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 대동강은 흐른다

2004.08.21 15:52

김항식 조회 수:572 추천:4

단편소설 / 대동강은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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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역사 속에서 언제나 쉼 없이 흘러 온 평양의 젖줄 대동강 -
     대동강은 단군시대에도 흐르고 있었다. 삼국시대에도 흐르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도 흐르고 있었다. 이씨가 나라를 다스렸던 조선시대에도 변함 없이 흐르고 있었다. 일본에게 합병 당하여 나라를 잃었던 36년간의 암흑시대에도 흐르고 있었다. 8.15. 해방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북조선의 인민공화국 체제하에서도 역사의 흐름에는 아랑곳 없이 대동강물은 평양을 가로질러서 유유히 흘러만 가고 있었다
평양사람들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남쪽에서 북상하는 사람들과 북쪽에서 남하하는 사람들이 만나서 오랜 세월 동안 뒤섞이면서 평양사람의 독특한 기질을 이루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지만, 남북분단과 6.25전쟁 같은 큰 격동 속에서 사람들의 뒤바뀜도 심하여, 많은 평양 토박이들이 평양을 떠나서 38선을 넘기도 하였고 해방 직후부터는 평양에서 지금까지 들어 보지 못했던 "아바이" 소리가 많이 들리게도 되었는데, 이런 함경도 사투리가 평양 거리에서 많이 유행하게 된 것도 주민들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고현주는 해방된 그 이듬해 봄 어느날 평양의 모란봉밑에서 흐르는 대동강의 능라도를 옆에 끼고 혼자서 걷고 있었다. 나무그늘에 덮인 모란봉밑 강변도로에는 봄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많이 오고 가고, 그 유명한 평양기생으로 보이는 한복 차림의 여인네들도 저희들끼리 무슨 얘기인지 주고 받으면서 지나가는데, 고현주를 흘낏 곁눈질하면서 하는 얘기는
"끔찍히도 애를 태우게 생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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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주는 북만주 러시아 국경의 어느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자라나고 청년시기를 거기서 보내다가 만주가 쏘련군대의 침공을 받아 일본 관동군이 맥없이 패퇴하자 조선에 피란을 나와서 압록강변의 신의주에서 가까운 어느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만주에서 어린 시절부터 중국어와 러시아어를 익혀 두었던 그는 오늘 평양에까지 먼 길을 나와서 쏘련군 통역관의 시험을 치르게 된 것이었다. 따뜻한 평양의 봄은 내일 시험을 앞두고 그의 발걸음을 자기도 모르게 모란봉으로 향하게 하였으며 또 모란봉을 끼고 흐르는 대동강의 흐름에서 받는 그 무엇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느끼고는 강변을 따라서 강변길을 천천히 거닐게 되었다. 수양버들의 긴 가지들이 낮게 드리워진 그늘진 강변길에는 많은 평양 시민들이 함께 봄을 즐기고 있었다.
고현주의 아버지도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하여 만주에서는 일본 관동군의 통역관을 했었다. 그러나 북한에 피란 와서는 이 사실을 쉬쉬하면서 덮어 두었으므로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일본군에 붙어서 통역질을 하는 동안에 우리 동족에게 무슨 별다른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일본군대에 붙어서 벌어 먹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친일 부역행위 중에서도 가장 심한 종류라는 것이 국민 대다수의 일반 통념(通念)이고 보니, 쉬쉬 하고 시치미를 떼고 조심하면서 조용히 사는 수 밖에 없는 일이었다.
학생시절에 일본말을 배운 것이 죄라고나 할까. 어떤 사람은 한동안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군이 승승장구 중국본토까지 점령해 가고 한국의 독립이 가망 없어 보이자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만주를 점령한 일본군대를 따라다니면서 통역질을 하더니 얼마 안 되어 돈을 많이 뫃아 가지고 장춘(長春)에서 큰 장사를 하여 돈을 더 많이 벌어 가지고 조선에 돌아와 신의주에서 큰 상점을 경영하는 일도 있었던 것이다. 그도 일본군대에 붙어서 벌어 먹으면서 별다른 나쁜짓은 안 했던 모양이었으나 끝까지 독립운동을 하지 못하고 나중에는 일본군대에 붙어서 통역질을 했으니 벌써 독립투사는 못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해방이 되고 자유가 범람하는 대한민국에는 어중이떠중이들이 다 모여들어서 저마다 애국자요 독립투사이니, 일본군대 통역질하던 그 사람도 어느덧 독립투사로 둔갑하여 독립유공자 행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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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주는 평양에 진주해 있는 쏘련군 사령부에서 통역관 연수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자 곧 70리길을 걸어서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나왔던 것이다. 응모생들이 꽤 많았으므로 선발을 위한 면접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고현주는 러시아어의 기초가 꽤 잘 되어 있다는 인정을 받고 통역관 후보생으로 뽑히게 되었고 시험에 떨어져서 집으로 돌아아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얼마 동안의 연수를 끝마치고 고현주는 쏘련군대 통역관으로 정식채용되어 평양 사령부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되었다. 지방의 각 군(郡) 사령부로 배치되어 나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고현주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도 모두 평양으로 데려와서 함께 살게 되었고 새장가도 들게 되었다.
