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여름

2018.08.14 07:03

이해숙 조회 수:6

책 읽는 여름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이해숙

 

 

 

 

 막내둥이는 한 해 더 입시 준비를 하겠다고 했다. 인생에서 한두 해쯤 우회해도 괜찮지 않겠는가. 학원까지 5km 정도를 자전거로 다닌다. 비 오는 아침, 아이를 학원 앞에 내려주고 이른 출근을 하는데 도무지 나아갈 길이 잡히지 않았다. 주변을 뱅뱅 돌았다. 자주 다니는 곳이 아니어서인지 미로에 든 듯 혼란했다. 기어이 차를 갓길에 세우고 내려서 한산한 찻길을 여기저기 먼 곳까지 관망해 보았다. 저 멀리 어렴풋이 눈에 익은 ‘P 정형외과’ 건물이 보였다. 저곳을 왼편에 끼고 직진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사무실까지의 진로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렇듯 길을 잃고 헤맬 때는 길을 찾아 줄 단초가 필요하다. 내 어려움을 해결해 줄 연결고리 말이다.

 

 봄이 시작될 무렵의 느닷없는 ‘왼발 골절상’은 동적(動的)인 활동에 제약을 주었다. 노란 먼지처럼 우울했다. ‘만 보 걷기’며 '등산', 좋아하는 '수영'과 '요가'도 할 수 없었다. 뼈가 붙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뼈가 붙은 뒤에도 매일 한방치료와 물리치료를 받으며 움직임을 자제했다. 골절상에는 시간이 약이다. 정적(靜的)인 시간을 활용하기 위한 돌파구가 필요했다. 책을 통해 그 실마리를 찾았다. 강원국 작가의 책을 읽던 중, 고전을 연구하고 역사평론을 하는 한정주 님을 알게 됐다. 사학을 전공했고 고전․역사연구회 대표로 뭣보다 자칭 ‘이덕무 마니아’여서 더 관심이 갔다. 많은 저서를 다 읽어보고 싶을 만큼 매료됐다. 고전을 읽노라면 갑갑하던 우울감을 훨훨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글쓰기 동서대전’은 7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작품집으로 집필 기간만 2년이 걸렸단다. 조선을 비롯해 중국과 일본, 서양의 글쓰기를 교차 비교했고, 유사성과 차이점에 대해 필자 나름의 해석은 물론 철학이 가미된 책이었다. 고전이라면 일단 어려워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이 작업이 돋보이는 것은, 시대를 초월하여 강한 맥놀이를 일으키는 고전을, 독자들이 수월하게 접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지난한 작업을 감수해 주고 있다. 18세기를 중심으로 멀게는 14세기에서 최근 20세기까지 동서양의 내로라하는 인문학자들의 문집을 망라해 소개했다. 인문학의 르네상스 시기라 명명하는 조선의 18C는 ‘위대한 백 년’이라 일컫는다. 접하지 못했던 숱한 작품들과 문장가들의 글을 대하니 이 계절에 넘치는 선물을 받은 듯 감개무량했다.

 

 여름이야말로 독서의 계절이 아닌가? 밤보다 낮이 긴 탓이다. 요즘은 잠보인 내가 평소보다 시간 반은 일찍 일어난다. 새벽 한유는 별미다. 데크 아래로 내려서면 좁은 앞마당이 있다. 측백나무와 소나무, 주변 수풀에서 풍겨오는 숲의 향기에 나의 허파도 호강했으리라. 우뚝 선 가로등의 까무룩한 불빛에서 밤샘 수고의 피로가 읽히지만, 그저 그뿐 가로등은 큰 불평이 없다. 어깨를 겯고 있는 일곱 집을 위해 온밤 보초를 서 주는 골목 지킴이. 생색없는 가로등의 노고가 새삼 고맙다. 아침을 준비하기까지는 짬이 있다. 천하에 책이 없다면 몰라도 당장 읽고 싶은 책이 있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짧은 시간이나마 몰입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새벽의 글맛도 괜찮았다.

 

 필자는, 동서양 글쓰기 천재 39명의 저술과 언행, 문집을 두루 섭렵하여 집필하는 동안 공통의 가치를 발견했단다. 한 시대를 풍미한 그들에게서 관통하는 핵심가치는 ‘개성’과 ‘자유’와 ‘자연’이었다. 이는 곧, ‘자기다움’과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으로 해석했다. 동서고금을 초월해 일가를 이룬 문장가들은 독창적이고 독보적인 자신의 글을 썼다는 것이다. 홀로 자신만의 글의 세계를 개척해 박지원다운 글을 썼고, 이덕무만의 글을 지었다. 소세키의 개성적인 풍자 글, 원매의 고유한 산문집, 바쇼 특유의 하이쿠 소품들. 그들은 타인의 글을 탐독하고 연구했지만, 모방하거나 답습, 흉내를 내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만의 글의 세계를 찾기 위해, 스스로 깨닫고 터득하기 위해서였다. 이름하여 ‘낯설게 하기’와 같은 맥락으로 생각된다. 다소 구성이 거칠고 논리가 투박하며, 문법이 불완전하고 수사가 초라하며, 형식이 결점투성이라도 자신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독특하고 독창적인 글을 짓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역설한다.

