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 友

2018.09.19 05:24

김현준 조회 수:4

사우(思友)

안골은빛수필문학회 김현준

 

 

 

  긴 인생길에서 친구를 만나고 헤어졌다. 한 친구를 오래 사귀면 지루해질까 봐, 세월 속에 갈라서기도 했다. 살며 아쉬워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친구라고 나는 애써 이해했다.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난 이도 있고, 어디서 어찌 사는지 모르는 친구도 많다. 연락할 전화번호를 적어놓고 1년에 한 번이라도 확인할 걸 그랬지 싶다.

  친구를 사귀는 것은 기쁨과 괴로움을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거늘, 나이가 들수록 많은 친구는 필요치 않다. 그래서 직장을 옮길 때마다 친구를 만났다 헤어지곤 했다. 이제 옮겨야 할 일터도 없고 사귈 친구도 없어 옛일이 그립다. ‘더 잘 할 것을’ 하고 후회하면서 말이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가족을 팔아 친구를 사고, 친구를 따라 머나 먼 강남을 간다고 했다. 결혼을 한 뒤에는 가족이 곁에 있으니, 친구가 없어도 괜찮았다. 이제 노년에 접어들어 자녀들이 내 곁을 떠났고, 아내와도 거리감이 생기면서 옛 친구들이 그리워진다.

 

  농촌에서 도시로 나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음악양쪽정렬시간에 처음 배운 노래가 이은상의 시를 박태준이 작곡한  ‘사우’였다. 그때만 해도 향수병 초기 증세로 몸살을 앓던 시기라 노랫말이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봄의 교향악이 어떤 소리일지, 청라언덕은 어디에 있으며, 백합은 얼마나 예쁜지, 마음속으로만 상상했다. 중년에 대구를 찾아가 동산동 청라(靑蘿)언덕을 올라가 보았지만, 정작 내가 꿈꾸던 곳은 아니었다. 도심 한 복판의 나지막한 언덕인데, 주위 건물 벽에 담쟁이덩굴이 무성했다. 작곡가 박태준은 계성학교를 다니면서 이 언덕을 오르내렸고, 흠모하던 신명학교 여학생을 백합으로 표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은상 시인의 고향인 마산의 노비산 청라언덕은 지역 인사들이 만든 가공의 이름 같다. ‘사우’는 친구 태준의 짝사랑 이야기를 듣고 이은상이 쓴 시다. 두 사람은 마산 창신학교에서 함께 근무한 때가 있었다. 나의 청라언덕은 고향 성황산 고개를 오르는 가파른 언덕이다. 주위엔 주황색 산나리가 피어나고 나의 꿈과 짝사랑이 어린 곳이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친척집 가게 다락방으로 고향 친구 Y가 찾아와 며칠을 함께 보냈다. 떠나기 전날 Y는 교복 상의를 빌려 달라고 했다. 하루쯤 대학생이 되어 서울 시내를 활보하고 싶었으리라. 다음 날 쪽지 한 장 남기고 떠났다.

  ‘친구야! 며칠 동안 즐거웠다. 너의 따뜻한 우정을 깊이 간직하며 거친 세상에 나가려 한다. 힘들 땐 서로를 기억하자. 안녕!

  몇 년 뒤 Y는 서해 바다에 투신했다. 가족이 모아 준 사업자금으로 가게를 냈다가 실패한 듯했다. 그때 조금만 참았더라면,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했더라면 충분히 재기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마음이 여린 친구였다. 안타깝다. 그 친구는 지금도 풋풋한 젊은이 모습으로 내 기억 속에 살아있다.

  또 한 친구 S가 생각난다. 아버지가 · 25전쟁에 참전했다가 화천 전투에서 전사했다. S는 홀어머니와 함께 천호산 자락 초가에서 외롭게 성장했다. 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병역면제 혜택을 받고 은행에 취업했다. 그는 중학생 때 주산을 제일 잘했다. 어쩌다 빈털터리 대학생 친구를 만나면 공중목욕탕에 데려가 때를 벗겨주고 탕수육과 자장면을 사주었다. 그런 친구에게 한 번도 보답하지 못했다. 기회가 오려니 했는데, 그때마다 ‘훈장이 무슨 돈이 있다고….’ 하면서 먼저 계산을 하곤 했다.

  S는 재산도 모으고 아들 딸 잘 키워 자수성가했다. 내 어머니는 그 친구의 어머니를 부러워하셨다. 6 · 25전쟁 때 미망인이었던 젊은 새댁에게 말년 복이 필 줄은 몰랐다고 동네 할머니들은 얘기했다.    

  그 친구, 몇 년 전에 세상을 버렸다. 남에게 말 못할 신병이 있었다고 했다. 이제 할 일 다 마치고 둘이서 고향에나 놀러가자고 할 때인데, 그가 없어 나는 외롭다. 그게 인생인 것을 어찌하랴.  

         

  올 가을에는 고향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코스모스 핀 들길을 걸어 성황산 청라언덕에 오르고 싶다. 황금물결 출렁이는 논둑길을 걸으며 옛 사람을 기억하리라.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고, 이승과 저승이 하나되는 곳, 그곳에서 그들과 맘껏 얘기를 나누고 싶다.

                                                                 (2018.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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