나무 소반에 내어놓은 죽 한 그릇에/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떠있도다./ 그러나 주인은 미안하다 말하지 말라,/나는/ 물에 비치는 청산을 사랑하노라/하였다  그 생각이 내게 퍼뜩 떠올랐다.

단풍(丹楓)
        정용진
지금
줄리안 계곡에는
고목 가지마다
옮겨 붙는
불빛이 한창이다.

잎들은
그 영혼이
얼마나 투명하기에

한밤중
별들이 쏟아 놓은
눈빛만으로도
연정의
타는 입술로 저리 붉었는가.

순간을 살아도
영원으로 물드는
나무들의
침묵의 언어들...

서릿발이
영그는 하늘
땅거미가 내리는
어스름

다리를 절고 가는 여인의
발자국 위로
추억이
소리 없이 쌓이고 있다.

*줄리안은 샌디에고 팔로마산자락 단풍이 아름다운 사과동산.

산곡에서 잠이 들었는데 간간이 산짐승 울음소리가 들리고 산밤 알이 지붕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단잠을 몇 번 깨기도 하였다.
우리의 일정이 있어 이른 아침 서둘러 친구가 빌려준 차를 타고 동생 잘 있어. 인사를 나누고 우리 내외는 중앙고속도로. 영동 고속도로를 손수 운전하여 여주 호텔로 돌아왔다. 한 핏줄을 나눈 형제라도 제 갈 길은 서로 다르더라. 마음이 퍽 아팠다. 건강을 빌 뿐이다.
산을 내려오는데 가을 단풍이 홍엽으로 물들이기 시작 하였다.

산울림
             정용진
산에 올라
너를 부르니
산에서 살자 한다.

계곡을 내려와
너를 찾으니

초생 달로
못 속에 잠겨 있는
앳된 얼굴.

다시 그리워
너를 부르니
산에서 살자한다.

산에 올라
너를 부르니
산에서 살자 한다.

계곡을 흐르는
산들바람에

피어나는
꽃송이 송이들의
짙은 향기

다시 그리워
너를 부르니
산에서 살자 한다.

* 권길상. 박환철 선생에 의하여 가곡으로 작곡되었음.

깊은 산중을 차로 헐떡이며 오르다 영원사 입구 나무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새겨진 돌 비석 앞에서 부터는 온통 길이란 게 없고 장마가 저서 징검다리마저 끊긴 험한 산길을 다리도 불편한 아내와 함께 머루 다래 덩굴을 헤치면서 뒤뚱 뒤뚱 10여리 오르니 움막집이 나타났던 기억이 미국 집으로 돌아와서도 자꾸 떠오른다. 과연 정이란 게 무엇인지?

치악산(雉岳山)
          정용
산이 좋아
산을 오르네.

그리움에 취하여
오르는 산길
그 마음 못 잊어
달도 따라 나서고

산심(山心)을 싣고
세렴폭포 뛰어내려 
달려오는 시냇물도
나를 반겨 맞는데

흐르다 쉬어가는 
맑은 소(沼)에는
구룡사(龜龍寺) 선경(禪景)이
병풍을 두르고
그대 마음이
애틋이 고여 있네.

세속의 번뇌를 
아득히 잊고
치악산 비로봉을
오르는 산행

간밤 찬 서리에
타는 연정(戀情)으로
잎마다 저리 붉어
옷깃에 젖어드네.

심산에 홀로 사는 정용주 시인은 당호를 취월당(醉月堂)이라 스스로 정하고 심산에 떠오르는 달은 거저 보며, 몽유거처(夢遊去處) 호접지유 일장춘몽(胡蹀之遊 一場春夢)이라고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고 있는 고독한 시인임을 말해주고 있다. 나의 동생이라도 애처롭고 고고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는 마치 열반에 드신 법정스님의 삶을 닮았다고나할까. 산을 오르는 행객들의 보살핌이 각별 한듯하다. 금대계곡 산중에는 영원사라는 사찰이 있다.

정용주 시인이 사는
치악산 금대계곡 취월당(醉月堂)에서
                                  정용진

낮에는
빈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에 마음을 싣고
밤에는
천공에 떠오른 달빛에 취하여
수림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로
잠을 청하네.

산은 첩첩
물은 굽이굽이
화전민이  버리고 떠난 빈집에서
잠이 오면 자고
배고프면 토종벌집을 뒤지고
나물 캐먹고 물마시며 살려하오.

인적이 드무니
오가는 길도 필요 없고
노래야 산새들이 불러주면 되지요.

새벽잠은
지붕위에 툭툭 떨어지는
산 밤알이 깨워주고
한밤 문풍지 우는소리
자장가로 들으려하오.

천산에 눈이 덮여
산길이 끊겼으니
오늘 밤은
하현(下弦) 달과 대작(對酌)하며
시나 한 수 읊으려하오.
나의 안부는 낙엽에 적어
바람에 띄우오리다.        * 정용주 시인은 나의 막내 아우임.

9월 24일(토) 맑음
아침에 여주로 돌아와 고향 친구들과 여강변에서 여주명물 쏘가리 매운탕에 반주를 들며 옛 벗들과 우정을 함께 나누었다. 아내는  고향여자 친구들과 여주 온천에서 피로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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