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고국 8도 기행.2/ 정용진

여행은 떠도는 구름과 같이 흘러가는 물결처럼 행운유수(行雲流水)의 낭만이 깃든다. 오늘은 동쪽에서 밥을 먹고, 내일은 서쪽에서 잠을 자는(東家宿 西家食)나그네의 행보는 고통이자 기쁨이요, 보람이자 행복이다. 앉은 유식자보다 떠도는 무식자가 더 유명하다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는 아내와 함께 팔도강산을 유람한다는 흥분된 마음으로 고향 여주로 향하였다. 친구와 동반 여행을 위해서다. 서울을 시발점으로 이 방향으로 처음 여행을 하시는 분에게는 지나는 길에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을 찾는 것을 권하고 싶다. 남한산성은 우리 민족의 영욕이 점철된 곳이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은 경기도 광주시, 성남시, 하남시에 걸쳐 있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하는 산성이다. 병자호란 때 조선의 왕 인조가 청나라에 대항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19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공원화된 후 현재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많은 시민들이 찾는 장소가 되었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삼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때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기도 했던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이 세운 성으로 알려졌으나, 신라 시대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 시대에 인조와 숙종 때에 각종 시설물을 세우고 성을 증축하여 오늘날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직전인 1907년에 일본군에 의해 다수의 건물이 훼손되기도 하였다.
1963년 1월 21일 남한산성의 성벽이 국가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고, 1971년 3월 17일 남한산성은 경기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제158호), 5년 후인 1976년 7월 1일 관리사무소가 개소되었다. 1999년에는 남한산성 역사관이 개장하고, 2010년에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침입을 받고 왕족들은 강화로 피하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으나 청나라 군사들의 만행이 심하고 날짜가 길어지매 청에 항복을 하고 화해하자는 주화파 최명길 일파와 끝까지 저항하자는 주전파 삼학사의 대결 끝에 결국 임금이 삼전도에 나가 청 태종(홍타이지)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하니 삼학사들은 청국에 인질로 잡혀가서 종래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때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함께 인질로 잡혀갔다 돌아왔는데 후에 소현세자가 죽으매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후일 효종이 되었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은 1570년에 태어나 병자호란 때 최명길 등 주화론자에 앞서 척화론을 주장하며 청에 볼모로 잡혀가는 두 왕자와 홍익한 오달제 윤집 삼학사의 극한상황을 보며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서를 찢으며 청나라로 잡혀가면서 죽음을 마다한 비장한 각오로 시를 읊기를...

"임금의 욕됨이 극한에 이르렀는데
신하의 죽음이 어찌 더딘 가 목숨을 버리고
의(義)를 취한다 하더니 바로 지금이 그때인가  노라.“

임금을 모시고 투항하는 건 내 진실로 부끄럽네,
한칼로 인(仁)을 얻으리니 죽음은 집에 돌아가는 듯 여겨지네.“

라는 각오로 청나라에 잡혀 가면서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애국시를 남기고 고국을 떠났다.
그는 뒤에 풀려 노구를 이끌고 고국으로 돌아와 학가산(鶴駕山)골짜기에 목석헌(木石軒)이라는 초옥을 엮고 은거하였는데 많은 신하들이 상소하여 숭록대부(崇錄)대부를 하사하려 하였으나 끝내 사양하였다.
끝까지 항복을 아니 한 삼학사 홍익한 오달제 윤집은 한 관속에 넣고 톱으로 켜서 죽였다하는데 그들이 유서로 남긴 시한수가 전해오지 아니하여 어기에 옮길 수 없으니 필자도 마음이 아프다. 다시 서울 근교의 역사적 명소 강화도를 찾아보자.
강화도는 한국에서 3번째 큰 섬으로 지금은 다리의 연결로 육지가 되었다.
몽고병 왜군 불란서군 등 외침이 있을 때마다 조정의 피난처가 된 섬이다. 한번 둘러 봐야할 곳이다.

강화도(江華島)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의 북서부 황해에 있는 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속해 있다. 강화대교와 초지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어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인돌 유적지와, 단군왕검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다는 삼랑성과 참성단과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성당인 성공회 강화성당이 있다. 화도의
동막리 유적과 하점면 삼거리 유적 등에서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다량 출토된 것으로 보아 강화도에는 신석기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에서는 특히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을 쉽게 볼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인돌이다. 100여 기 이상의 고인돌이 강화도에서 확인되고 있는데,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 혼재하는 것이 큰 특징이다. 고인돌의 대부분은 고려산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많은 수의 고인돌 때문에 마한의 소국들 중 하나가 강화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강화도는 한강의 관문이라는 특성상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주요 접전지중 하나였으며, 관미성의 위치가 강화도 부근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강화도를 서해 대도라고 불렀다. 백제가 고구려에 패하고 난 후에 강화도는 고구려에 귀속되었는데, 이때 강화도는 혈구군, 혹은 갑비고차 군에 속하게 되었다. 신라에 귀속되었을 때는 해구군 혹은 혈구진이라고 했다. 또한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국시대에 강화도는 혈구도라 불리었다. 신라 후기에는 황해도 남부와 함께 해적이 자주 출몰하던 지역이었다.
고려시대부터 강화도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양광도 강화면에 속하게 되었다. 강화도는 벽란도의 통로 역할을 했으며, 목판인쇄소, 소금 전매소 등이 설치되었고, 도자기를 생산하였다. 몽골 제국과 전쟁했을 때는 도읍이 강화도로 옮겨졌고, 이곳의 목판 인쇄소에서 팔만대장경 조판이 이뤄지기도 했다.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후에는 강도(江都)라 불렸는데, 강도의 왕궁터와 고려시대의 성곽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또한 강화도 천도 이후 식량의 자급력 향상을 위한 간척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국난 극복을 위해 강화도 남쪽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았다. 개경 환도 이후에는 배중손을 중심으로 삼별초가 항몽정권을 강화도에서 수립했으나, 곧 진도에 남하했다. 이후 조선 시대에는 강화도가 수행하는 국방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태종 때 강화는 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조운의 활성화와 함께 한강의 입구로서 진이 설치되고 김포, 양화, 통진, 교동 등지의 진을 통괄하게 되었다. 강화부사는 경기 병마절도사가 겸임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강화도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고, 우성전, 김천일 등이 의병장으로 활동하며 권율 장군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한편, 강화도는 유배지로도 유명했는데, 연산군, 광해군 등이 이곳으로 유배를 왔었다.

