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당과 산정원의 전원교향곡

2018.10.08 06:46

이해숙 조회 수:50

안아당과 산정원의 전원교향곡                                                

-송종숙 수필집 <보라색이 어울리네요>를 읽고-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이해숙

 

 

 

 

 

 어울린다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말이다. 옷도 글도 자연스러울 때 아름답다. 어울린다는 것은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의 또 다른 표현. 부부가 함께 감행한 탯자리로의 귀향은 바로 자연성의 구현, 남은 생을 자연 속에서 구가하려는 귀거래사이리라. 흘러가는 강물이 거슬러 올라 발원지로 방향을 돌릴 수 없듯, 우리의 인생도 앞으로만 나아간다. 생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발전적 변화를 추구함이 수구(守舊)보다는 나은 행보임에랴. 작가가 고향 집에서 느끼는 자연의 은혜는 무궁무진하리라. 수정같이 맑은 공기와 별빛만으로도 넉넉할 고향의 생가 안아당과 별채 산정원에서는 별의 기척도 들리지 않을까? 노 부부가 함께 윤이 나도록 매만진 고가(古家)와 정원, 글로 엮어내는 전원에 깃든 삶은 넉넉하고 평화로운 한 폭의 진경산수화였다.

 

  2010년에 출간된 첫 수필집 <안아당의 오후>는 제목이 주는 안온함이 있었다. 안아당(安雅堂)은 시댁 생가의 당호이자 남편이 선물해 준 송종숙 수필가의 아호(雅號). 그의 남편은 인생 절정기에 상경하여 성공적인 청․장년기를 보냈고 은퇴 후 솔가하여 40년 만에 하향했다. 수필집 첫 장에는 남편의 정감어린 책 출간 축하글이 실려 있어 퍽 인상적이었다.

 송종숙 수필가를 문학회에서 뵙고, ‘얼굴에서 맑은 물색을 띤 고상한 운치’를 느꼈었다. 심성 따뜻한 큰어머니 같은, 철딱서니 없이 천방지축인 손아랫동서쯤 어르고 달래 따끔하게 가르치고 끌어안는 품 넓은 손윗동서 같은 인상이었다. 3년 전쯤인가 그분의 작품 ‘누름돌’을 문학 카페에서 읽고 다른 작품들이 몹시 궁금해 첫 수필집을 청해 읽었다. 작가가 국문학을 전공했다는 것도 새롭게 안 사실이었다. 인생을 웬만큼 살고 보니 생의 의미는 ‘감동’인 것 같다고 작가는 말한다. 사람의 가치 있는 덕목은 ‘공감’(동감, 감동)이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의 슬픔에 슬퍼하고 기쁨에 기뻐하고 분노에 분노할 줄 모른다면 아무리 훌륭하다고 떠들어도 반 푼의 가치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볼 때 감동과 공감은 맥이 통한다고 생각한다.

 

 임어당은 ‘자연은 사람의 삶 전체 속으로 들어온다.’고 했다. 봄날 눈록(嫩綠)의 산색과 다사로운 햇살, 여름 장마와 야성적인 성장을 도모하는 나무와 풀들, 가을 소슬한 들녘 꽃잎 날리는 억새와 허허로운 수숫대, 겨울 몽실몽실 눈 모자를 쓴 앞뒤 뜨락의 상록수와 눈 덮인 기왓골의 섬세한 무늬. 사계절은 변화하면서 적절히 흥취를 돋우리라. 이렇듯 자연과 살을 맞대고 들여다보는 계절의 변화, 온몸으로 표현하는 나무와 식물들의 언어. 그들은 자연이면서 작가의 분신이며 공생의 벗이 아닐까? 송종숙 수필가의 글을 읽으며 ‘정중동’의 기운을 느꼈다. 사방 눈길 닿는 곳 모두가 시와 산문일 터, 분홍 복숭아꽃의 화사함과 마당 한비짝 직접 만들었다는 조그만 연못 속 비늘 영롱한 물고기의 활력. 새들 명랑하고 모나지 않은 마음 같은 서정이 글 속에서 톡톡 터져 나왔다. 그의 수필은 다분히 회화적이다. 글을 읽다 보면 이마 위로 그림이 그려졌다. 글과 그림은 같은 뿌리, 다른 가지던가? 단문으로 이루어진 문장은 경쾌한 리듬을 탔다. 그의 글은 전원에서 피워내는 전원교향곡이었다. 편편(片片)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수놓은 말간 자수(刺繡) 느낌이 들었다.

