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숙의 문학서재




오늘:
32
어제:
112
전체:
455,977


수필
2016.11.14 09:17

비워둔 스케치북 

조회 수 104 추천 수 0 댓글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비워둔 스케치북  / 홍인숙(Grace)


긴 세월을, 아무도 모르게 가슴앓이 한 적이 있었다. 아주 조그만 것이 가슴 깊이 웅크리고 앉아, 잊어버릴 만 하면 한번씩 가슴을 쌉싸름하게 하기고 하고, 눈물을 질금거리게 하기도 했다.
  
미국에 갓 도착해 맞는 첫 크리스마스였다. 누구보다도 시어머님의 선물이 걱정되었다.
궁리 끝에 큰 스케치북과 미술 연필을 사 왔다. 그날부터 아주 조그만, 시어머님의 여권 사진을 보며 본격적인 초상화 그리기 작업에 들어갔다. 여러 날을 비밀스레 매달려 완성한 후, 액자에 넣어 드렸다.
크리스마스 날, 아무도 예상 못했던 선물로 모두 놀라는 표정이었다.
  
사실, 그 초상화가 얼마나 시어머님의 모습을 닮았는지 자신할 수는 없었다. 다만, 목마르게 그리고 싶어하던 그림을 초상화란 명목으로라도 표출할 수 있었다는 것이 오랜만에 위로가 되었다.
그때, 시어머님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미세한 표정까지 놓치지 않으려던 열정 속에서 싹튼, 그분에 대한 사랑도 잊을 수가 없다.
  
결혼하고 미국에 오니 잘못 탄 버스가 내달리듯, 마구잡이로 세월이 흘러갔다. 많은 날을 병치레를 하였고, 또 그보다 몇 배의 많은 날을 낯 설은 직장생활을 하며 사는 일에 부대꼈다.
화가가 되고 싶었던 내 꿈과,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대신, 그 자리에는 아주 작은 서러움들이 새롭게 꼼틀거렸다. 그리곤 그 긴 세월동안, 요지부동의 가슴앓이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자라는 아이들 틈에서 슬슬 사는 재미를 붙이며, 거짓말처럼 그때의 가슴앓이를 조금씩 잊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 크리스마스에 내 가슴앓이를 알고 있었는지 작은아이로부터 24년 전, 그 옛날과 똑같은 스케치북과 미술 연필 세트를 선물로 받았다.
반가웠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오랫동안 굳어진 감성을 어떻게 되찾아야할지 몰라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아직도 그 스케치북은 내 삶의 뒷전에서 굳게 닫혀 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스케치북에 첫 장에는 아이의 환한 얼굴이 그려질 것이라는 것을.


               (1999년 한국일보 / 여성의 창 )



?
  • ?
    Chuck 2016.11.17 09:20

    Stay tune..


    "https://www.youtube.com/embed/a_B7ob_kV0I"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홍인숙(Grace)의 인사 ★ 1 그레이스 2004.08.20 1601
65 수필 사이 가꾸기 홍인숙(Grace) 2020.10.04 213
64 수필 어느 날의 대화 홍인숙(Grace) 2020.10.04 182
63 수필 내 평생에 고마운 선물 홍인숙(Grace) 2018.09.25 235
62 수필 자화상 4 홍인숙(Grace) 2018.05.25 1013
61 수필 할머니는 위대하다 7 홍인숙(Grace) 2017.11.29 247
60 수필 나의 보로메 섬은 어디인가 홍인숙(Grace) 2017.07.26 245
59 수필 또 삶이 움직인다 8 홍인숙(Grace) 2017.05.27 178
58 수필 글 숲을 거닐다 11 홍인숙(Grace) 2017.04.06 461
57 수필 소통에 대하여   6 홍인숙(Grace) 2017.01.12 380
56 수필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   3 홍인숙(Grace) 2017.01.12 320
55 수필 작은 일탈의 행복 3 홍인숙(Grace) 2016.12.06 234
54 수필 한 알의 밀알이 떨어지다 1 홍인숙(Grace) 2016.12.06 122
53 수필 바다에서 꿈꾸는 자여   2 홍인숙(Grace) 2016.11.26 265
52 수필 내게 특별한 2016년 1 홍인숙(Grace) 2016.11.26 259
51 수필 그리움  2 홍인숙(Grace) 2016.11.14 153
» 수필 비워둔 스케치북  1 홍인숙(Grace) 2016.11.14 104
49 수필 나를 부르는 소리 2 홍인숙(Grace) 2016.11.14 203
48 수필 진정한 문학을 위하여 1 홍인숙(Grace) 2016.11.10 327
47 수필 검소한 삶이 주는 행복 1 홍인숙(Grace) 2016.11.10 191
46 수필 오해 1 홍인숙(Grace) 2016.11.10 121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