정묘호란 때에는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였었다. 이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남한산성에, 봉림대군 등의 왕족들은 강화도로 피신했는데, 청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도 항복하였다. 이후 남양에 있던 경기수영이 강화도로 옮겨졌다. 효종 때에는 북벌 정책을 계획하면서 해안에 월곶진, 제물진, 광성보 등의 진과 보를 설치하였고, 성곽을 수리했다. 숙종은 해안 전역의 돌출부에 53개의돈대를 설치하여 강화도의 전 지역을 요새로 하였고, 지금도 이렇게 만든 조선시대의 군사시설이 많이 남아 있다. 또한 양명학으로 유명한 정제두가 강화도에서 일생을 보내면서 주자학에 치우치지 않고 경전의 본뜻을 중시하는 강화학파라 불리는 학풍이 일어났다. 정조 때에는 외규장각이 강화도에 설치되었다.
조선 후기 병인박해를 구실로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로 쳐들어 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강화의 외규장각이 약탈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1871년에는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신미양요가 일어났고, 큰 피해를 입었지만 미국 함대를 몰아냈다. 1875년에는 일본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하여 운양호 사건을 일으켰으며, 그 다음해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문화재가 약탈당했고 무덤은 도굴되었다. 광복 후에도 관리 소홀로 군사 유적이 대부분 파괴되었고, 섬 내의성들도 파괴된 정도가 심해서 성의 크기조차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강화도에서 대규모 학살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강화 양민학살 사건) 또한 개성에서 피난민이 강화도로 오면서 인삼재배가 시작되었다. 1970년에는 강화대교가 건설되면서 육지와 연결되었.다. 1976년에 강화중요국방유적복원 정화사업으로 몇몇 유적들이 복원, 관리되고 있다. 2000년 11월 29일에는 제24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강화의 고인돌이 고창,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전등사(傳燈寺)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의 정족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정족산성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대웅전, 약사전, 범종 등 대한민국의 보물이 소장되어
있다. 경내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정족사 사고가 있다.
고구려 시기부터 사찰이 세워져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고 중수되었다. 전등사란 이름은 고려 후기 충렬왕때 붙여진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광해군 때 중수된 것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인 381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현존하는 한국의 사찰 중 가장 역사가 길다. 아도화상이 처음 절을 지을 때는 진종사(眞宗寺)로 명명했다.
고려 고종 46년인 1259년에 진종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으로 다시 기록에 등장한다. 고려는 1232년부터 1270년 사이 강화도에 임시 도읍을 정했다. 1266년 진종사는 크게 중창되었으며, 충렬왕 8년인 1282년 충렬왕의 왕비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전등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뜻한다.
고려 왕실은 전등사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계속해서 중수가 이루어졌으나, 조선 광해군 대에 이르러 화재로 건물이 소실되어 1621년 재건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마니산 사고가 병자호란으로 훼손 된데다 효종 4년(1653년) 화재로 소실되자 1660년 전등사 경내에 정족산 사고를 설치하고 실록을 보관하게 하였다. 정족산 사고는 적장산, 오대산, 태백산과 함께 조선 후기의 실록 보관소가 되었다. 1707년, 강화 유수였던 황흠은 사고를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이라 이름 하였다. 그때부터 정족산 사고는 실록은 물론 왕실의 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로 정해졌다. 1726년에는 영조가 직접 전등사를 방문해 ‘취향당’ 편액을 내렸고,  1749년에는 영조가 시주한 목재를 사용해 전등사를 중수하였다.
한때 한용운과 만공의 상좌인 춘성이 주지로 근무하기도 했다. 또 서울 근교의 명소로 남양주의 광릉(光陵)과 다산 유적지를 빼놓을 수 가 없다.
  
  광릉(光陵)은 조선 제7대왕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尹氏)의 능이다. 사적 제197호로, 경기도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다.
1468년(세조 14년)과 1483년(성종 14년)에 정하였다. 이 능은 세조가 석실의 유해무익함을 강조하고 석실과 병석(屛石)을 쓰지 말라고 한 유명(遺命)에 따라 병석을 없애고 석실은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꾸몄으며, 십이지상을 난간동자석주(欄干童子石柱)에 옮겨 새겼다. 회격으로 바꿈으로써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했으며, 능 배치상에 있어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이 여기서 비롯되었는데 이로써 국초 왕릉제의 일대개혁을 이루었다.
광릉은 숲길이 아름다워 수목원으로 지정되었다. 보호조 크낙새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어느 숲길에 비해도 빠지지 않는 아름다운 숲이 동산이다.
남양주에는 다산의 묘와 기념박물관 등 유적이 집대성 된 ‘다산 유적지’가 있다.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어 자녀들과 동행하면 교육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 이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년 8월 5일(음력 6월 16일), 경기도 광주 ~ 1836년 4월 7일(음력 2월 22일))은 조선 정조 때의 문신 호는 사암(俟菴)· 탁옹(籜翁)· 태수(苔叟)· 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 다산(茶山),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유배 생활 중 대부분이 저술된 《여유당전서》가 있다.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과 인척관계이기도 하다.
1762년 음력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난 후 진주 목사를 지낸 부친 정재원(丁載遠)에게서 수업하였다. 정재원은 첫 부인 의령 남씨와 사이에 큰아들 약현을 낳았고, 둘째 부인인 고산 윤선도의 오대손녀인 해남 윤씨와 사이에 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딸 한 명을 낳았으니 약용은 넷째 아들이다.
일곱 살 때에 '산'이라는 시를 지은 것이 남아있는데, 열 살 이전의 어린 시절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이라는 책을 내었다. 9세 때 모친상을 당해 맏형수 경주 이씨와 서모 김씨의 손에서 자랐다. 어릴 적에 천연두에 걸렸으나, 왕족 출신의 명의 이헌길의 진료로 살았다. 정약용은 훗날 이헌길의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을 집필하고, 이것은 현대 의학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조선의 생명들을 구한다. 또한 정약용은 이헌길의 생애를 다룬 〈몽수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1776년에 승지 홍화보의 딸 풍산 홍씨와 혼인하여 6남 3녀를 낳았으나 생전에 4남 2녀를 잃었다. 누님의 남편으로 여섯 살 위인 이승훈, 큰형의 처남이며 여덟 살 위인 이벽과 친하게 지내면서 학문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과 매부 이승훈을 만났다. 이승훈은 조선에서 최초로 천주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가환은 이승훈의 외삼촌이었으며, 성호 이익(1629~1690)의 종손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인물이었다. 이들에게서 성호의 학문을 접하면서 실학사상의 토대를 다졌다.
서울에서 여주에 오는 길은 양평을 경유하여 오는 길과 경기 광주 이천을 경유하여 오는 길이 있는데 양평을 지나오면 수종사와 용문사의 두 명찰을 볼 수 있다.
한편 의정부 북쪽으로 양하면 경기 금강산이라는 소요산이 있고 좀 더 북쪽에는 산수가 아름다운 산정호수가 있다. 포천은 이동 막걸리로 소문이 난 곳이다.

산정호수(山井湖水)는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산정리에 위치한 인공 호수이다. 본래 산 위에 들어섰다. 1977년 3월 30일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승용차로든 대중교통편이든 모두 접근성이 좋아 연간 70만 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수영장, 볼링장, 사우나 시설을 갖추고 있고 최근에는 눈썰매장 및 스케이트장이 개장되어 사계절 관광지로 손색이 없다. 수심 23.5m, 면적은 7만 8,000여 평에 이르고 기암괴석의 명성산의 그림자가 호수에 비치는 등, 산이 배경을 이루는 주변 경관이 아름다워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빼어난 산책로를 거니는 낭만이 있는 곳이다. 봄의 신록, 여름의 녹음, 가을의 단풍, 겨울의 얼어붙은 호수 등 사계절 운치가 있다.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걸어가 평강식물원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숙박시설과 놀이시설 등의 행락지의 이미지를 강하게 풍겼던 이곳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그 면모를 달리하였다.