고현주의 첫 번째 결혼생활은 불행하였다.
외사촌의 중매로 어느 장로교회 집사의 여동생에게 장가를 들었던 것이다.
해방후 교회가 보수파와 진보파로 갈라지면서, 보수파에 속한 사람들은 많이 남쪽으로 넘어가고 이북땅에 그대로 남아서 온갖 고초를 겪는 사람도 있고 붙잡혀 간 후 소식을 모르게 된 사람들도 많았다. 소위 진보파에 속한 사람들은 김일성 주석의 외삼촌 강량욱 목사를 따르는 사람들로서 "조선기독교도연맹"이라는 단일조직에 속해 있었고 각 도(道)마다 지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지부에는 월급이 보장되는 서기장인가 하는 한 사람이 사무를 보고 있었고 주일날이면 교회에도 나가고 있었다.
그 조선기독교도연맹 X도지부의 서기장 정갑수 집사의 여동생 말순에게 첫 장가를 들고나서 거기 푹 빠져 있던 고현주는 어느날 서기장의 집에 들려서 거기 가 있는 아내를 만나 보게 되었다. 하루밤을 거기서 아내와 함께 자고 이튿날 아침 고현주는 사흘 동안 볼 일이 있어서 다른 곳으로 떠나고 그의 아내도 남편과 함께 서기장 오빠의 집을 나서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그런데 사흘 예정으로 떠났던 남편은 일에 차질이 생겨서 그 이튿날로 집에 돌아가게 되어 집에 와서 보니, 어제 그날중으로 집에 돌아와 있어야 할 아내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면 어제 아침에 남편과 함께 집을 나선 아내는 어제 밤에 어디서 잠을 잤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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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 대한 별다를 의심을 한다기 보다는 고현주로서는 궁금한 심정이었다. 남편보다 한발 늦게 집에 돌아온 아내를 보자 대뜸
"어제 밤은 어디서 자고 왔소?"
하고 묻지 않을 없었다.
많이 추궁도 안했지만 아내 말숙은 속이 켕기는지 뜻밖에도 어렵지 않게 지난 밤의 일을 털어 놓았다. 집에 돌아오는 기차를 탔는데, 차안에서 전에 처녀시절 직장에 다닐 때
사귀던 남자를 만났다는 것이다.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말숙 자신이 시집 간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왔고 그 남자가 기혼자라는 사실은 전에도 말숙이 알고 있었다. 날은 저물어 가고 조금 있으면 고현주와 함께 사는 집이 있는 곳의 역까지 기차가 도착을 하게 되는데, 그 남자와 말숙 두 사람은 도중의 작은 역에 함께 내려서 부부처럼 나란히 어느 여관에 함께 들어가서 함께 하룻밤을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잍은날 아침에는 두사람이 함께 여관에서 나와 다시 함께 기차를 타고 말숙은 조금 가다가 먼저 내려서 남편의 집으로 가고, 그 남자는 자기 가던 길을 더 갔다.
말숙은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고현주와 함께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 보니, 아직도 며칠이 더 지나야 돌아올 줄 알았던 남편이 먼저 돌아와서 말숙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숙은 깜짝 놀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말숙은 별반 놀라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어렵지 않게 지난 밤의 일을 털어놓는 것이다.
고현주에게는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그는 깊은 고민에 뻐졌다. 그는 아내가 지난 밤에 지낸 일들을 차례 차례로 되풀이하여 묻고 또 물었다. 아내의 잘못을 따지자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일이 어찌 있을 수 있으랴 하는 섭섭한 심정으로 그 일을 하나 하나 구체적으로 되짚어 가는 것으로 이미 저질러진 그 일이 원래대로 회복되어지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진 것이다. 영원히 원래대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아내를 사랑하는 고현주는 말숙을 말 없이 용서하였다. 용서한다는 말 한 마디 없었어도 그대로 용서하였던 것이다. 말숙이편에서도 단 한 마디의 사과도 없었다. 그렇다고 결혼식으로 맺아진 남편을 떠나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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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진 고현주의 마음은 아무도 헤아리지 못했고 위로할 수도 없었다. 아무 말도 없이 입을 다물고만 있는 정말숙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도 헤아릴 길이 없었다.
일정시대에 들었던 고현주의 이 첫 결혼은 그후 딸 하나를 남기고 그만 아내가 병사했는데, 딸의 이름은 일본식이었다. 이름 끝자가 아들 자(子)로 되고 일정시대에 딸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무슨 "꼬"라고 자(子)를 일본식으로 발음하였다. 그 딸 하나도 어느날 디프테리아에 걸려서 죽었는데 병원엘 가도 약도 없었던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평양에서 고현주가 쏘련군 통역관으로 일할 때 새로 맞은 신부는 러시아인 처녀 나따샤. 그녀는 따스 통신사의 특파원으로 평양에 나왔다가 그만 고현주와 사랑에 빠져서 결혼에 이르렀던 것이다.
