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그림자

2018.11.18 08:31

한성덕 조회 수:6

신뢰의 그림자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한성덕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지성인을 꼽으라면 이어령 박사를 빼놓을 수 없다. 한 때는 그 분의 글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근래에 이르러 이어령 박사는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성인이면 집에서 찬송이나 부르고 성경을 읽으면 되지 ‘굳이 교회를 가느냐?’며 비난조의 말을 한다고 했다. 예수 믿는 티를 내지 말라는 충고(?)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교회를 왜 가느냐?’는 말에 이 박사는 나름의 철학을 들려준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식당에, 뭔가 알고 싶으면 도서관에. 심심하면 극장에, 그리고 아프면 병원에 간다. 그것으로 다 끝나는가? 먹어도 배가 고프고, 마셔도 갈증이 나며, 놀아도 심심하다. 많이 배워도 답답하고, 병원에 다녀와도 의사를 또 찾는다. 그래서 교회를 간다.’고 설명하자, 사람들이 말문을 닫더란다.  

  재차 공박했다. ‘싸우고, 소송하고, 세습하고, 사교집단처럼 이상한 짓을 하는 교회들이 있는데, 그래도 다닐 건가?’ 교회 무용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말이다. 그 때도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과 손가락질을 받고 원성이 높은 게 사실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 영혼이 메마른 자들의 갈 곳은 교회가 아닌가? 부패한 교회가 있다고 해서 가지 말라는 것은, 의사의 오진으로 사람이 죽었으니 병원에 가지 말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되레 반박했다.

 이어령 박사는 과연 ‘문화의 전달자’요, 여러 분야를 두루두루 섭렵한 이 시대의 어른이자 학자답다. 그렇다 해도 기독교신자로서는 초보자요, 평신도에 불과한데 답변이 간결하고 명쾌하다. 목회자다운 사상과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게 감탄스럽다. 어쨌든 그 분의 기독교 입교는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며칠 전 인천의 한 교회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졌다. 교회에서 중고등부와 청년부를 맡은 목사가 피해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미끼로 성폭력을 가했다는 의혹이 불거져 충격을 주었다. 매스컴은 ‘그루밍(grooming) 성폭력’이라고 글을 올렸다. 그루밍 성폭력이란, 대체적으로 피해자와 깊은 신뢰를 쌓은 뒤 갖는 성폭력을 뜻한다. 일반적인 성폭력과 달리, 우월한 지위에 있는 자가 연령이 낮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대를 선정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유대관계를 형성한 뒤 성적으로 착취하는 형태를 가리킨다. 이런 경우는 성폭력이 있어도 합의했다고 주장하면 처벌이 쉽지 않다.  

  아직은 정확한 개념도, 법적 규정도, 어떤 제도적 장치도 확립돼 있지 않은 상태다. 그 목사는 이 점을 악용했더란 말인가? 그것도 자기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에서 말이다. 누구보다 신뢰하고 의지했던 자식이었을 텐데 아버지의 턱밑에서 칼을 들이댄 격이다. 목회의 자질도, 인격도, 상식도, 개념도 없는 비이성적 행동이다. 세상 법 이전에 ‘양심’과 ‘성경의 법’이 엄연히 존재하거늘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단박에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잖아도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비아냥거리는 상황인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일파만파로 퍼졌으니 무슨 변명을 하겠는가?

 

  목사이기 전에 기독교신자요,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속이 쓰리다. 여기저기서 쑥덕거리고, 이 산 저 산에서 메아리친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저리다. 더욱이 가해자의 신분이 목사여서 동역자라는 게 더없이 창피스럽다. 이런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제 얼굴에 침 뱉기요, 제 살을 깎아내는 것인 줄 왜 모르겠는가? 뭇매를 맞고 도리깨질을 당해도 싸다. 그러나 덮어서도 안 되지만 덮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잘못된 신뢰를 방치하거나 얼렁뚱땅 넘어갈 것은 더더욱 아니다. 뾰족한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닌데,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침묵하고 있으면 돌들이 소리칠 것 같아서 용기를 냈다.  

  앞서 이어령 교수를 언급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사람들의 이런저런 소리를 뒤로하고 기독교에 입문하신 분이다. 신뢰를 바탕으로 믿음의 틀을 다져가는 기독교에서 이 같은 일이 발생했으니, 기독교에 갓 들어온 학자로서 얼마나 가슴이 미어터질까? 신뢰의 어두운 면을 보여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따라서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분의 고견을 듣고 싶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지고, 환부를 도려내야 새살이 돋아난다.’는 말이 있지마는, 기독교 내에 길게 뻗은 신뢰의 그림자가 쉽사리 사라질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하며 더 괴롭다.

                                                            (2018. 11. 18.)

 

     

 

댓글 0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07 웃지 않는 사람들 한성덕 2018.11.23 7
306 농부, 빵모자를 쓰다 윤근택 2018.11.23 4
305 가치있는 노년의 삶 백남인 2018.11.23 5
304 김밥, 그 하루살이 홍성조 2018.11.22 7
303 전북노래자랑과 어머니 김윤배 2018.11.21 2
302 어머니를 그리며 백남인 2018.11.20 8
301 받아들여야 할 운명 김현준 2018.11.20 4
300 YS, 그 대도무문의 추억 김정남 2018.11.20 6
299 글로 그린 가을 모악산 정석곤 2018.11.19 5
298 태극기와 애국가 김학 2018.11.18 10
297 왜가리 이연 2018.11.18 8
» 신뢰의 그림자 한성덕 2018.11.18 6
295 숲을 거닐다 이연 2018.11.17 9
294 새벽닭이 나를 깨워 윤근택 2018.11.16 5
293 초롱석란 이희석 2018.11.16 2
292 태극기와 애국가 김학 2018.11.15 3
291 아름다운 관계 김학 2018.11.15 3
290 가을 나들이 김효순 2018.11.13 5
289 분홍색 목소리 김성은 2018.11.13 9
288 털머위꽃 백승훈 2018.11.1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