산정호수(山井湖水/   정용진    

흐르는 세월 머물러
천년햇살 빛나고

갈 바람 멎어
산 그림자를 담는
너는
하나의 거울

하늘기려
솔개보다
깊푸른 눈매로
가냘픈 멧새의
숨결에도
가슴 떨어
붉게 물드는 마음이여.

내 뜻 청산되어
너를 품어
태고의 신비를 묻는
가을 한낮

초연한 걸음으로
산을 넘는
한줄기 푸른 구름.

수종사(水鍾寺)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로, 남양주시 조안면의 운길산 중턱에 있다. 한강이 바라다보여 전망이 시원한 곳에 지어져 있다.
신라 시대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나 자세한 연혁은 알 수 없으며, 조선 세조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세조가 지병 치료를 위해 강원도에 다녀오다가 양수리에서 하룻밤을 보내던 중, 은은한 종소리가 들여오는 곳을 찾아가 보니 토굴 속에 18 나한상이 있고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종소리를 내더라는 것이다. 이에 세조가 18 나한을 봉안해 절을 짓고 수종사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전설이다. 그러나 사찰에 세조의 고모인 정의옹주의 부도가 남아있는 것은 그 이전에 이미 상당 규모의 절이었음을 시사해, 이 전설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19세기에 중건한 기록이 있으며, 한국 전쟁 때 피해를 입어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현대에 다시 지은 것들이다. 전망대가 있어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인 양수리 풍경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삼정헌 이라는 이름의 다실에서는 차를 마실 수 있다. 아담한 규모의 절이며 경내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된 팔각오층석탑과 제157호인 조선 세종 21년에 세워진 부도가 있다. 세조가 중창할 때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은행나무 두 그루 남아 있다.

수종사(水鍾寺)/   정용진

흰 구름이고
실안개 드리운
운길산(雲吉山) 수종사(水鐘寺)
수선(修禪)의 물종소리
빈 가슴에 채우며
두 물 머리에서
두 몸 하나 되어
한양으로 떠나가네
만남의 인연이하 귀하여
칠흑 중천을달(月)로 떠서
조석으로애틋이 모은 정성
샘(泉) 속에 담았나니
겁(劫)의 세월을
침묵의 체로 거른
법수(法水)를 길어 올려
차를 다리면
달과 산과 세월을 벗하여마시는
법다(法茶)의 진미시(詩), 선(禪), 다(茶), 삼정
헌(三鼎軒)을가득 채우는차의 그윽한 향기.

수종사는 양수리 운길산 중턱에 있는데 양수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의 합류하는 지점으로 ‘두 물머리’라고 부른다.
수종사에 올라 삼정헌(三鼎軒)에서 차를 마시면서 눈앞에 일망무제로 전개된 ‘두 물머리’ 정경을 바라보노라면 환상에 이른다. 등정을 권한다.

용문사(龍門寺)는 경기도 양평군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로, 양평군 용문면의 용문산 자락에 있다.
신라 신덕왕 2년인 913년에 승려 대경(大境)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다른 설에 따르면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행차하여 직접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려 우왕 4년인 1378년에 지천(智泉)이 개풍군 경천사에 있던 대장경을 이곳에 옮겨 봉안했다.
조선 세종조 29년인 1447년에 세종의 둘째 왕자인 수양대군이 어머니인 소헌왕후 심씨를 위해 보전을 다시 지었다. 수양대군은 왕이 된 뒤 왕명으로 용문사를 중수하도록 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 이후 여러 차례 중창했으나, 대한제국 순종이 왕위에 오른 1907년에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의병 운동이 일어나면서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워버렸다.
1900년대부터 차츰 중건하여 남아 있는 건물은 대부분 현대에 새로 지어진 것들이다.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이 친히 행차하여 참사하였다고 한다. 고려 우왕 4년(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년(1480)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1893) 봉성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 원년(1907)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들이 불태웠다. 1982년 선걸 스님이 취임하여 대웅전·삼성각·범종각·지장전·관음전·요사·일주문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절 앞에 1200년된 ‘공손수’ 거목 은행나무는 신라가 망하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섬섬옥수(纖纖玉手)의낭랑공주의 손을 뿌리치고 금강산으로 들어갈 때 지팡이를 꼿은 것이라 전한다.
명산 용문산에서 흘러내리는 물결은 맑고 차고 깨끗하다. 오래전 이곳을 요란한 물소리를 벗하며 죽마고우 이정기와 함께 오르는데 어느 누가 큰 바위에다 세심천(洗心川)이라고 크게 써 놓았다. 마음을 맑게 씻는 시냇물이라, 산길을 오르는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용문사(龍門寺).1/  정용진

기(氣)가 솟아산이 되고
한(恨)이 서려바위가 되는가

섬섬옥수(纖纖玉手)
낭랑공주의 손길을뿌리치고
마의(摩衣)를 두른 채금
강산 가는 길에 꼿았다 는
태자의 지팡이가저리도 정정히 버텨
천년세월 황금빛인데
옛 님이 그리워백발노안(白髮老顔)
정인(情人)의 손을 잡고
산길을 오르는그대의 마음은
바람인가구름인가달빛인가
연지 볼타는 단풍으로물든 산 노을.

그리워라앳된 얼굴
꿈에라도자로자로 드소서
이 밤도가슴을 파고드는
그리운 물결소리.

광주를 떠나 여주와 쌀의 명산지인 이천에 이르면 유명한 미란다 온천호텔이 있고 여주에 이르러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 영릉과 북벌을 꿈꾸시던 효종대왕의 녕능과 구국의 명장 서희장군과 이완대장의 묘를 참배하고 왕비가 무려 9명이나 배출된 여주를 둘러보며, 명성황후 생가도 참배하고 천년고찰 보물이 7개나 있는 신륵사(神勒寺)를 관람하고 불교 유물의 집산지 목아 박물관을 방문하면 많은 감명을 받을 것이다.