고현주는 쏘련군 당국의 신임을 얻어서 쏘련공산당의 후보당원이 되었다. 이사실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고현주는 가끔 후보당원증을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자랑하는 일도 있었고 다들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고현주는 쏘련인들과 밤낮 가까이 지내면서 자연히 같은 조선사람들과는 멀어진다는 느낌이었다. 아무나 가입할 수 없는 쏘련공산당의 후보당원이 되고 보니 같은 조선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를 경원(敬遠)하게 되고 친해지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게 되었던 것이다.
고현주는 사실 진짜 공산주의자가 못되었다. 러시아말을 잘 하여 쏘련군대 통역관은 되었지만 공산주의 이론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인들과 가깝게 지내다 보니, 누가 보아도 진짜 공산당원처럼 보이고 아무도 이를 의심치 않게 되었지만, 누구나 그와 잠시라도 개인적으로 접촉해 보면, 그는 그저 보통사람들이 가지는 생각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그저 보통사람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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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주는 쏘련군대의 일원으로 조선에 나온 고려인 장교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 장교 가족들이 모여서 사는 과거 일본인들이 살다 간 집들이 있는 동네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거주하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자연히 본바닥 평양사람들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지고 마치 러시아에서 살다가 조선에 나온 고려인처럼 되어 갔다. 고현주는 니꼴라이라는 러시아식 새 이름으로 쏘련인들 사이에 불려지게도 되었다. 소련군대 안에서는 모두 그를 니꼴라이로만 부르게 되었으며, 또 그는 아내 나따샤의 권고로 모스크바 대학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부부동반하여 함께 러시아땅을 밟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북조선에서는 쏘련군대의 후원으로 인민정부가 세워지고 쏘련군대는 모든 장비를 남겨 놓고 본국으로 철수해 갔다.
모스크바 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고현주와 그의 러시아인 아내는 따스 통신사의 특파원으로 다시 북조선땅을 밟게 되었다. 다시 평양사람이 되어 전에 일본사람들이 살던 동네의그 집에서 살게 되었다. 이웃은 대부분이 역시 쏘련에서 남편 따라 나온 아주머니들과 그 가족들 - 그들은 평양의 일반 원주민들의 눈에는 아무래도 이방인이었다. 쏘련에서 나온 이 고려인들이 가끔 본바닥 평양사람들과 충돌할 때도 있었다.
"아니! 우리가 조선말을 한다고 같은 조선사람인줄 아는가베. 사람 좀 똑똑히 보고 말하라우!"
이것은 고려인 아주머니가 본바닥 평양사람인 이웃 아주머니에게서 무슨 말을 듣고나서 불쑥 내뱉은 말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민족은 한 민족이라도 국적은 엄연하게 다르다. 우리와 같은 핏줄 고려인이면서도 쏘련에 살면서 쏘련국적을 가지고 쏘련군대의 일원으로 나오기도 하고, 민간의 다른 일로 조선에 와서 같은 조선말은 하지만 외국인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같은 민족이라고 함부로 말했다가 무안을 당하는 본바닥 평양 아주머니들이 매우 안쓰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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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주재 쏘련군 사령부의 통역관이었다가 쏘련유학생을 거쳐서 따스통신사의 특파원으로 다시 평양에 온 고현주가 하는 일은 러시아어로 된 통신문을 조선어로 번역하는 일과 가끔 취재를 나가는 일이었다. 고려인 출신의 쏘련 시민들이 북조선 각분야의 요직들에 널리 깔려 있었으므로 대개는 그들과 접촉하여 정보를 얻고 있었다.
고현주의 러시아인 아내 나따샤는 따스통신사에서 정치.경제분야를 맡고 고현주는 교육.문화쪽을 맡고 있었는데, 어느날 고현주는 김일성 대학을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평양에서는 첫째 가는 웅장한 건물이 평양 교외에 우뚝 서 있었지만 아직도 학교 주변에는 다른 집들이 거의 없었고 황량한 들판 저편에 바라보이는 이 대학교 건물 2층의 총장실을 고현주가 노크하자, 김승화 총장이 얼굴을 내밀었다. 김총장은 쏘련모스크바에 거주하던 고려인 출신의 쏘련시민이었다.
"총장 동지 안령하셨습니까?
"아! 따스 통신사에서 오셨군요. 수고가 많소"
고현주는 김일성 대학의 현황에 대하여 이것 저것을 물으면서 열심히 메모를 해 나갔다.
