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남의 몸부림

2018.11.09 09:16

홍성조 조회 수:7

추남(秋男)의 몸부림

                                           신아문예대학 목요야간반 홍성조

 

 

 

 

 옷을 흠뻑 적셨다. 대각선으로 때리는 비를 피할 수가 없었다. 우산은 받으나마나 소용이 없었다. 비닐우산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들은  쪼르르 미끄럼을 타고 여지없이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굉장히 아플 것 같았다. 대기 중의 수증기가 물방울이 되어 지상으로 떨어지면 10만 개 이상의 구름물방울들이 합쳐서 지름 0.5미리 크기로 빗방울로 형성되어 떨어진다고 하니, 자연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이 때 땅위에 뒹구는 낙엽들에게 얼룩진 오물들을 빗방울이 깨끗이 씻어내고 있어 낙엽들은 깨끗이 목욕을 한 셈이다.

 

 나는 학창시절을 생각하며 객기를 부려보기로 했다. 우산을 접어 오른손에 들었다. 빗방울은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다. 안경에 흘러내리는 물기가 앞을 가로 막았다. 가로등 불빛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방울을 비추면서 반사되어 뿌옇게 흐르는 안개비를 형성한 것처럼 보였다. 어두운 밤이라 우산을 받지 않아도 쳐다보는 사람들이 없어 좋았다. 옷은 이미 다 젖어 냉기가 엄습했지만 어두운 밤길을 걷는 것도 과히 나쁘지 않았다. 우산이라는 것은 혼자가 아니라 둘이 받아야 제 구실을 다한다. 한 사람은 우산을 들고 다른 사람은 비를 맞지 않기 위해 우산을 쥔 사람 옆으로 밀착되기 마련이다. 나는 혼자라서 우산을 접었는지도 모른다.

 

 차량 불빛에 비추어지는 초췌한 나의 모습을 위아래로 흝어 보았다. 영락없이 추남(秋男)이다. 누가 보면 실연한 남자로 보일 것이다. 비가 내리는 중에 바람이 획 지나가니, 색종이 조각들을 뿌리듯 가로등 불빛에 비친 낙엽들은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빗방울은 질서정연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불현듯 시골 초가지붕에서 쏟아지는 낙숫물이 떠올랐다. 처마 밑에 떨어지는 낙숫물에 돌이 패인 것을 본 적도 있다. 가벼운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고 하여 고사성어로도 '적천석(點滴穿石)'이라고 한다. 끊임없는 노력이 모아져서 뜻을 이룬다는 교훈을 말한다. 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류천석(山溜穿石)'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말 속담에 '도끼도 연달아 치면 큰 나무를 눕힌다.' '무쇠도 갈면 바늘이 된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등의 속담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오늘 날 한두 번의 실패로 좌절하는 청소년들에게는 귀감이 될 말들이다.

 

 요즈음 나는 마음의 감기를 앓고 있다. 쾌청한 가을 날씨인데도 밖에 나가기 싫고, 이상하게 마음도 싱숭생숭하여 괜스레 기분이 나지 않고, 책이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의학적으로 낮이 짧고 밤이 길어져, 이로 인해 기분을 주관하는 세로토닌은 줄어들고, 잠을 유도하는 멜라토니가 증가하기 때문이란다. 나이가 들어도 계절의 감정은 그대로인가 보다. 시인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 한 구절이 생각난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오늘도 나는 가을 남자의 마음을 글로 표현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그래야만 나의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될 것 같다. 이런 추남(秋男)의 몸부림을 그 누가 알아줄 것인가?                                                                                                              (2018.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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