 

 제2 수필집 <보라색이 어울리네요>는 작가의 첫인상과도 잘 어울리는 연보라색 장정이 새뜻했다. ‘편안하고 우아한 보금자리’의 소망이 어린 당호 ‘안아당’과 ‘평안 속에 우아한 삶의 마무리’의 염원이 담긴 아호(雅號) ‘안아당’. 후회 없는 젊은 시절을 보냈고, 비교적 성취한 삶을 살았다는 자부심의 글을 읽고 일견 부러움도 일었다. 김승옥의 단편소설 ‘무진기행’이 생각났다. 도회지로 떠났다가 고향 시골 마을을 찾았지만, 동화될 수 없어 쓸쓸한 이방인인 주인공. 이상의 수필 ‘산촌 여정’도 어렴풋이 기억났다. 도시에서 즐기던 엠제이비 커피의 미각을 잊어버린 지 스무날 정도 된다는 도회적인 표현의 서두. 산촌 풍물에의 감상적인 정취와 대비해,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시름을 담고 있던 수필이다. 송종숙 수필가가 영위하는 전원의 생활과 그 생활을 담아낸 글을 통해, 두 문학 작품 속 주인공보다도 작가가 더더욱 행복해 보였다. 일상은 그냥 두면 지나가는 순간에 불과하지만 글로 옮겨 담으면 색다른 의미와 가치로 영원히 남게 된다. 작가의 보라색에 대한 단상, ‘순정 같은 연보라색에서 슬픈 멍 같은 진보라색, 초연한 듯 외로운 분위기’ 등 여러 글귀에서 공감되는 부분을 발견했다. 나도 보라색에 대한 환상이 있다. ‘청색의 차디찬 이성과 홍색의 뜨거운 감성이 만들어내는 지성적인 보라색’을 좋아한다. 젊은 시절, 좋아하면서도 제대로 분위기 나게 입어 보지 못했던 보라색을 노년이 되어 입어 볼 용기가 생겼단다. “보라가 너무 잘 받는데요? 그 빛깔 참 어울리네요!” 이런 코멘트를 해준 사람 덕분이란다.

 

 이따금 은은한 보라색을 지긋이 바라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떠오른다. 그 모호하고도 고요한 모나리자의 미소, 세기적인 대화가인 다빈치는 혹시 그의 걸작 <모나리자>의 화폭 속에 지극히 신비로운 보랏빛 아우라를 감쪽같이 숨겨 넣은 건 아닐까. 안개를 머금은 듯 모나리자의 미소에서 은은하고 삭연한 보랏빛 향수가 느껴져서다. 보라색은 청색의 차디찬 이성과 홍색의 뜨거운 감성이 어우러져 미묘하게 지성적 분위기로 멋지게 태어났다. 마치 화가 뭉크의 그림처럼 우울한 듯 착잡하게 가라앉은 그 우수의 깊이는 비밀스럽고 사색적인, 밀도 깊은 물색이다, 보라색의 저력인가 싶다. 새삼스레 거울을 보며 엉거주춤 몸매를 비추어본다. 이 나이에 무슨 옷을 걸친들 맵시가 나겠는가? 그런데도 행여 보라색이 내게 어울리지 않나, 이쪽저쪽 허리를 꼬아본다. 이렇게 용기를 내 보는 것도 주위의 응원 덕분이다. 보라가 너무 잘 받는데요. 그 빛깔 참 어울리네요! 이런 코멘트를 해준 사람도 있었으니까. 사실, 좋아하면 닮아간다고 하던데, 어쩌면 보라가 내 정체성의 어느 부분 같기도 하고. 그래! 보라가 어울린다면.   [보라색이 어울리네요]

 

 머릿속과 마음속을 오간 수천수만의 심정과 감정의 기복을 글로 옮겨 묘사하는 일은 일상의 재발견이자 재창조라 할 수 있다. 평범한 나날에 숨결을 불어넣고 생명을 부여하는 일일 것이다. 인간과 동물은 차이와 다양성으로 존재한다. , , , 벌레, 동물, 미미한 생물도 저마다 지극한 경지를 가지고 있어 하늘과 자연의 묘한 이치를 살펴볼 수 있다. 원래 고양이를 싫어해서 마당과 집 안팎을 드나드는 들고양이들을 본척만척했었단다. 그렇게 일정한 과정이 지나자 은연중에 눈길이 갔고 먹이까지 챙겨주게 되었단다. 동물들의 세계를 깊이 들여다보는 모성의 눈빛이 따사롭다. 어미 고양이 네 마리는 새끼 구분 없이 어느 놈이든 다가오는 대로 젖을 물리고, 새끼고양이 열다섯 마리는 아무 어미나 내키는 대로 달라붙어 젖을 얻는다. 이보다 더 평화로운 세상이 어디 있을까?