"아! 이런 것도 있습니다. 우리 대학의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한 학교소개서입니다.참고하시지요"
김승화 총장은 한 권의 얄팍한 소책자를 내밀었다. 고현주는 이 소책자를 받아 들고
"아! 이것이면 기사 작성에 참 편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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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 통신사의 일은 별로 바쁜 일이 없었다. 북조선의 신문들에 제공되는 기사들도 그저 공식적인 내용뿐 일반 인민들의 관심거리가 못되었다. 북조선의 신문이라야 정부 기관지격인 "민주조선", 노동당에서 발행하는 "노동신문" 정도였으니까-. 그나마도 노동신문은 당원들에게만 배포되어 학습자료로 쓰여지며 이것을 함부로 버리거나 휴지로 쓰는 일은 엄금되고 있었으니 일반사람들은 노동신문을 구경조차 할 수 없었고 "민주조선"신문만이 일반의 자유로운 구독이 가능하였다.
평양의 신문들에는 사회면 시사가 없었다. 절도사건이나 강도사건 같은 것들은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고 인간이 살고 있는 모습들을 엿볼 수 있는 내용들은 눈을 씻고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김일성 장군의 연설문 같은 것이 신문의 한 면을 온통 뒤덮는 일이 많았고 그래도 구태어 사회면 기사를 꼽으라고 한다면 노동당이나 민주청년동맹이나,직업동맹(남한의 노조) 같은 조직의 활동을 소개하는 글 뿐이었다. 따라서 이것들은 선전선동이나 교양의 자료로서는 많이 이용되었지만 일반사람들이 날마다 새로운 뉴스를 찾아 보기 위해서는 신문이라고 하는 것이 거의 무용지물이었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신문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따스 통신사 특파원의 취재 활동이라는 것도 공식적인 범위에만 멎고 개인적인 자유로운 활동이 전혀 불필요하였으나, 고현주는 가끔 바람도 쏘일 겸 시골에 내려가서 기사 거리는 안되지만 지금까지 몰랐던 사실을 보고 오는 일이 더러 있었다.
고현주는 어느날 먼 시골에 내려갔다가 그곳 농민들이 수십명식 떼를 지어서 집과 농토를 버리고 평양으로 떠나가는 모습들을 보았다. 그들의 인솔자는 어느 공장에서 나온 사람으로 보였다. 공장에서 일할 사람을 모집해 가는 모양이었다.
당시 북조선에서는 모든 지주들의 땅을 몰수하여 모든 땅 없는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해 주고, 37제라는 제도를 실시하여 해마다 농작물의 30 퍼센트만 국가에 바치고 70 퍼센트는 농민들이 가지게 하였으므로 농민 누구나가 아무 걱정 없이 잘 살고 있다고 고현주는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터라 많은 농민들이 집과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 떠나가는 모습들을 보았을 때 무엇인가 큰 문제가 있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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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는 예수교회들이 참으로 많았다. 예수교는 일정시대의 모진 핍박 속에서도 대다수 평양사람들의 정신 속에 기둥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마치 태양이 그 아래 만물에 빛과 열을 골고루 비치듯이, 그리고 태양 아래 존재하는 만물은 싫거나 좋거나 어쩔 수 없이 태양빛 아래서 살아 가듯이 당시 평양을 지배하는 기독교정신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서 같은 것을 주고 받으면서 일본의 강압정치 아래서도 그런대로 자유와 평화를 함께 맛보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검은 먹구름이 짙게 드리우는 암흑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기독교의 영향은 깊고 또 끈질겼다.
북조선이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자 새로 불어 닥친 공산바람에 교회는 또다시 큰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다.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보는 무신론(無神論)이 곧 공산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교리 중에는 경제의 평등등을 가르치는 교훈이 많고 가난한 사람들을 옹호하고 부자들을 규탄하눈 말씀들도 많아서 공산주의와 기독교의 조화 내지는 화해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북조선 김일성 주석의 외삼촌인 강량욱 목사로 대표되는 조선 기독교도연맹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외면하는 가운데 아무것도 성공한 일이 없이 다만 북조선정권의 심부름이나 잘 해온 것 뿐이었다. 말하자면 간판 뿐이지 교회의 연합체라는 아무런 실질적인 내용이 한번도 있어 본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인민정부의 후원을 받는 기독교도연맹 산하의 교회들은 점점 더 시들어만 갈 뿐이었다. 이렇게 되어 가는 것이 당국으로서는 오히려 바라고 있었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기세가 등등하던 예수교회의 기가 꺾여서 고분고분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잘된 일이었던 것이다.
평양의 어머니 교회라고 불려지던 장대현 교회는 지금의 인민대학습당이 자리잡고 있는 높은 장대재 (章臺峴) 언덕 위에서 대동강과 넓은 평양시내를 굽어 보면서 솟아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지고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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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현교회의 목사 김화석은 해방 직후 강량욱 목사측으로부터 기독교도연맹에 들어와서 함께 일하자는 권유를 여러 차례 받았으나 말을 듣지 않았고, 평양주둔 쏘련군 정치사령부 로마넹꼬 소장으로 부터도 많은 압력을 받으면서도 응하지 않고 있다가, 어느날 기독교계의 여러 인사들이 장대현교회에 모여서 기독교자유당 창당대회를 열게 되었다. 그러자 평양의 인민정부 당국은 지체하지 않고 달려들어서 모든 관계인사들을 체포해 갔으며 김화석 목사는 교회당 바로 옆에 있는 사택으로 몸을 피하여 숨어 있다가 곧 발각되었다.
