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을 하면서

2018.11.26 10:35

변명옥 조회 수:16

김장을 하면서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금요반 변명옥

 

 

 

 

 감나무 잎새를 흔드는 바람이 쏴아 소리를 낸다. 감이 빨갛게 낯이 들 때면 서서히 겨울 준비가 시작된다. 옷깃을 파고드는 썰렁한 바람이 겨울옷과 땔감, 겨우내 먹어야 할 김장 준비를 서두르게 만든다. 점점 심술궂어지는 날씨가 언제 눈을 퍼부어 꼼짝 못하게 가두어 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계절에 태어나서인지 가을이 되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 늦가을에 그리운 기억도 오색 양념으로 버무려 김장김치처럼 차곡차곡 기억의 저장고에 쌓아 두었다가 쓸쓸할 때마다 꺼내어 보아야겠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김장을 하고 있는데 만삭인 엄마가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 사람들이 놀라 달려가 보니 엄마 혼자 나를 낳았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내 생일 쯤에 나도 이웃들도 김장이 한창이다. 집집마다 곰삭은 젓갈 끓이는 냄새가 골목을 가득 메우고 배추를 다듬고 씻느라고 바쁘다. 우리 동네는 단독주택이 많아 음식냄새가 골목으로 퍼진다. 젓갈냄새를 맡아보면 김치 맛을 가늠할 수 있다. 냄새가 구수하고 들쩍지근하며 비린내가 없어야 한다. 비린내와 큼큼한 냄새가 나면 그 김치 맛은 보나 마나다. 겨우내 밥맛을 책임지는 반찬이니 신경이 쓰인다.

 

  신태인에 사는 남편의 친구가 농사지은 배추를 뽑아놓았다고 가져가라고 연락이 왔다. 속이 안 찼다고 했지만 크기도 알맞고 배추 줄기도 두껍지 않아 딱 좋았다. 액젓과 새우젓, 마늘과 고춧가루 모두 준비되어 있으니 김장 담글 일만 남았다. 배추를 실어다 마당에 쌓아놓고 밤새 서리가 내려 얼지 않도록 비닐로 덮어 꼭꼭 여며 놓았다. 내일 새벽에 일어나 반씩 갈라 소금에 절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금요일 눈을 뜨니 새벽 415분, 마당에 불을 켜놓고 다듬고 소금물을 만들어 절이고 있으니 남편이 잠을 깨고 나와 도와주었다. 50포기라지만 속이 꽉 차지 않아 예년에 비해 많지는 않다. 보통 7080포기 정도는 하니까…. 두 식구에 무슨 김치를 그렇게 많이 담그느냐고 의아해하지만 옆에 사는 사위가 김치를 워낙 잘 먹고 나이 많은 친정고모와 친구 등 나누어 먹을 곳이 많다. 조금 힘들어도 맛있게 먹고 고마워하니까 기분이 좋다. 사실 50대 초반까지 김치를 전혀 담그지 않았다. 시골에 사시는 시누이가 워낙 맛깔스럽게 담가 주시고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김치만 해도 넘쳐났다. 직장생활 하느라 바쁘니 김장을 못할 것이라고 대여섯 포기씩 담가주어 공짜로 얻어먹었다. 여러 집에서 들어오는 김치의 다른 속 재료 덕에 갖가지 맛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특히 가을이 되면 들통에 하나 가득 김치를 가지고와 겨우내 먹도록 해준 아양동 아주머니의 김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어떻게 배추와 양념이 그렇게 잘 어우러져 감칠맛 나게 김치를 잘 담그는지 감탄이 나올 정도로 김치가 맛있었다. 시누이의 나이가 많아 김치를 못 담그게 되자 아양동 아주머니를 모셔다 김치를 담갔다. 몇 번의 김장을 해 보니 아양동 아주머니의 김치 담그는 비법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양념을 만들 때 절대 질게 하지 않았다. 양념을 바가지로 떠서 옮길 적에 바가지에서 잘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되게 만들었다. 그렇게 김치를 담가야 김치 국물도 거의 안 생기고 김치 맛의 변화도 적었다.

