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 이야기

2018.09.12 16:52

김성은 조회 수:40

우리 아빠 이야기

신아문예대학 목요야간반 김성은

...

도종환 시인의 '꽃씨를 거두며'라는 시를 읽었다.

사랑한다는 일은 책임진다는 일임을. 기쁨과 고통, 아름다움과 시듦, 화해로움과 쓸쓸함,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를 책임지는 일이어야 함을….

우리 아빠는 한국전쟁 현장에서 출생하셨다. 9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난 우리 아빠는 젊은 시절 인쇄업을 하셨는데, 공장과 사무실에는 늘 달력과 연하장이 산처럼 높이 쌓여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 우리 집에서는 손수 카드 속지를 붙이거나 화장품 라벨을 만드는 작업판이 시시때때로 벌어졌다. 동네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나도 한 몫 거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빠는 이유없이 시력이 나빠지는 딸을 위해 교과서를 확대하여 아빠표 큰책을 만들어 주셨고, 깎두기 공책 줄도 진하게 제작해 주셨다.

우리 아빠에게는 아들이 없다. 아빠 형제분들 중에서도 우리 아빠만 딸부자다. 게다가 맏이인 내 눈이 이유없이 나빠지고 있었으니, 젊은 아빠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솔직히 나는 아빠에게보다는 엄마의 입장과 감정을 이해하기 쉬운 딸이다. 그래서 아빠를 원망한 날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보다는 아빠의 유전자가 더 진하게 발현된, 누가 보아도 아빠 딸임이 확연한 아빠 분신이다.

아빠는 신문 중독자고, 그의 딸인 나는 책 중독자다.

아빠는 경우가 매우 바르시고, 그의 딸인 나도 무경우한 사람을 제일 싫어한다.

아빠는 해산물과 곱창을 좋아하신데, 그의 딸인 나도 해산물과 곱창이라면 만사를 제치고 OK다.

아빠는 시적 감성이 풍부하시고, 그의 딸인 나는 수필을 창작할 때 행복하다. 이 뿐인가? 단점도 닮았다.

아빠는 화가 나면 입을 조개처럼 꼭 다물어 버린다. 그의 딸인 나도 몇날며칠 말을 하지 않는다.

아빠는 싸움에서 잘 진다. 그의 딸인 나도 싸움 끝에 혼자가 되어서야 하지 못한 말들이 생각나서 이불 킥을 날려대기 일쑤다. 이쯤되면 우리 엄마가 아빠 배우자로 사시면서 토로했던 고충이 나의 남편 것과 닮은꼴일 수 밖에….

내가 대구에서 대학을 다닐 때 일이다. 주말이라 서울 집에 와서 쉬고 있는데 아빠가 슬그머니 방에 들어오시더니 아무 말씀 없이 책꽂이에 무언가를 가만히 놓고 나가시는게 아닌가? 난 의야해서 아빠의 기척을 살피다가 왜 그러시냐고, 뭐 두고 가셨냐고 여쭈었다. 그랬더니 아빠가 너무도 태연하게 하시는 말씀이 "응, 오늘이 어린이 날이잖아?" 하시는 거였다.


빵 터지는 웃음을 깨물며 발딱 일어나 책꽂이를 만져보니 거기에는 크레커가 한 상자 놓여 있었다. 내 나이 스무살이 넘어 대학교를 다니던 때였으니, 그 순간 황당했던 기억이 어찌 특별하지 않을 수 있으랴. 며칠 전에는 퇴근한 우리 식구가 친정 어머니 댁에서 저녁을 먹는데, 메뉴가 닭볶음탕이었다. 아빠는 또 너무도 태연하게 다리를 하나 골라 사위가 아닌 딸에게 건네주셨다. 여덟살 귀염둥이 손녀도 함께 식탁에 있었건만, 아빠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닭다리를 내 밥그릇에 얹어 주셨다. 심지어 식사를 마치고 나면 내가 미처 처리하지 못해 밥그릇 안에 붙어 있는 밥풀 하나까지 손수 싹싹 긁어 숟가락을 내 입에 넣어주시는 양반이시니, 초등학생 딸 앞에서 어미 체면이 말이 아니다.

9월 9일은 친정 부모님의 40주년 결혼기념일이었다. 마침 우리 집 부녀가 제주 데이트를 떠나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 셋이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오리구이를 먹으러 가자며 자리를 만드신 아빠는 엄마께 40년을 살았다면서 허허롭게 웃으셨다. 40년 세월을 함께 하시는 동안 두 분 가슴에 맺힌 감정빛은 과연 어떤 색깔일까? 나는 문득 붉은 와인빛을 떠올렸다. 오랜 시간 숙성되어 고혹적인 빛깔로 그윽한 향기를 내뿜는 와인같은 내 부모님의 사랑과 세월에는 떫은 맛과 신맛도 녹아 있으리라. 모진 운명을 함께 헤쳐 오신 두 분의 40주년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며, 자동차 뒷자리에 앉은 큰딸은 마음을 모아 가만히 존경과 감사의 박수를 보내드렸다.

(2018.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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