여주(驪州)는 옛 지명의  이름이 고구려 장수왕 때에는 골내근현(骨內近縣)이었고,
마암 굴에서 두 말을 탄 현인이 솟아올라 하나는 여흥 민씨의 시조가 되었고 다른 한분은 여흥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하여 낙화암과 같은 바위에는 마암(馬巖)이라 크게 새겨져 있고 “두 말이 물가에서 솟아오르니 현 이름이 황려가 되었다.”(双馬雄起 出水涯 縣名從此 得黃驪)라 전한다.
여주는 옛부터 황려(黃驪) 여흥(驪興) 여강(驪江) 등의 여러 이름이 있다.
여주는 인물이 많이 나기로 유명한 곳으로 목은(牧隱) 이색(李穡)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를 비롯하여 왕비가 많이 난 곳이다.
여주가 배출한 태후와 왕비를 보면 고려 고종의 원비 순경태후(順敬)를 시작으로 이조 태종의비 원경왕후(元敬). (세종의 모친).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仁顯).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 순조의비 순원 숙황후(純元). 헌종의비. 효현왕후(孝顯). 철종의비 철인왕후(哲仁). 고종의비 명성황후(明成皇后). 순종의 비 명효황후(明孝).가 나셨다. 그리고 순조의 생모 현목수빈 박씨(顯穆). 고종의 어머니 부대부인(府大) 민씨가 탄생한 곳이다. 여주는 쌀도 좋아 명인이 많이 배출된 천하 명당 길지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여주에는 청심루(淸心樓)라는 아름다운 누각이 있어 포은 정몽주, 다산 정약용, 목은 이색, 우암 송시열, 퇴계 이황, 류성룡, 김종직 등 4백여편의 시판이 걸려 있었다 전하며, 숫한 시인 묵객들이 찾아 시를 읊었고 성종. 중종, 숙종, 영조. 정조등 많은 임금들이 성군 세종영릉을 참배한 후 쉬어가기도 하였다. 지금을 소실되었으나 복원 운동이 한창이다.
청심루는 여주 팔경의 진수 이기도한데 서울의 낙천정. 세검정. 광주의 청풍루. 파주의 화석정. 청풍의 한벽루. 남원의 광한루. 제주의 관덕정과 함께 한국의 명루 반열에 올랐다. 또한 여주는 싸리산을 중심으로 양질의 고령토가 많이 매장되어 있어서 일찌기 경기 광주와 함께 이조백자의 근원지가 되었고, 일본. 경기 이천 등지로 전파된 곳으로 해마다 경기광주, 이천과 더불어 매 4년마다 세계 도자기 박람회가 열리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명 도자기의 생산 공장 행남 도자기 본사가 여주로 옮겨와서 성업을 이루고 있고,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의 청자와 함께 자기의 명산지로 수백 개의 공장들이 학동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어 한국 생활자기의 80프로가 이곳에서 생산되고 있다.

마암(馬巖)에 올라서/   정용진

청산을 우러르며
벽사(壁寺)를 휘감아
마암으로 흘러드는
청심의 여강(驪江).

무구한 세월의
꿈이 서린
천인단애의 바윗등엔
초연히 웃고 섰는
진달래 꽃 등걸

머언데선 구름이 일고
가까이선 범종소리
청강에 파문지는데
발아랜
가없는 은 모랫벌
그리던 옛님도
학(鶴)으로 되돌아와
강심(江心)을 거니는데
어제의 동안(童顔)은 어디두고
백발서린 모습으로
장승처럼 예섰는가.

마암에 뜨는 달이
영월루에 깃을 펴고
이릉(二陵)에 걸린 달이
향촌에 가득한데
내 마음도
물빛으로 젖어들어
파아란 가슴
하늘이 고여오네.

신륵사(神勒寺)를 굽이돌아
마암을 우러르고
오늘도
소리 없이 저어가는
청심의 여강(驪江).    * (이릉은 세종 효종릉)
  
나는 다시 내 고향 여강을 이렇게 노래하였다.

여강(驪江)/   정용진

님은
명주 비단자락.

내 마을 인정을
살포시 두르고
굽어 도는
청실 강줄기
그리운 물결 소리

밤마다
애틋한 꿈을 싣고 와
은 모랫벌
조포(潮浦) 나루를 건너는

님은
아련한 달빛.

내 누님의 
속마음 같은
명주 비단자락. * 여강은 여주 앞강 이름. 조포는 신륵사 앞 나루 이름.

여주에는 원효대사가 창건한 천년명찰 신륵사(神勒寺)가 있는데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입적하고 무학대사(無學大事)대사가 거셨던 사찰로 유명하다. 유유히 흐르는 강변에는 그의 호를 따서 강월헌(江月軒)이라는 8각정 누각이 암벽위에 서있다.

본래 내 고향 일세

칠십 팔년 고향으로 돌아가니       (七十八年歸故鄕)
이 산하대지 온 우주가 법계이네    (天地山河盡十方)
삼라만상 모든 것은 내가 만들었으니(利利塵塵皆我造)
이 모든 것은 본래 내 고향 일세    (頭頭拘本眞鄕)      <나옹선사 . 懶翁>

태어나실 땐 한 줄기 바람처럼 일어나고
가실 땐 저 연못에 달그림자 잠기듯 가네
나고 죽고 가고 옴에 걸림이 없어
중생에게 보인 그 몸속에 참마음 있네
참마음은 없어지지 않거니
이 때를 놓치면 또 어느 곳에서 찾으리   <나옹선사>(指空和尙이 입적했을 때)

태어남이란 한 조각 바람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이란 못에 비친 달의 그림자일 뿐이다.
죽고 살고 가고 옴에 막힘이 없어야 한다.
(生來一陣風起 滅去澄潭月影 沈生滅去來無罣礙)     <나옹선사>
나옹화상 禪詩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청산은 나를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세월은 나를보고 덧없다 하지않고
우주는 나를보고 곳없다 하지않네
번뇌도 벗어놓고 욕심도 벗어놓고
강같이 구름같이 말없이 가라하네     <나옹선사>
  
