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석란

2018.11.16 05:01

이희석 조회 수:2

초롱석란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이희석

 

 

 

  나는 한때 난초를 좋아했다. 늘 푸른 잎과 맑고 깨끗한 향기, 수줍은 듯 소박하면서도 고결해 보이는 자태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의 솔가리로 뒤덮인 양지쪽 산비탈에도 춘란이 지천으로​ 많았기에 언제라도 채취하여 원예용으로 즐겨 기를 수 있었다.  

  1980년대 말이었던가? 당시 전국적으로 자생하는 난 채집 붐이 일어났다. 잎과 꽃이 특이하고, 돌연변이 형태로 생길수록 희소성을 가져 고액에 거래되고 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실제로 직장 동료 한 명은 순창 가마골 등산로에서 변종 춘란 한 포기를 채취하여 수백만 원에 팔았다. 나도 귀가 솔깃하여 주말이면 가까운 산으로 난을 캐러 다녔다. 하지만 값나가는 난은 눈에 띄지 않았다.

  전국에서 몰려온 난꾼들이 마구 채취하는 바람에 흔해 빠진 고향 산골의 춘란도 보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얼마 전부터 산림청에서 무분별한 채취와 환경 오염으로 없어지고 있는 자생란을 보호하고자 자생란의 집단 분포지를 희귀 식물 자생지와 같은 천연 보호림으로 지정, 보호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이래저래 나의 비정상적인 난 애호는 일단 물 건너가고 말았다.

  그러던 것이 서너 해 전 어느 가을날, 금란지교로 교분이 두터운 선배에게서 이름 모를 난 한 촉을 선물 받았다. 어찌 된 난이냐는 물음에 이십여 년 전 누가 한 촉을 나눠 주어 그저 그런 난인 줄로만 여기고 길러왔는데 지금은 자기 집에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난이라고 밝혔다. 생소해 보여 난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모양새가 석곡(石斛) 같고 꽃이 별처럼 초롱초롱하여 ‘초롱석란’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단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꽤 그럴싸하다는 느낌이 들고 뜻깊고 고상한 선물을 받은 듯 설렜다. 석곡을 곧바로 보수와 통기성이 좋은 토분에 옮겨 심어 베란다 창가에 놓았다. 갓 포기가름된 어린 난이 낯선 토양에서 흔들림 없이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추운 겨울을 잘 견딜 수 있도록, 젖 뗀 아이 돌보듯 관심을 기울였더니 새순을 내며 잘 자라났다.

  그 이듬해 이른 봄이 되자 꽃대가 나오면서 일곱 개의 꽃망울이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그럴 땐, 창조의 순간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언뜻 스쳐 가곤 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더니 오월이 되자 활짝 꽃을 피웠다. 조그만 잎새 사이로 내뿜는 난의 향기가 어찌 이렇게 상큼할 수가 있을까? 꽃을 피우기까지 뿌리와 줄기와 잎이 얼마나 많은 인고의 과정을 거쳤을까? 각 지체가 제 할 일을 다 하며 살아내, 실팍한 줄기 끝부분에서 꽃대가 나오고 꽃망울이 생겼으리라 생각하니 퍽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가까이 다가가니 여인의 향수 같은 달콤한 향기가 그윽이 풍겼다. 난을 분양해 주신 선배와도 기쁨을 나누었다. 이왕 첫 번째 꽃을 완상하는 김에 실제 무슨 석곡인지 알아보니 ‘초롱석란’이라는 예쁜 이름과 달리 시중에 흔히 유통되는 ‘긴기아난’이었다. 호주가 원산지이고 ‘덴드로비움 긴기아눔’이 본이름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긴기아난은 석곡이라 불리고 가을에 낙엽 지면 대나무 같다고 하여 죽란(竹蘭)이라고도 불리고 있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본래 이름으로 칭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선배가 지어 준 이름이 더 맘에 들어 여전히 초롱석란이라 부르고 있다. 지금도 별 탈 없이 튼실하게 자라고 있는 베란다의 초롱석란을 바라보면 그때의 설렘이 되살아난다.

  난은 우정과 고아(高雅)를 상징한다고 한다. 사계절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잎 선이 그리는 넉넉한 모습과 맑고 청아한 향기를 갖는 난은 선인들에게서 사군자 중의 하나로 대우받아 왔으며 숱한 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난 앞에 서면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다. 고고한 자태에서 유호덕(有好德)의 군자를 연상하게 한다. 순수하면서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인 난을 볼 때마다 여인의 아름다움을 느낄 때가 많다. 특히 우의 깊은 선배가 준 우리집 초롱석란과 마주하는 시간이 제일 기분 좋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고결해 보이고 든든한 벗을 만난 것 같다. 빈 거울이나 명경지수처럼 맑고 마음이 깨끗해질 것만 같다.

                                                                     (2018. 11. 15.)

 

 

 

댓글 0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07 웃지 않는 사람들 한성덕 2018.11.23 7
306 농부, 빵모자를 쓰다 윤근택 2018.11.23 4
305 가치있는 노년의 삶 백남인 2018.11.23 5
304 김밥, 그 하루살이 홍성조 2018.11.22 7
303 전북노래자랑과 어머니 김윤배 2018.11.21 2
302 어머니를 그리며 백남인 2018.11.20 8
301 받아들여야 할 운명 김현준 2018.11.20 4
300 YS, 그 대도무문의 추억 김정남 2018.11.20 6
299 글로 그린 가을 모악산 정석곤 2018.11.19 5
298 태극기와 애국가 김학 2018.11.18 10
297 왜가리 이연 2018.11.18 8
296 신뢰의 그림자 한성덕 2018.11.18 6
295 숲을 거닐다 이연 2018.11.17 9
294 새벽닭이 나를 깨워 윤근택 2018.11.16 5
» 초롱석란 이희석 2018.11.16 2
292 태극기와 애국가 김학 2018.11.15 3
291 아름다운 관계 김학 2018.11.15 3
290 가을 나들이 김효순 2018.11.13 5
289 분홍색 목소리 김성은 2018.11.13 9
288 털머위꽃 백승훈 2018.11.1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