 

  본척만척했던 내가 그래도 몇 마리는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버렸는데, 그토록 대부대가 덤비면 어떡하란 말인가? 어미 암고양이 네 놈과 수고양이 두 놈 해서 여섯 마리에다 새끼들 열다섯만 합해도 무려 스물한 마리가 되는 셈이니 내가 어찌 한숨이 나오지 않겠는가? 한낮에 감나무 시원한 그늘에 누구 품인지 따지지 않고 또 누구 자식인지 차별도 않고 저렇게 무심 태평하게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세계가 부럽다. 인간 세상도 아무도 경계 않고도 이처럼 사이좋게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그런 평화가 온다면 오죽 좋을까.   -고양이 세상-

 

 

 원종린 선생님을 추억하는 지인들로부터 한결같이 ‘밥을 참 잘 사셨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들었다. 젊은 사람이 시간을 할애하니 지갑은 내가 열어야 한다시면서. 나이가 들수록 ‘말은 줄이고 지갑은 열고’라는 경구는 우리에게 주는 금언 같다. 송종숙 수필가도 밥 인심이 후한 사람을 인간미 있는 사람, 밥과 인간성을 동일시했다. 수천 년 질리지 않는 맛, 순후한 인품 같은 밥 같은 사람이 많을수록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이란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생활에서 너나 할 것 없이 계산적으로 산다. 각박한 세상살이 속에서도 둥글게 모가 깎인 밥주걱을 생각한다는 작가의 일침에 숙연해진다.

 

 밥은 따뜻한 육친의 정 같다. 결코 한 알의 알곡만으로는 밥이 되지 않는다. 수많은 낟알이 오순도순 한 덩이로 뭉치는 시간이 익어야만 밥이라는 실체가 이루어진다. 지지고 볶으면서도 인연으로 엉키어 사는 인간 살이 형태다. 밥은 저 혼자서 맵고, 짜고, 시고, 달고, 쓴 수많은 반찬을 흔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사람의 성품이라면 참으로 괴팍하고 얄궂은 성깔까지도 묵묵히 인정하는 너그러움, 여유로움이다. 온 가족을 품어주는 어머니의 미소같이 밥은 모든 걸 포용하는 온화한 모성이다. 돌아가신 우리 시조모님을 사람들은 ‘날아가는 까마귀도 불러 밥을 먹일 분’이라고 했다. 생전에 얼마나 후덕한 성품이고 남을 위해 얼마나 밥을 많이 푸셨는지. 각박한 세상이지만 할머니처럼 정겨운 분을 만날 때는 나도 모르게 모가 깎여 둥글게 닳아진 밥주걱을 생각한다. 그런 분들은 오랜 세월 밥 냄새가 젖어 들어 몸에 밴 것일까?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누룽지 향이 난다. 희로애락에 절인 구수한 밥 냄새다.    --

 

 인간의 삶은 돌, 돌멩이의 활용으로 발전해 온 듯하다. 돌서덜의 돌은 그냥 자연이다. 돌멩이 하나를 주워와 내 생활에 활용하면 문화가 된다. 돌확, 맷돌, 구들돌, 불돌, 온돌 등 생활과 밀접한 돌 이름들이 정겹다. 논다랑이 물꼬를 보는 물돌, 칼의 날을 세우는 숫돌, 풋고추를 짓이기거나 잡곡을 갈던 풋돌 등. 이 돌들은 우리들 생활 깊숙이 들어와 문명의 이기로 발전했다. 작가는, 둥글넓적한 무생물인 돌을 내 생활로 끌어들여, 생명을 부여해 의미를 발견했다. 돌은 유용한 도구가 되었고 문화가 되었고 철학을 틔웠다. 김칫거리를 들뜨지 않게 누름질 하는 무겟돌의 변신이다.