봉미산 신륵사 앞 나루를 조포(潮浦)나루라 하는데 마포, 광진포, 이포와 더불어 한강의 4대 나루라 전해온다.
신륵사(勒神寺)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는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을 보면 “신륵사 재부북 속호벽사(神勒寺 在府北 俗號碧寺)”라 하여 일반 백성들에게는 벽사(碧寺)로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에 세종대왕릉의 원찰로서 봉미산(鳳尾山)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렸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다시 신륵사로 불려 현재에 이르렀다.
신륵사의 창건과 관련하여 마암(馬岩)과 용마(龍馬)의 설화가 있다. 마암 부근에 용마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이름난 스님이 나서 그 용마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스님은 나옹선사(懶翁禪師) 또는 인당대사(印塘大師)로 전해진다. 이같이 용과 관련된 설화는 신륵사가 비보사원(裨補寺院)으로서 이름 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유물이 신륵사의 상징으로서 보물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는 신륵사 다층전탑이다.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하는 것으로, 이 탑은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하고 다시 3단의 계단을 쌓은 후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탑의 북쪽에 수리할 때 세웠던 비가 전하는데 그곳에서 “숭정기원지재병오중추일립(崇情紀元之再丙午仲秋日立)”이라는 연대가 확인되었다. 병오년은 1726년(영조 2)에 해당되는데 고려 전기에 세운 탑이 이때에 이르러 다시 수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한강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상징물로 또한 영릉의 원찰이었던 보은사를 알리는 좌표로서의 역할을 해냈을 것이다.
신륵사의 발전은 고려시대 이루어졌다. 곧 양주 회암사(檜岩寺)에 있던 나옹혜근(懶翁慧勤) 스님이 밀양 영원사(塋原寺)로 옮기던 중 입적하게 되면서 스님의 부도를 조성함과 동시에 많은 건물이 신축 또는 중수되었다. 현재 신륵사에는 나옹스님과 직접 관련된 유물이 3점이 있다. 보물 제228호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보물 제229호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보물 제231호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이 그것이다. 석종은 1379년(고려 우왕 5)에 세운 것으로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갖고 있다. 석종비는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韓脩)가 글씨를 쓴 것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 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석등은 전형적인 8각형 석등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세부적으로는 다양한 변형을 모색하여 화려하고 장식적인 면이 강조된 고려말기의 대표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같이 나옹스님의 부도와 부도비 그리고 석등이 조성되면서 신륵사에 많은 건물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지은 건물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고려시대의 삼은(三隱) 가운데 하나였던 목은 이색이 부친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서원하였던 대장경의 인출을 위하여 지은 대장각(大藏閣)이다. 보물 제230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숭인(李崇仁)이 지은 대장각기비(大藏閣記碑)에 의하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대장각은 본래 신륵사 극락보전의 서쪽, 곧 지금의 명부전 근처에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다만 다층전탑 위쪽으로 대장각기비만이 남아 있다. 또 하나 신륵사에서 상징적인 건물은 보물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는 조사당(祖師堂)이다. 물론 현재 있는 건물은 조선 초기의 건물로 평가하나, 목은 이색이 지은 「보제존자진당시병서(普濟尊者進唐詩幷書)」에 의하면 1397년(고려 우왕 5)에 진영당(眞影堂)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에도 조사당이 신륵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륵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다시 한 번 중창되었다. 1440년(세종 22) 태종의 장인이었던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진영(眞影)을 모시면서 중수되었고, 1469년(예종 원년)에 태종의 헌릉 곁에 있던 세종의 영릉을 여주로 옮기면서 옛 건물을 중수하고 새 건물을 건축하면서 대가람이 되었다. 당시의 건물로서 중심적인 것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8호로 지정되어 있는 극락보전(極樂寶殿)이다. 이 건물은 경내 중심에 위치하고 정남향을 하고 있어 현재 신륵사의 중심 건물로 기능하고 있다. 본래는 세종대에 지어졌으나, 현존하는 건물은 정조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집이다.
이후 신륵사는 숙종, 영조, 정조대는 물론 철종대에 이르기까지도 중수를 계속하면서 사세를 유지하였다. 또한 현대에 들어서는 1920년대에 열반당(涅槃堂)이 새롭게 조성되는 것을 계기로 명부전(冥府殿)의 중건이 이루어졌고, 1970~1980년대에는 종각의 신축과 극락보전, 구룡루, 조사당 등의 전각이 새롭게 중수되었다. 특히 1980년대에는 요사채인 심검당을 건립하면서, 중·고등학교 학생법회를 신설하여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지역 포교 활동에 힘을 쏟기도 하였다.
여주는 민요 갑돌이와 갑순이의 발상지로 금은 모랫벌 여강(驪江)변에 그 기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신륵사 맞은편에는 마치 부여의 낙화암을 닮은 큰 바위 절벽이 있는데 그 위에는 영월루(迎月樓)라는 아름다운 누각이 있고 이 공원에는 현충탑(顯忠塔) 여흥민씨와 여흥 이씨가 탄생된 곳이라 하여 ‘여흥 민씨’탄강 구리비(驪興 閔氏 誕降 舊里碑)‘가 서있다. 그리고 큰 바위를 마암(馬巖)이라 부르는데 그 바위 아래에서 감로수(甘露水)가 솟아나 여강(驪江)에서 잡히는 잉어는 황금빛으로 일품으로 알려져 있다.
여주는 이천과 더불어 쌀이 좋아서  임금님께 바치는 진상미로 유명한 고장이다.

갑돌이와 갑순이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 마을에 살았더래요
둘이는 서로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그러나 둘이는 마음 뿐이래요
겉으로는 음~ 모르는 척 했더래요
그러다가 갑순이는 시집을 갔더래요
시집간 날 첫날밤에 한없이 울었더래요
갑순이 마음은 갑돌이 뿐이래요
겉으로는 음~ 안 그런척 했더래요

갑돌이도 화가나서 장가를 갔더래요
장가간 날 첫날밤에 달보고 울었더래요
갑돌이 마음도 갑순이 뿐이래요
겉으로는 음~
고까짓것 했더래요
고까짓것 했더래요
고까짓것 했더래요   <민요>

여주를 떠나 강원도 원주로 향했다.
치악산(雉岳山)은 강원도 원주시와 횡성군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주봉인 해발 1,288m의 비로봉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뻗어 내린 치악산은 남대봉(1,181m)과 매화산 (1,085m) 등 1천여 미터의 고봉들이 연이어 있고 곳곳에 가파른 계곡들과 산성(금대산성, 영원산성, 해미산성)과 사찰(구룡사·상원사·석경사·국형사·보문사·입석사), 사적지가 산재하고 있다. 주능선 서쪽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동쪽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특히 구룡사에서 비로봉을 향해 뻗은 북쪽의 능선과 계곡은 가파르기로 유명하다. 태백산맥의 허리에서 남서쪽으로 내리닫는 차령산맥 남쪽 끝에 자리잡고 있다. 치악산 일대의 수림은 대체로 활엽수와 침엽수의 혼효림으로 552종의 수목이 울창하다. 1973년 3월 15일에 도립공원으로, 1988년 6월 11일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치악산국립공원의 면적은 약 182.09㎢이다.

치악산(稚岳山)/   정용진

산이 좋아 산을 오르네.
그리움에 취하여오르는 산길
그 마음 못 잊어
달도 따라 나서고
산심(山心)을 싣고세렴폭포 뛰어내려
달려오는 시냇물도나를 반겨 맞는데
흐르다 쉬어가는 맑은 소(沼)에는
구룡사(龜龍寺) 선경(禪景)이병풍을 두르고
그대 마음이애틋이 고여 있네

세속의 번뇌를아득히 잊고
치악산 비로봉을오르는 산행
간밤 찬 서리에타는 연정(戀情)으로
잎마다 저리 붉어옷깃에 젖어드네.

구룡사(龜龍寺)는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에 위치한 절로 치악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이 668년 문무왕 8년)에 세웠다고 전해지며, 창건 당시 이름은 구룡사(九龍寺)였던 것을 조선 중기 이후부터 '아홉 구(九)'자를 '거북 구(龜)'자로 고쳐 써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신라말· 고려초 도선국사의 비보사찰중의 하나로 수많은 고승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우리 일행은 여주부근의 명승지를 둘러보고 동해로 향하던 중 충북 제천의 의림지를 찾았다. 의림지(義林池)는 충청북도 제천시 모산동 241번지 일대에 있는 삼한시대의 인공 저수지이다. 둘레는 약 1.8km, 수면은 약 158,677m², 수심은 8~11미터이다.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水山堤)와 함께 삼한시대의 3대 수리시설로, 당시 농업 기술 발달의 정도를 보여준다.
밀양 수산제, 김제 벽골제와 함께 역사가 오랜 저수지로, 세곳의 저수지 중 현존하며 관개의 제기능을 수행하는 유일한 저수지이다.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의림지는 우륵이 축조했다는 설과 현감 박의림이 축조했다는 설도 있으나, 삼한시대의 저수지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조선 세종 때와 세조 3년에 정인지가 둑방을 고치고, 1910년부터 5년간 다시 보수를 하였다. 1972년에는 홍수로 서쪽 둑방이 무너졌으나 고쳐지었다. 1972년 둑 방 붕괴 때의 조사에서 의림지 바닥에 큰 샘이 있는 것이 밝혀졌다.
1976년 에는 충청북도 시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비와 제방만 남고 형체가 없는 벽골제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므로 의림지도 새로 지정해 줄 것을 문화재청에 요청하여 2006년에는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한국농어촌공사에서 농업용수 공급을 위한 농업생산기반시설로 관리하고 있다. 물이 맑기로 소문난 의림지를 관광한 후 줄기차게 물줄기를 내려 쏟는 비봉 폭포를 뒤로하고 영월로 향하였다.