"목사 동무! 집에 숨어 있다고 못잡아갈 줄 알았시요? 어림도 없수다. 어서 가자구요"
김화석 목사는 그날로 곧 붙잡혀서 정치보위부 감방에 수감되었다.
김화석 목사의 아들은 정치보위부가 자리잡은 허술한 건물을 찾아내어 들어가서 아버지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였다.
헙수룩한 막노동자 차림의 장정들이 와르르 몰려 나오더니
"웬놈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난리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김화석 목사의 아들은
"김화석 목사님이 여기 계신다기에 왔습니다"
라고 부드럽게 말하니
"여긴 사람 가두는 곳이 아니요. 잘못 찾아왔소.어서 가 보시오"
분위기가 매우 험악하다고 느낀 김목사의 아들은 다 틀렸다는 판단을 곧 내리고 발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한 두 사람의 미행(尾行)이 뒤를 따른다고 느껴지다가 거리의 골목길을 몇구비 돌고 나서 부터 보이지 않게 되었다.
기독교자유당 창당대회가 기습을 받아 많이 붙잡혀 가고 일부는 도망쳐서 숨기도 하고 38선을 넘어서 이남으로 넘어간 사람들도 더러 있었는데 기독교자유당의 주모자인 김화석 목사에 대한 재판 결과가 어느날 최고인민재판소 문밖에 게시되었다.
<반동죄로 13년 징역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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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변에 화강암을 다듬어서 지은 "백선행기념관"이 최고인민재판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백선행기념관은 아무개라는 이름조차 없는 무식한 시골 할머니의 선행을 기리기 위하여 지어진 건물인데, 이 할머니의 이야기가 이렇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 할머니는 지어진 정식 이름도 없이 그저
"작은 년아 ~~" 로 불려지던 그런 이름밖에 없었고 가진 재산이란 나무 한 그루도 없는 꽤 큰 돌산 하나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웬 일본사람 하나가 할머니를 찾아왔다.
할머니! 할머니가 소유하고 계신 그 돌산을 우리 회사에 파십시오"
할머니가 문득 생각해 보니
......이 왜놈이 느닷없이 찾아와서 나무 한 그루도 없는 돌산을 사자고 하는 것을 보니 무슨 곡절이 있구나.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되지.........
할머니는 만만치가 않았다. 무조건 안 판다고 했다.
아무 쓸모가 없어서 버려 둔 산을 안 팔면 무엇하겠느냐고 그 일본사람은 자꾸만 팔라고 권하였다.
그 일본사람은 할머니의 고집이 만만치 않은 것을 보고는 점점 더 값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요지부동이었다.
마침내 일본사람은 정말 터무니 없다고 생각되는 많은 돈을 주겠다고 했다
드디어 그 할머니는 승낙을 하고 그 산을 팔아서 벼락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때 할머니를 찾아왔던 그 일본사람은 오노다(小野田)시멘트회사의 사장이었다.
그 할머니는 아무 쓸모도 없는 돌산을 가지고 있다가 시멘트 공장을 하는 일본사람에게 큰돈을 받고 팔아서 벼락부자가 된 후 사회를 위하여 선행(善行)을 많이 하였다 하여 그의 사후에 세워진 것이 백선행기념관인데, 가난한 서민 여성으로서 제대로 지어진 이름조차 없이 살았던 백씨에게 이름까지 선행이라고 지어서 <백선행기념관>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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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후 김화석 목사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생사를 아는 사람도 없었다.
쏘련군의 군정(軍政)이 실시되던 시기의 사건이기 때문에 김화석 목사는 쏘련으로 압송되어 세베리아의 어느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다는 소문도 들리고, 쏘련땅에서 가까운 함경북도의 아오지 탄광에서 강제노역을 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었으나 모두 확실하지는 않았다.
