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다리에 담긴 정

2018.08.19 05:00

최정순 조회 수:5

봉다리에 담긴 정

    안골노인복지관 수필반 최 정 순

 

 

 

  “누가 가져다 놓았을까?

 

  외출하고 돌아와 현관문을 열려는데 손잡이에‘비닐봉다리’가 매달려 있었다. 궁금하여 열어보니 상추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사람이 없는데 참 이상했다. 출처를 알아내려고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다가 우선 상추를 씻었다. 잘 먹었다는 인사는 다음으로 미루고, 상추쌈으로 그날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상추사건을 까맣게 잊고 며칠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카톡이 울렸다. 잠깐 밖에서 만나자는 내용이다. 속옷차림에다 앞치마만 두르고 영문도 모른 채 쪼루루 내려갔다. 그녀의 손에 봉다리가 들려있었다. 그때서야 상추의 출처를 알았다. 내 입에서 잘 먹었다는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어제 밭에서 뜯어왔다며 먹어보란 말만 남기고는 손사래를 치며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버렸다.‘그러면 나는 무엇을 주어야 한 담?’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헛바람 빠지는 소리만 연신 하고서는 큰 봉다리를 받아들고 들어왔다. 그 속엔 상추, 아욱, 오이, 고추, 쑥갓, 두릅, 등 봄나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벼룩도 낯짝이 있지!’그녀한테서 카톡이 오면 나는 무엇을 들고 내려가야지 하는 생각이 앞섰다. 행여 이런 말을 하면 다시는 안 만난다며 엄포를 놓았다. 있으니까 나누는 것을 부담으로 생각하냐며 오히려 나를 나무랐다. 그녀에 비하면 내 인사는 새 발의 피,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길게 이야기할 시간도 없다. 그녀에게 그 때는 무척 바쁜 시간이다. 손자손녀 학교 보내랴, 유치원 보내랴, 그리고 나서 자기 취미활동 가랴, 일주일이면 몇 번씩 밭에 가랴, 몸뚱이 하나로 몇몇 역할을 하는지 모른다. 몸이 열이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대단한 여자, 부지런한 여자, 그녀가 바로 민혁이 할매다.

 

  작년 봄이던가? 진안에다 고추 몇 포기와 푸성귀를 자기네 먹을 만큼 심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러더니만 밭을 샀다는 이야기, 불도저로 땅을 밀었다는 이야기, 돌을 치우는데 몇 날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내 일이 아니라서 잊었다. 가을이 왔다. 고추며 콩 농사는 잘 되었는데, 고구마 농사는 망쳤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제야 속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한 번쯤 그녀의 밭에 따라가고 싶었다. 차마 입이 안 떨어졌다. 그러던 중에 작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시간이 있으면 자기네 밭에 같이 가자는 말에 얼싸덜싸 깨춤을 추었다. 내가 먼저 밭에 도착해서 주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랬더니 밭에 들어가 고추를 따지 그랬냐는 것이다. 컴퓨터를 하는 사람끼리도 네티켓 즉 인터넷예절이 있는데 하물며 주인도 없는 밭에 처음 온 내가 먼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진안군 덕천면에 자리한 밭. 남향받이 마을입구 그녀 집 옥상에 햄ham안테나가 이곳을 찾기 쉽게 길잡이 역할을 했다. 햄이란 비전문적으로 무전기를 조작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잘 모르지만 기계설치가 송신소를 방불케 했다. 남편이 무전으로 교감하는 아마추어 무전사란다. 이곳이 원래 남편고향이기도하고. 6백 여 평 남짓한 밭에는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었다. 먹을거리가 흔전만전이다. 밭 첫 들머리에 농막이 있고 큰 비닐하우스를 지어 비가 오면 뭐든 집어넣을 수 있었다. 스프링쿨러 9개가 군데군데 놓여있어 200m 지하에서 끌어올린 물로 가뭄에도 끄떡없단다. 심어진 채소나 과일나무들을 일일이 열거하라면 주인도 종류가 많아서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아는 것은 겨우 콩, 깨, 호박, 가지, 상추, 배추, 정도였다. 외국에서 들여온 작물도 있었다. 콩이면 콩이지 웬 종류가 그리 많은지. 강낭콩, 메주콩, 쥐눈이콩, 밥밑콩, 등 콩 한 종류만도 의약품 수만큼이나 많았다.

 

  고구마는 망쳤다더니, 대가 어찌나 실한지 갈대 같았다. 염치불구하고 욕심껏 뜯었다. 하늘 한 번 쳐다 볼 사이도 없이, 이제야 하늘을 본다. 아, 그날따라 가을하늘이 쪽빛물감을 풀어 놓은 듯 호수같이 맑고 청명했다. 그래서 가을하늘을 에메랄드니 옥빛이니 남물이 들었다느니 등으로 노래하나보다. 새삼 내가 시인이 되고 수필가가 되어 저 하늘 속 바다로 날아가고 싶었다. 내 머리위에서 선회하는 고추잠자리가 부러웠다. 가을해는 짧았다. 그래서 고약한 시어머니가 가을엔 딸을, 봄엔 며느리를 밭으로 내모는가 보다. 서둘러야 했다. 덤으로 가을무를 비롯하여 이것저것을 봉다리봉다리 챙겨 실어주는 손아래인 그녀가 그날만큼은 올케 같았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상표를 만들었다. 이름을‘좋은 이웃표’라 지었다. 아직 상표 허가는 받지 못했지만말이다.

 

  우리 집도 논농사 밭농사를 짓고 살았다. 그때는 주먹구구식으로 농사를 지었다. 정확한 일기예보를 들을 수 있는 라디오 한 대도 없었다. 오직 하늘만 바라보며 하늘에 맡겼다. 아버지를 보며 농사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물꼬를 보러 가신 아버지가 밤늦도록 오시지 않으면 등잔불을 켜들고 동생이랑 강아지랑 강둑을 걸었던 일이며, 타작도 일일이 손으로 홀태질을 하여 훑었다. 어느 핸가는 가을장마로 벼에 싹이 터서 쌀이 싸라기가 되어버린 해도 있었다. 그 애로사항을 어떻게 일일이 다 말하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사가 밥줄이라서 포기할 수도 없었다. 나는 보릿고개를 경험한 해방둥이 세대다. 그래서 민혁이 할배와 할매의 노고를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덥석 받는 손이 부끄럽다  

 

  많은 양의 농사를 지으려면 시설비도 만만치 않게 투자해야 하나보다. 밭까지 들어갈 수 있게 제작한 작은 용달차며 건조기, 세척기 등을 갖추고 있었다. 현관문 손잡이에 매달린 봉다리의 인연으로 10여 년 만에 간장을 담갔다. 베란다에서 간장 익는 냄새가 고추잠자리를 부른다. 간장뿐 아니라 고춧가루, 김장김치, 고구마대김치, 상추김치까지도‘좋은 이웃표’다. 오늘도 깻잎 한 봉다리를 꾹꾹 눌러주고는 김치 담느라 귀찮지 않았냐며 염려하는 그녀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좋은 것으로 골라서 이 집 저 집 나누어 주면서도 미안해하는 마음. 생각 같아서는 가서 풀이라도 뽑아주고 고추라도 따주고 싶은데, 더위가 무서워 선뜻 나서지도 못하여 미안할 따름이다.

 

 

 

                               (2018.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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