영월은 동강이 흘러 아름다운 곳으로 세조(世祖)의 배척을 받아 단종(端宗)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청령포에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한 슬픈 곳이다.

영월 자규루에서

천고원한 품은 채 구중궁궐 물러나와
영월이라 깊은 산중 혈혈단신 될 줄이야.
밤이면 밤마다 잠 못 이루고,
지는 해는 진다만 내 시름 끝이 없네.
두견의 소리 끊어진 새벽녘 기슭의
기우는 달빛마저 퇴색해 가누나.
붉은 피 같이도 흐르는 봄 골짝의 
저기 저 꽃잎들, 저기 저 꽃잎들,
붉게 타네.
아하! 하늘마저 귀 어두워
애끓는 이 하소는 아니 들었는지
어찌타 나 홀로 설움 겨워 목 메이나. <단종대왕>
 
 단종대왕의 <영월 자규루에서>전문이다.1455년 숙부 세조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 청령포에서 유배의 아픔을 읊은 시조다.

자규루에서

자규루 다락에 올라
설움에 겨워서
서성이는 밤
두견새 너는 어이 그리우느니.
네 울음 애절하면 내 마음도 괴로워
네 슬픔 없고 보면 내 시름도 없을 것을...
여보소 원통한 세상 사람들이여!
춘삼월 자규루에 올라
두견새 소리
듣지마소. <단종대왕>

단종임 죽임을 당하여 시신이 강가에 버려지자 엄흥도가 시신을 수습하여 안치한 곳이 영월의 장릉이다.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될 때 의금부도사(義禁莩事)로 그를 호송하였던 왕방연(王邦衍)은 여주(驪州)앞강 여강(驪江)을 지나면서 그의 아픈 심정을 이렇게 시로 남겼다.

단종을 생각하며

천만리 먼 먼 길
임금님 이별하고
내 마음 설레어
냇가에 앉았노니
저 물도 내 마음 같아
울어 밤길 가누나.  <왕방연>

맑은 듯 흐리고 흐릴 듯 다시 개네
자연도 이렇거든 세상 인심이야.
어저께 날 좋다던 이 오늘아침 헐뜯고
공명 싫다던 이 바둥대네.
꽃은 피건 지건 봄이야 관계하랴
구름이 오고 가건 산새야 알바 없어.
여보소 사람들이여! 새겨두고 잊지 마소
평생을 구하여도 부귀공명 덧없느니. <김시습>

 생육신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 수양대군이 즉위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불사르고 중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났다. 저서로는 금오신화. 매월당집. 신현담요해 가 있다.
 수양대군의 의하여 거열형으로 사지가 찢어져 죽은 사육신의 시신이 한강변에 방치되어 나뒹구는 것을 수습하여 오늘의 노량진에 사육신 묘에 안장한 것이 김시습 이라고 전해진다. 오늘의 단종 능인 장릉이다. 낙락장송만 말없이 푸르르다.
또 영월에는 우리나라의 시선 김병연. 김삿갓의 무덤이 있는데 시인 김삿갓은 순조 7년 1807년 권문세가인 장동(壯洞)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병연(炳淵)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다. 과거에 장원급제 하였으나 조부 김익순을 모욕한 죄로 하늘을 두려워하여 일생 삿갓을 쓰고 전국을 방랑하며 살다가 철종14년(1863)3월29일 전남 동복 적벽강에서 아래 유시를 남기고 56세의 생을 마감하였다.

날짐승도 길짐승도 제 집이 있건만
나는 한평생 혼자 슬프게 살아 왔노라.
집신에 지팡이 끌고 천리 길 떠돌며
물처럼 구름처럼 가는 곳이 내 집이었다.
사람도 하늘도 원망할일 못되어
해마다 해가 저물면 혼자 슬퍼했노라.
어려서는 이른바 넉넉한 집에 태어나
한강가 이름 있는 집에서 자랐노라.

조상은 부귀영화를 누려 왔던 사람들
장안에서도 이름 높던 가문이었다.
이웃 사람들 생남했다 축하해주며
언젠가는 출세하리라 기대했건만.

자랄수록 운명이 자꾸만 기구하여
오래잖아 상전이 벽해처럼 변했소.
의지할 친척 없고 인심도 각박한데
부모마저 돌아가서 집안은 망했도다.

새벽 종소리 들으며 방랑길에 오르니 
생소한 객지라서 마음 애달팠노라.
마음은 고향 그리는 여호 같고
신세는 궁지에 몰린 양 같은 나로다.

남쪽 지방은 자고로 과객이 많은 곳
부평초처럼 떠돌아가기 몇몇 해던고.
머리 굽신거림이 어찌 내 본성이리오.
먹고 살아가기 위해 버릇이 되었도다.

그런 중에도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가
삼각산 푸른 모습 생각할수록 아득하네.
떠돌며 구걸한 집 수없이 많으니
풍월 읊는 행랑은 언제나 비었도다.

큰 부자 작은 부자 고루 찾아다니며
후하고 박한 가풍 모조리 맛보았노라.
신세가 기구해 남의 눈총만 받다보니
흐르는 세월 속에 머리만 희었도다.

돌아가자니 어렵고 머무르기도 어려워
노상에서 방황하기 몇 날 몇 해 이던고
저 하얀 구름타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우리 일행은 영월을 떠나 정선으로 차를 몰았다. 정선은 정선 아리랑과 아우라지 전설로 유명한 곳이다.
정선 지방은 정선아리랑 외에도 다른 지방에 비해 유난히 얘깃거리가 많은 고장이다. 때문에 그만큼 재미있게 우스갯소리도 많다. 그 가운데 한 가지로 '정선의 하늘 넓이는 정확하게 열다섯 평'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정선 지방이 온통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하늘이 조금밖에 안 보인 다는데서 생겨난 말로, 그나마 옛날에는 열두 평 밖에 안 되는데 길을 만드느라 산언덕을 깎아내리는 바람에 세 평 정도가 넓어졌다고 한다.
  아름다운 비경과 명소들을 두루 간직하고 있는 정선의 가장 대표적인 명소로는, 애틋한 전설이 어린 북면 여랑리의 아우라지 나루터.
조선시대 말엽, 아우라지 나루터 근처에 서로 사랑하는 처녀총각이 살고 있었는데, 총각이 경복궁 증건 때문에 부역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자 기다리다 그리움에 지쳐 죽은 처녀에 관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이 나루터에는 정선아리랑 노래비와 함께 아우라지 처녀상이 세워져 있다. 정선 아리랑을 보자.

정든 님이 오셨는데 수인사를 못 하고
행주치마 입에다 물고서 눈으로만 반기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날 넘겨 주게.
 