기독교자유당에 앞서서 조선민주당이라는 것이 평양에 있었다. 그 주동자 조만식도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교회의 장로이기도 하였다. 조선민주당은 일반민중의 지지를 크게 받아서 당원의 수효도 많았으며 노동당에 버금가는 만만치 않은 세력으로 빠른 속도로 점점 더 커가고 있었으나 북조선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정당을 무조건 탄압만 한다는 것도 보기가 안 좋다고 하여 여러가지로 회유공작도 하였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만 내버려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다급함에서 북조선정권의 제2인자인 최용건 자신이 조선민주당에 입당을 하여 당의 수뇌부를 점령하였다. 그 뒤를 이어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많은 사람들이 다만 조선민주당을 와해시킬 목적으로 조선민주당에 몰려 들어가서 설치게 되니 조선민주당은 정당구실을 제대로 할 수가 없게 되어 안으로 무너지고, 조만식 장로도 축출되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오고 남조선 당국에 체포된 이주하, 김삼룡등 남노당의 인사들과 조만식을 맞바꾼다는 소문도 들리다가 흐지브지 되고 말았으며, 쏘련군이 철수해 간 후 북조선은 점점 국가의 체제를 갖추어 가면서 나라 이름도 "조선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하여 한반도 전부를 그 영역에 포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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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길거리에는 차차로 인민군의 군복을 입은 군인들의 모습이 많이 눈에 띠게 되었다. 그 입은 군복들은 참으로 멋져 보였다. 아무래도 외국에서 수입된 고급천인가 싶었다. 쌀을 외국에 팔아 가지고 그 돈으로 사온 것이라는 말도 떠돌았다. 아무튼 평양 시내를 활보하는 군인들의 모습은 참으로 멋지고 당당해 보였다.
어느덧 1950년의 6월! 6월은 바로 6.25전쟁이 터진 운명의 달이다.
6.25. 전쟁이 터지기 직전, 평양의 신문과 라디오는 날마다 평화통일을 외치고 남쪽과는 어떤 교섭이 되어 가고 있다는 보도가 발표되면서도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어떤 전쟁의 냄새가 감돌고 있다는 그런 분위기였다.
그런데 6월 25일 새벽 남조선 국방군이 먼저 갑자기 38선을 넘어서 북조선으로 쳐들어왔기 때문에 영용(英勇)한 인민군대가 지체 없이 반격하여 38선 이남으로 격퇴하였으며 계속 밀고 내려가서 서울에 육박하고 있다는 라디오의 뉴스와 함께 신문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리고 계속 발표되는 뉴스들에는 인민군 부대가 서울에 입성하는 사진들과 함께 인민군대가 서울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는 사진들이 평양 시민을 들뜨게 하였다.
그리고 인민군은 계속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서 경상남도만 남기고 전라도쪽은 완전히 점령했다는 소식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부산 뿐이로구나"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다는 보도가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평양의 하늘에는 미국 비행기들이 새까맣게 떴다. B29라 불리는 폭격기의 편대들이었다. 사람들이 쌕쌔기라고 보통 부르는 미국 전투기들은 하늘 낮게 떠서 쏜살같이 오가고 높은 하늘에서는 하얀 구름 같은 것을 꼬리로 뿜으면서 파도처럼 밀려 오고 밀려 가는 B29 폭격기들이 폭탄을 수도 없이 떨구었는데, 평양은 하루 하루 쑥밭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평양 한 복판에 위치한 장대현 고개 위에 우뚝 솟아서 비행기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발견되었을 장대현교회는 무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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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쟁이들이 많은 미국사람들이 교회라고 알고 일부터 비켜 가는 것이라면 폭격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어느날 인민군대에서는 장대현교회당을 접수하여 군인들이 교회당 안에 꽉 들어차게 되었으며, 교회 사택까지 군인들이 접수하여 김화석 목사가 당국에 체포되어 간 후 남아 있던 목사의 가족은 사택을 떠나서 다른 곳오 옮길 수 밖에 없었다. 평양 시내 낮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었던 서문밖교회(西門外)는 미국 비행기의 폭격을 맞아서 온통 부서졌다.
본바닥 평양시민들은 대부분 시골로 소개(疏開)를 나갔는지 시내에는 빈집이 수두룩하였다. 큰길에는 사람들의 왕래도 드물어지고 유일한 대중교통수단인 전차(電車)만 가끔씩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민주청년"이라는 잡지사도 편집부는 미군의 폭격을 피하여 평양의 변두리 작은 개인주택으로 옮겨 가고 인쇄소는 더 멀리 평양 교외의 "대타령"이라는 시골의 밭 한 구석 낮으막한 판자집에서 기계를 돌리는데 편집부에서는 먼 그곳까지 걸어 가서 원고를 주고 교정(校正)을 보았다. 평양에 대한 미군의 폭격은 그칠 줄을 몰랐으나, 평양 변두리 민가로 옮겨 간 편집부는 무사하였고 시골 외딴 밭 한 구석으로 옮겨 가 있는 있는 작은 판자집 인쇄소도 무사하였다.
얼마 안 있어서 미국의 육상군이 인천에 하륙(下陸)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던 인민군은 보급로가 끊어진 셈이었다. 그후부터는 더 이상 승리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고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한다는 예정에는 차질을 가져온듯 싶었다. 평양 시내를 벗어나서 "민주청년" 잡지사의 인쇄시설이 소개(疏開)나가 있는 "대타령" 시골쪽으로 업무연락차 나갔던 편집부사람들은 몹시 피곤해 보이는 인민군 병사들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절뚝거리면서 남쪽 길을 걸어서 오고 있는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그 병사들이 입고 있는 군복은 허옇게 빛이 바래고 너들너들 해어지고 전에 평양 시내에서 늘 보아왔던 멋진 당당한 복장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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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이 인민군에게 점령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 채로 8월 15일도 지나고 9월도 지나고 어느덧 10월이 되었다. 남북전쟁이 터진지 어언간에 3개월이 지난 것이다.