 

 누름돌이란, 장아찌를 담글 때, 항아리 속 재료가 뜨지 못하게 맨 위에 얹어서 지그시 눌러주는 묵직한 돌덩이를 말한다. 우리네 삶에서도 분명 누름돌 같은 묵직한 존재가 때때로 필요할 성싶다. 지금 우리 집에서는 남편이 또한 그런 누름돌일 것이다. 인생이란 항해에서 언제나 식구들의 안녕을 위해 그는 온 힘을 다하여 단단하게 키를 붙들고 있다. 출렁이는 뱃전의 중심을 잡고 있는 묵직한 닻과 같다. 가장이란 자리는 참으로 막중한 누름돌일 것이다. 아이들의 말똥말똥한 눈망울을 보면 흠칫 내가 그들의 누름돌이어야 함을 깨닫는다. 또한 내 아이들이 내 인생에 가장 큰 무게, 나의 누름돌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자꾸만 어긋나고 비뚤어지는 세상에 너와 나는 서로서로 굄돌이 되어 의지하고 살아왔을 거다.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가 의지하고 사는 공생의 인연들이다. 하찮은 존재끼리라도 서로에게는 묵직한 믿음으로 피차간 균형이 되고 조화가 되어줘야 하리라.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주 각별하고 소중한 누름돌 같은 존재라고.        - 누름돌-

 

 

 인간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 지나온 세월 동안 남편의 성실 덕분에 내 모습을 그대로, 나를 지키며 살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인생의 가을, 하늘에 걸린 달을 보며 떠나버린 바람 같았던 세월에 대해 아쉬움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본연의 허허로움일 것이다. 온 평생 집과 직장밖에 모르던 남편이 예순셋의 나이에 퇴임하게 되어 함께 살아온 날을 반추해 본다. 별 구애 없이 산 세월이었지만 움퍽질퍽한 주름진 길도 지나오며, 잠들어서도 얼굴 주름이 펴지지 않는 모습에 애잔해 한다. 가장의 골팬 주름이 경쟁 사회에서 당당한 일원이 되기 위해, 가족들의 안위를 위한 발버둥 친 흔적임을 알기에 고맙고 미안하다. 그 노고를 알아주고 위로해 줄 때 잠시나마 서로의 얼굴 주름이 펴질 것이다.

 

 은퇴 이후 요즘, 남편은 조용한 시골 생활을 즐기고 있고 나도 이제 매일 다림질하는 일은 거의 없다. 살아간다는 것은 주름이 져가는 것이고 생활이란 그 주름을 다림질해가는 것일 거다. 인간 세상에 켜켜이 엉킨 주름이 다 어딜 가랴? 먼바다 파도가 쉼 없이 밀려와 끊임없이 주름지듯이 아직도 우리가 펴고 갈 삶의 주름은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밟고 가는 인생길일 뿐이다. 성실하게 지나왔으니 주름은 세월의 훈장이고 자랑스러운 삶의 관록이다. 삶이 너무 서글프고 많이 피로하더라도 곱게 자락을 펴 다림질하며 살 때 우리의 세월은 한결 아름다운 물결로 수놓아질 것이라고 홀로 가늠해본다-다림질-

 

 송종숙 수필가의 글은 순수하고 맑고 밝다. 질박한 아름다움이 전편(全篇)에 드리워져 있다. 애써 꾸미려 하지 않으니 현학적이지 않다. 읽기 수월하니 감동도 컸다. 오랜 도시 생활의 희로애락을 뒤로하고 노년에 돌아와 전원에서 만끽하는 자유와 평화가 그래서 더 소중할 것이다. 문득 떠오르는 시가 있다.

 

하늘의 여러 시렁 가운데서 / 제자리를 떠난 별을 보제 되거든

별에게 충고하고 싶더라도 /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 강물에게 등을 떠밀지 말라

강물은 나름대로 /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의 강물 /  장 슬로우>

 

 평생의 반려를 있는 그대로 봐 주고, 인정해 주고, 기다려 주고, 재촉하지 않고, 그렇듯 살아왔으리라. 노 부부의 전원생활이 아름답게 보인다. 세상을 향해 안간힘을 쓰며 온갖 노력을 다했었는데 결국 손오공처럼 기껏 부처님 손바닥에서 뱅뱅 돌며 헤맸다 싶더라도 최선을 경주한 삶이었기에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은 없으리라. 흐르는 세월은 우정을 돈독하게, 사랑은 약하게 변화시킨다. 이제 부부는 우정으로 사는 것이다. 송종숙 수필가는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서 깨달음과 위안을 얻고 글감을 찾아냈다. 까치, 제비꽃, , 메뚜기, 송사리, 고양이, , 두엄자리 등. 특별하지 않은 것에서 특별한 것을 배우고 발견하는 따뜻한 마음이 가치를 더하는 이유다. 자연과 뭇 생명에 대한 사랑이 마냥 곱다. 쥘 로의 '사랑은 우정이 놓일 자리를 한 단계 높여 향기롭게 한다.'를 생각하며, 송종숙 수필가께서는 전원에서 더욱 건강한 삶을 꾸려나가시고 반짝이는 많은 글로 세 번째 수필집 출간을 학수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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