태산이 무너져 사해 들평지 되더라도
우리들에 드는 정분은 변치를 말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날 넘겨 주게.
 
꽃 본 나비야 물 본 기러기 탐화봉접(探花蜂蝶)이 아니냐.
나비가 꽃을 보고서 그냥 갈 수 있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날 넘겨 주게.
 
앞 남산 살구꽃은 필락말락하는데
우리들의 정분은 들락말락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날 넘겨 주게.
 
울타리 밑에 저 닭은 모이나 주면 오잔나
저 건너 큰아기는 무엇을 주면 오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날 넘겨 주게.
 
당신은 거기 있구 나는 여기 있어도
말 한 마디 못 전하니 수천리로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날 넘겨 주게.    <민요>

조반 후 우리 일행은 정선을 떠나 동해로 가기에 앞서 천년고찰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를 찾았다.

오대산 월정사(月精寺)는 선덕여왕 12년인 643년에 자장 율사 창건했다는 설이 전해지는 오대산의 중심 사찰이다. 자장이 중국에서 유학하던 중에 문수보살을 만난 뒤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고자 정진하던 터라는 전설이 있다.
1951년 1·4 후퇴 때 절이 인민군에 점령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월턴 워커 미8군 사령관과 김백일 육군 1군 군단장이 오대산 사찰의 소각을 지시했다. 월정사도 팔각구층석탑 이외의 건물은 모두 불타 없어졌다. 몇 달 뒤 김백일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는데, 유족이 이를 사찰을 훼손한 것에 대한 업보라 여겨 이후 월정사에 그의 위패를 안치했다. 울창한 전나무 숲 속에 오대산을 뒤로 하여 자리 잡고 있으며, 가람 배치는 일직선상에 놓는 일반적인 신라 시대 양식과는 달리 탑 옆쪽으로 부속 건물이 세워져 있다. 지금의 건물은 한국 전쟁 때 완전히 소실된 것을 현대에 새로 중창한 것이다. 방한암과 탄허 등의 고승이 이곳에 머물렀던 곳이다.

돌부처/   정용진

외진 산록에
홀로서서
외로운 돌부처.

견성대오(見性大悟)
멀고 깊은 불심으로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외치시네.

구름이 지나고
찬비가 나려도
중생들의 빈 가슴
가득 차오르는 황홀감.

오늘도
돌부처
장삼자락에 서리는
무량광(無量光).

상원사(上院寺)는 신라 성덕왕 4년(705)에 신라의 보천(寶川)과 효명(孝明) 두 왕자에 의해 오대산 중대에 창건되었는데, 처음 이름은 진여원(眞如院) 이었다. 자장율사가 개산한 뒤로 오대산이 불교 성지로서 그 이름을 빛내면서 마침내 오류성중(五類聖衆) 곧 다섯 부류의 성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화 되기 시작하던 즈음이다. 이때의 창건 설화를 '삼국유사'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는 아우 효명과 더불어 저마다 일천 명을 거느리고 성오평(省烏坪)에 이르러 여러 날 놀다가 태화(太和) 원년(元年)에 형제가 함께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형 보천태자는 오대산 중대 남쪽 밑 진여원 터 아래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으며, 아우 효명은 북대 남쪽 산 끝에 푸른 연꽃이 핀 것을 보고 그 곳에 풀로 암자를 짓고 살았다. 두 사람은 함께 예배하고 염불하면서 수행하였으며 오대에 나아가 공경하며 참배하던 중 오만의 보살을 친견한 뒤로, 날마다 이른 아침에 차를 달여 일만의 문수보살에게 공양했다.  이 때, 신문왕의 후계를 두고 나라에서 분쟁이 일자 사람들이 오대산에 찾아와 왕위를 이을 것을 권하였는데 보천태자가 한사코 돌아가려 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효명이 사람들의 뜻을 쫓아 왕위에 올랐다. 그가 성덕왕(聖德王)이다. 왕이 된 효명태자는 오대산에서 수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이 여러 모습으로 몸을 나타내 보이던 곳에 진여원을 개창하니 이곳이 지금의 상원사다.

계곡에는 단풍이 주홍으로 물들었고 옥수가 돌 틈을 소리 내어 흐르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와 고려의 불교숭상의 영향으로 전국 명산에 대찰이 많은데 전국 20여 명찰에는 여행객이 절밥을 먹으며 잠을 잘 수 있는 사찰이 20여고에 이른다고 한다. 이번에 우리 일행은 오대산 월정사 상원사를 둘러보고 태백산을 넘어 삼척에 도착 하였다. 관동은 동해를 끼고 있는 백두대간으로 오대산과 태백산이 있어 명산대천의 미가 극치를 이룬다. 하여 관동 8경이 동해를 끼고 줄지어 늘어서 있다.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평해(平海)의 월송정(越松亭)이 그것이며, 월송정 대신 흡곡(歙谷)의 시중대(侍中臺)를 넣는 경우도 있다.  대관령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관동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그 명승지들은 관동지방의 수많은 경승지 중에서 특히 예로부터 손꼽혀 온 경승지로, 종래 강원에 속했던 망양정과 월송정은 현재 경북에 편입되었고, 또 삼일포와 총석정은 북한지역에 들어 있다.
관동팔경은 예로부터 칭송되어 온 명승지인 만큼 이곳을 노래한 시가와 이곳에 얽힌 전설들이 많은데, 특히 조선 선조(宣祖) 때에 정철(鄭澈)이 관동팔경과 금강산 일대의 산수미(山水美)를 읊은 《관동별곡》이 유명하고, 또 신라시대에 영랑(永郞) ·술랑(述郞) · 남석랑(南石郞). 안상랑(安祥郞)이 삼일포와 월송정에서 놀았다는 전설도 널리 알려져 있다.