10월달에 들어서자 중요한 기관들이 평양을 철수하여 북쪽의 오지(奧地)로 피란을 가는지 몹시도 분위가 어수선하였다. 평양에 주재하던 쏘련의 따스통신사도 본국으로 철수해 가고 고현주 한 사람만 남았다. 고현주의 러시아인 아내 나따샤도 모스크바로 떠나 갔다. 후일 남편과는 거기서 다시 만날 약속을 남긴 채 헤어졌다. 그들 사이에는 아직 자식이 없었다. 고현주의 부모형제는 모두 평안도의 시골로 폭격을 피하여 떠나간지도 오래되었으며, 혼자만 남은 고현주는 어쩐지 해방감 비슷한 것을 느끼면서 집도 기림리 변두리의 작으마한 단칸방으로 옮기고 혼자서 평양 시내 여기 저기를 돌아다기도 하였다. 혼자서 모란봉 위에 올라가서 전쟁과는 상관 없이 유유히 흘러 가는 대동강 물을 바라보면 지금까지 지내온 세상만사가 다 꿈같게도 생각되었다.
그는 그저 살기 위해서 지금까지 일도 하였고 공부도 하였고 그저 살아가려니 결혼도 하였고 세상 물결 흐르는 대로 따라서 흘러 가다가 지금은 또 많은 사람들이 남으로 북으로 갈팡질팡하면서 뛰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기 한 사람만 동떨어져서 외톨이가 되는 묘한 기분을 만끽해 본다.
미공군의 파상공격(波狀攻擊)이 날마다 되풀이되는 가운데서 사람들은 이제 만성(慢性)이 되어 버렸는지 갈 곳도 없어 그대로 평양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두려움도 잊어 버리고 서서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다. 평양 거리가 폭격을 맞고 있는 것을 마치 자기와는 상관이 없는 남의 일을 보듯이 아무 감정도 없이 구경을 하고 있다. 하기야 구경거리라면 이보다 더한 구경거리도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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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9일의 이른 아침인가
지난 밤에는 지금까지는 멀리서만 들려 오던대포 소리가 유난히도 가까이에서 들려온다고 생각했더니 새벽녘부터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총소리가 콩 볶듯이 계속 들려 오다가 이욱고 잠잠해졌다.
아침에 고현주는 무심코 창문틈으로 밖을 바라보고 깜짝 놀랐다. 집앞 골목길 어구에는 남조선 국방군의 한 병사가 온 몸과 철모에도 나뭇잎으로 위장을 하고는 총검을 들고 서서 사방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벌써 남조선 국방군이 평양을 점령한 것이다. 그래서 사방이 쥐죽은 듯 고요했던 것이다.
평양의 온 거리는 아주 조용하였다. 빈 전차들만 오고 가던 큰 거리에는 어디서 갑자기 솟아 나온 사람들인지 많은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왕래하고 있다.
길거리를 왕래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국방군의 군복 차림을 하고 있는 사랃들도 섞여서 평상시나 다름이 없는 표정으로 오가고 있다.
고현주는 소련군 사령부에서 통역일을 하면서 쏘련공산당 후보당원까지 되었지만 그후 얼마 안되어 유학을 가게 되고 정식으로 당원이 될 좋은 기회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이럭 저럭 후보당원의 자격도 잃고 말았다. 조선노동당에 입당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조직에서 떨어져 생활하는 가운데 점점 고독한 신세가 되고 말았으며, 원래가 공산주의 사상에서 거리가 멀었고 정치에도 별 관심이 없었던 터라 전쟁 말기가 되어 노동당원이라면 거의가 평안북도 강계(江界) 쪽으로 조직적인 철수를 해 가는데도 끼이지 못하고 혼자 떨어져 있다가 국방군의 평양 입성을 보게 된 것이 그의 기구한 운명이라면 운명이었으며 그의 인생에는 크나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쏘련군을 일상적으로 가까이 대해 왔고 인민군을 늘 가까이 보아 왔던 그로서는 이제 난생 처음 새로 만나게 되는 남조선 국방군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스스럼 없이 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라고 하였던가. 고현주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이 새로운 환경에 조금씩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었다.