 

  금요일 새벽에 절여놓고 갔던 배추를 수필 공부 끝나고 와서 오후 4시쯤 씻었다. 마당의 큰 플라스틱 통에서 씻어 넓은 판에 비닐을 밑에 깔고 차곡차곡 쌓아 밤새도록 물기를 뺐다. 내일 비가 온다지만 배추를 씻어 놓았으니 거실에서 버무려 넣으면 된다. 내일 김장 준비를 머릿속에 새기며 잠이 들었다. 김장 때문에 나들이 계획도 못 간다고 문자를 보냈다.

 

  토요일 새벽 5시에 일어났더니 아직 밖은 깜깜했다. 거실과 주방 마당에 불을 켜놓고 양념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우선 마른명태와 다시마를 넣고 육수를 끓이고 찹쌀과 들깨가루를 넣어 죽을 쑤었다. 아침잠이 많은 남편이 깰까봐 조용조용 움직였다. 육수와 찹쌀 죽을 내려놓고 나니 남편이 일어나서 “죽 끓일 물 올려놔야지?” 했다. 다 끓여놓았다고 하자 “언제 일어나 다 끓여놨어?”했다. 사과와 무로 채를 썰고 갓과 파를 썰어 놓은 것과 마늘, 생강을 넣고 육수와 죽과 액젓, 매실액을 넣어 양념을 되직하게 만들었다. 김장을 한 번 하려면 왜 그렇게 들어가는 양념이 많은지 모르겠다. 비가 올까봐 양념을 현관에 옮겨놓고 아침을 먹고 났더니 봄비처럼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다행이다. 그래도 양념을 다 섞을 동안 참아주었으니. 딸에게 빈 김치통을 가져오라고 전화하고 나서 절인 배추에 양념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고춧가루가 좋아서 김치 색이 빨갛고 이쁘다. 한 포기 양념을 발라 쭉쭉 찢어 먹어보니 달큼하고 맛이 있었다. ‘오, 올해 김치도 성공이다!’ 딸을 보고 웃으며 열심히 담갔다. 다 담그고 나니 모두 8통 반이었다. 딸네 집에 6통을 보내고 내가 2통 반을 가졌다. 양념이 많이 남았으니 배추 얻어다 또 담가야 친정 고모에게 보내고 친구들과 나누어 먹을 수 있겠다. 몸은 조금 피곤했지만 만족해하는 딸의 표정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밥 한 그릇 뚝딱 먹어치우게 만드는 김치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다. 곰소에 첫 발령을 받아 살던 주인 집 범일이 엄마의 김치는 일품이었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설픈 자취생인 나에게 범일이 엄마가 담가 주는 김치는 별미중의 별미였다. 곰소의 맛있는 젓갈과 넉넉한 범일이 엄마의 손맛이 어우러져 김치 맛이 아주 좋았다. 친정아버지가 잠깐 다니러 오셨다가 김치 맛을 보시고 대전 친정집 김장할 때 범일이 엄마를 초청해 김치 좀 담가 달라고 하면 안 되느냐고 물으셨다. 얼마나 맛있게 드셨는지 거리나 형편을 생각지 않으시고 김치 맛에 반해서 그런 부탁을 하라고 하셨다.

 

  김치가 됐던 아니면 다른 음식도 먹을 사람을 생각하며 정성을 들이면 맛있는 음식이 된다. 요즈음 ‘엄마의 집밥’이라는 TV프로그램을 보면서 많은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음식이라도 소박하게 차려주는 엄마의 집밥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 가득 들어있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 여름, 가을 때를 가리지 않고 서울로 포항으로 자식한테 보내기 위해 김치를 10여 박스씩 담가 보내던 시누이의 김치가 맛있었던 이유가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우리 집에도 김장김치와 이가 시릴 정도로 쨍한 동치미를 담가 주시던 시누이의 정성스런 손길이 그립다. 지금 김치를 담그면서 그 동안 많은 도움을 주었던 분들에게 조금씩이라도 내 마음이 담근 김치를 맛보여드리고 싶다.

                                                                          (2018.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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