 

  이덕무는, 어린아이의 지혜와 식견이 때로는 어른들이 결코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경지에 들게 한다고 탄복했다. 어린아이의 천진함을 높이 칭송하며 그의 아우 ‘정대’가 아홉 살 때 일을 소개했다. 이덕무는 아무리 어린 나이의 동생이라도 말과 표현 하나하나에 귀 기울여 듣고 글로 옮겨 적어 두곤 했단다. 어른의 세계에서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말과 표현이었기 때문이리라.

 [내 어린 아우 정대는 이제 겨우 아홉 살이다. 타고난 성품이 매우 둔하다. 정대가 어느 날 갑자기 말했다. “귓속에서 쟁쟁 우는 소리가 나요.” 내가 물었다. “그 소리가 어떤 물건과 비슷하니?” 정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소리가 동글동글한 별 같아요, 보일 것도 같고 주울 것도 같아요.”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형상을 가지고 소리에 비유하는구나. 이는 어린아이가 무의식중에 표현하는 천성의 지혜와 식견이다. 예전에 한 어린아이가 별을 보고 달가루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말 등은 예쁘고 참신하다. 때 묻은 세속의 기운을 훌쩍 벗어났다.]     이덕무 <이목구심서>

 

 이탁오는 중국의 문장가이자 철학자였다. 자신이 저술한 책을 가리켜 ‘불살라야 할 책’(분서:焚書), ‘감추어야 할 책’(장서:藏書)라 부르니, 중국 철학사를 통틀어 가장 문제의 인물이자 사상적 이단아였다고 한다. 1590년에 출간된 그의 책 <분서>에서 ‘동심설’童心說을 통해 “천하의 명문은 동심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고 주창했다. 그는, “아아, 나는 어떻게 해야 동심을 잃어버리지 않은 진정한 대성인을 만나 한마디의 말과 한 구절의 문장이라도 함께 할 수 있을까?“ 탄식했단다. 일부러 글을 쓰려고 힘써 감성을 자아내기보다는 가슴속과 목, 입에 오래도록 묵히거나 쌓아 두라고 한다. 참거나 막을 수 없이 저절로 치솟아 나올 때가 되어서야 옥구슬과 같은 문구를 토하듯 뱉어내라 말한다. 그래야 비로소 하늘의 은하수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천연의 문장을 짓게 된다니, 누구에게나 그런 때가 올 수 있을까 싶다.  

 

 대장정은 쇼펜하우어의 문장론으로 마무리했다. 쇼펜하우어는 독서란 자기 사상을 만드는 에너지의 공급원이라고 강조한다. 독서라는 에너지를 바탕 삼아 자기 사상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참된 독서법이라는 것이다. 독서의 재료와 대상, 즉 텍스트를 단지 책과 문자에만 국한하지 말고 세계로 확장해야 한다는 것. 세상 그 자체를 주요한 텍스트로 삼아 책도 읽고 글도 쓰라는 주장이다. ‘세상’이라는 폭넓은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 얼굴이 살아온 세월의 축적된 결과인 것처럼, 자신의 문체는 사색과 자득의 과정이 누적된 결과물이므로. 쇼펜하우어는 독서와 사색과 글쓰기는 하나라는 견해다. 그렇듯 스스로 힘으로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게 되는 그 순간, 사람은 돌에서 별이 된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그렇게 별이 된 철학자라고, 저자는 ‘자득의 힘’을 강조했다.

 

 작가는, <글쓰기 동서대전>을 완독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한다면, 글쓰기의 철학과 비결 즉 개성적이고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글쓰기에 한발 다가서리라 호언장담했다. 1주일 만에 완독했지만 다가섰기보다 오히려 모호하다. 다만 그 길을 지향할 뿐이다. 사색을 통해, 사색을 녹여 간결한 문체와 적확한 표현의 글쓰기! 그저 내겐 요원하게만 느껴진다. 책을 읽다 보면 그 속에서 일어나는 연쇄반응이 있다. 책 속에서 책을 발견한다. 공저까지 포함해서 책 열두 권을 샀다. 책 읽는 여름이 행복하다. 지구촌은 기록적인 무더위로 기진맥진이다. 기상 관측이래 111년 만의 일이란다. 온열질환자가 발생하고, 가축 폐사에, 가뭄 등 우리나라를 넘어 지구촌이 이상기후로 고전 중이다. 혹서의 여름나기가 힘겹지만, 평일에는 에어컨이 있는 사무실에서, 휴일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처서가 한 열흘 남았다. 읽을 책이 줄 섰으니 내겐 이 여름이 더디 가도 무방하겠다.

                                                                  (2018.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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