국방군의 평양 입성후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10월도 다 가고 11월도 어느덧 저믈어서 12월초가 되었을 때,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서 한국전쟁애 참전하였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평양사람들의 인심은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유엔군이 평양을 철수를 한다는 소문도 들리더니 12월 4일 밤에는 요란한 폭파음이 사람들의 잠을 깨우고, 이튿날 5일이 되자 보따리 보따리를 이고 지고 집을 나서 남쪽을 향해 피란길에 오르는 사람들의 물결이 온 평양의 거리를 메우게 되었다. 이 군중의 물결을 바라보는 고현주의 발걸음은 자기도 모르게 군중의 흐름을 따라서 대동강변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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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물은 언제나 변함 없는 그 모습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흘러 가는 저 대동강물을 바라보고는 깊은 정감을 느끼면서 시를 읊조리리는 사랃도 있었으리라. 희노애락에 마음이 들떠서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소리치는 사람도 없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고현주의 마음은 흘러가는 대동강물을 볼 때마다 그저 그러하였다. 별 감회도 없는 듯 싶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서는 같은 대동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마음속을 흐르고 있는 이 강물의 흐름이 분명히 느껴지면서 마치 가는 세월을 바라보듯이 그저 담담해지는 느낌 이었다.
대동강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 서서 강을 건너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어제 밤에 폭파되어 끊어진 철교는 저 멀리 하류쪽에 보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옥신각신하고 있는 상류쪽은 유엔군이 평양에 입성할 때 작은 배들을 강물 위에 한 줄로 연겨시켜서 띄워 놓고 그 위에 판자를 깔아서 만들었던 부교(浮橋)가 있는 곳이었는데, 이것도 어제 밤에 유엔군이 철교를 파괴할 때 함께 파괴하여 끊어진 것을 사람들이 마구 달려 들어 엉금엉금 기어 올라서 간신히 강을 건너가고들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개미처럼 다리에 달라 붙고 줄줄이 기어서 가는 모습이 눈물겹가도 하고 실로 가관이었다. 힘이 없는 아이들이나 늙은이들은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할 아비규환 바로 그것이었는데, 저 하류쪽을 바라보니 끊어진 철교의 그 높다란 난간을 다람쥐처럼 기어서 오르내리며 결사적으로 다리를 건너고 있는 젊은이들도 보였다.
고현주는 대동강을 꼭 건너야만 된다는 조바심도 없었다. 남들이 다 건너가니 나도 건너가야지 하는 군중심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고현주는 어느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군중들 틈에 끼어 부교의 끊어진 저편 부분에 두 팔을 뻗어 매달려서 기어 오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윽고 고현주는 대동강의 강북땅에서 선교리라고 하는 강남땅을 밟게 되었다.여기서부터 서울까지는 계속 육로이다. 마지막에 임진강이 있기는 하여도 물이 줄어든 겨울철에는 도보로 건널 수가 있다. 얼어 붙은 다음에는 더더구나 건너기가 쉽다.
남행길에 오른 고현주는 문득 고개를 돌려서 여전히 흘러만 가는 대동강을 바라보았다.
고현주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잘 있거라 대동강아. 언젠가는 다시 보는 날이 오겠지. 잘 있거라. 대동강아"
남쪽으로 향하는 피란민의 행렬은 서울까지 그냥 이어지고 있었다.
기다려 주는 아무도 없건만 대한민국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만 가는 고현주의 가슴 속에서도 대동강물은 그냥 흐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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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한국문학방송국에 초대합니다 한국문학방송국 2005.02.10 100
49 송상옥 회장님께 장영우 2005.02.08 201
48 한국 디지털문학도서관 완성의 해 한국문학도서관 2005.02.01 568
47 미주문학 2005년 봄호 원고 마감 장태숙 2005.01.27 93
46 신임 재미수필문학가협회 회장 박영보 2005.01.26 155
45 미주문학 회원 여러분께 인사 올립니다 남유정 2005.01.25 123
44 여기는 밴쿠버입니다. 강숙려 2005.01.16 113
43 장효정 회원 시집 출판기념회 조만연 2005.01.12 92
42 제4회 전북pen작촌문학상 및 제2회전북예술문학상 시상식 안내 김학 2005.01.11 195
41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Josef Suk의 Vitalli Chaconne 와 함께) 미문이 2005.01.11 279
40 문학서재 회원으로 배경음악을 사용하시는 분들께.. 미문이 2005.01.08 504
39 조만연 선생님의 안내로 처음 방문했습니다 김학 2005.01.06 113
38 안녕하세요. 서울에 있는 청동거울 출판사입니다. 청동거울 2005.01.05 473
37 새해 인사드립니다. 김길수 2004.12.27 101
36 미주시인협회 회장 이재학씨의 미주한국일보 투고를 보고 이청 2004.11.24 471
35 [긴급]올해 지원사업 관련입니다. secret 문예진흥원 국제교류팀 2004.11.23 6
34 (환)다음 카페<전국문인사진센터>(영) 김동권 2004.12.16 477
33 이정아 수필집 <낯선 숲을 지나며> 출판기념회 안내 회원 2004.11.18 154
32 성탄절 아침에 안부 여쭙습니다 이승하 2004.12.24 161
31 아름다운성탄! 임성규 2004.12.23 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