경포대(鏡浦臺)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1971년 12월 16일 년 지정된 강원도유형문화재 제6호로,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강원도 강릉시에서 동북쪽으로 7km 지점에 있으며, 언덕 위의 누대(樓臺)이다. 고려 27대 충숙왕 13년(1326년)에 박숙(朴淑)이 창건하고, 조선 제11대 중종 3년(1508년)에 한급(韓汲)이 옮겨 세웠다. 현재의 경포대 건물은 1745년(영조 21년) 부사 조하망이 세운 것으로 낡은 건물은 헐어내고 홍수로 인하여 사천면 진리 앞바다에 떠내려온 아름드리 나무로 새롭게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1873년 (고종 10년)강릉부사 이직현이 중건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경포호수와 솔밭, 동해의 청파에 떠도는 백조, 추석 달맞이 등이 매우 아름답다.
강릉 경포대와 경포호(江陵鏡浦臺와 鏡浦湖)는 2013년 12월 30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강릉 경포대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고려말 충숙왕 13년인 1326년 지중추부사 박숙에 의해 창건 된 누정건물로 안축의 《경포대신정기》(鏡浦臺新亭記) 기문(記文)에 "옛날 영랑선인이 놀던 곳이며 정자가 없어 비비람이 치는 날 놀러 왔던 사람들이 곤욕스럽게 여겨 작은 정자를 지었 다"라고 하여 창건목적을 밝히고 있어 역사성이 높다.
또한 창건 당시 이전시대의 주춧돌과 장대석이 발견되어 훨씬 이전시대부터 이 곳에 정자형태의 건물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강릉지역 누정 기록으로 신라 성덕왕대 순정공( 純貞公)과 관련이 있는 임해정과 술랑선도(述朗仙徒)와 관련이 있는 한송정을 통하여 현존하는 경포대와 더불어 강릉 지역의 누정문화의 시원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관동팔경(關東八景) 중 하나인 경포대(鏡浦臺)는 지형․지질적 가치가 뛰어난 자연석호인 경포호와 함께 동해안의 빼어난 절승지로 예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다녀간 명승지로서 명사들의 수많은 시․서․화가 있어 역사문화경관적 가치가 높다.
경포대와 경포호의 자연풍광을 관동팔경에 비유한 경포팔경과 호해정을 중심으로 한 팔경, 김극기의 강릉팔영 등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천혜의 자연경관을 조망하며, 심성을 수양하는 곳일 뿐 아니라 풍부한 문학적 소재성 등 문화적, 경관적 요소가 결합된 누정으로 장소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다.
영조 22년(1746년) 김상성(金尙星, 1703~1755)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화원들에게 강원도 절경을 그리게 한 후 친한 사람들에게 시를 지어 완성한 작품이 관동십경(關東十景)인데 그 중 의 경포대 그림은 경포대와 경호를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부감법으로 그린 것으로, 경호는 경포대를 경계로 하여 내호와 외호로 구분하고 있으며, 호에는 낚시를 하는 늙은 어부와 갈매기의 한가로운 모습을 볼 수 있으며, 호수와 바다가 경계되는 곳에는 백사장과 함께 현재의 죽도봉이 그려져 있고, 초당과 경포대 뒤쪽에는 소나무 사이로 꽃들이 만발하여 봄날의 정취를 감상할 수 있으며, 멀리 강문 너머로 보이는 동해 바다에는 아침해가 떠오르는 일출모습과 함께 햇살을 받으며 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돛단배를 그리고 있어 경포호의 옛 자연환경 및 인문 환경을 알 수 있어 가치가 높다.
정철(鄭澈, 1536-1593)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경포대를 관동팔경중 으뜸이라 했으며, 경포 대에 저녁이 되어 달빛이 쏟아지면 하늘, 바다, 호수, 그리고 술잔과 임의 눈동자 등 다섯개의 달을 볼 수 있는 동해안 제일의 달맞이 명소이다.
경포대 정자 내에는 율곡 이이가 10살때 지었다는 「鏡浦臺賦」를 비롯하여 숙종어제시, 조하망의 상량문 등 여러 명사의 시문현판은 인문학적 가치가 높다.
강릉 경포대는 고려말 1326년 지추부학사 박숙이 방해정 뒷산의 인월사터에 세웠던 것을 1508년에 강릉부사 한급이 현재 자리로 옮겼고 여러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춘 약 680여년의 역사성을 지닌 누정건축물이며, 경포호와 더불어 탁월한 역사문화적 경관성을 지닌 곳이다.
강릉 경포대는 16세기 이후 지방 재지사족(在地士族)이 주체가 되는 별당식 정자 형태로 전환되는 누정건축 양상의 변화를 고찰할 수 있는 중간적 의미를 갖는 정자로서 건축역사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동인시화》(東人詩話) 설화 홍장(紅粧) 고사는 경포대에서의 홍장과 강원감찰사 박신과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 구전문학의 가치가 높은 곳이다 .강릉 경포대와 경포호는 너무나 아름다운 동해의 명승이다. 설악산은 금강산과 더불어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세계적 명산이다.
나는 국내는 지리산 태백산 오대산 설악산 금강산 묘향산을 관광하였고 캐나다 록키. 스위스의 알프스 융프라우. 중국의 장가계 원가계와 황산을 등정한 것을 인생의 행복으로 생각한다. 저마다 저다운 특색의 산경을 지닌 명산들이다.

설악산(雪嶽山)은 강원도 속초시와 양양군, 인제군, 고성군에 걸쳐 있는 해발고도 1,708미터의 산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한라산과 지리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추석 무렵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여름이 되어야 녹는 까닭으로 이렇게 이름 지었다. [
1965년에 천연기념물 제171호로, 1970년 3월 24일에 설악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1982년 8월에는 유네스코가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
설악산은 크게 내설악과, 외설악, 그리고 남부설악으로 구분짓는데, 대청봉을 중심으로 북서편의 인제군에 속하는 지역을 내설악이라 하고, 동편으로 바라보이는 바다에 연해있는 속초시에 속하는 지역을 외설악이라 하며, 남편의 양양지역을 남부설악이라고 하는 것이다.
내설악은 수렴동계곡, 백담계곡, 가야동계곡, 구곡담계곡, 12선녀탕, 대승폭포, 용아장성 등의 빼어난 계곡과 산세로 이름이 높아 절경을 자랑하며, 외설악은 천불동계곡과 더불어 울산바위, 권금성, 금강굴, 비룡폭포, 토왕성폭포 등의 기암절벽과 폭포가 아름답고 접근이 쉬워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최근에는 대청봉으로 오르기 쉬운 한계령이나 오색지역의 남부설악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는데, 한계령에서 오르는 길은 계곡이 발달한 설악산에서는 드물게 긴 능선이 이어지는 서북주릉의 일부를 지날 수 있다.
설악산 일원의 생물상은 기후와 특성에 따라 내설악과 외설악이 각기 다른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내설악은 내륙성 기후로 완만한 경사와 두터운 토양층으로 이뤄져 숲이 무성하고 동물의 서식이 풍부한 반면 외설악은 해양성 기후로 지세가 급경사를 이루고 탐방 객의 발길이 찾아 동물의 서식이 적은 편이다. 산양이나 반달 가슴 곰 등 천연기념물을 비롯하여 희귀동식물이 서식한다.

금강굴(金剛窟)/     정용진
          
하늘 만지며
흰 구름 이고 걷는
금강굴.

발아래 만학천봉
청의를 걸치고

사공 
노 젓는 소리
노 젓는 소리

아 ㅡ
잎마다 조각배
천불동 계류여

노승의 기원
석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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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 볼리비아 이 상옥 2007.12.28 18050
1941 한국의 슈바이쳐 선우경식 원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존경 2008.04.19 17520
1940 꽃의 시(詩)학(4) 꽃은 아픔아다./秀峯 鄭用眞/ 증보편 정용진 2012.09.23 8248
1939 동요와 민요/샌디에고 문장교실 송년 강론 자료/정용진 시인/ 정용진 2012.12.04 2882
1938 자유게시판 관리 규정 미문이 2004.08.22 2185
1937 대화 없는 대화 석류나무 2007.03.22 1816
1936 재산 양도 에 대하여 석류나무 2007.04.02 1628
1935 최락완 시인 동씨침법 특별강의 한길수 2010.11.10 1541
1934 秀峯 明心寶鑑/정용진 시인 정용진 2013.04.22 1532
1933 秀峯 明心寶鑑/증보편/秀峯 鄭用眞/(2) 정용진 2012.06.21 1517
1932 사랑의 시학(詩學) 정용진 2008.07.20 1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