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잊은 그대에게

2018.12.06 15:11

김학 조회 수: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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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잊은 그대에게

김 학







8월 6일 입추인 오늘, 전주 날씨는 C38.3도, 전국 최고 기온이다. 나는 지금 이런 삼복더위와 싸우며 ‘밤하늘의 트럼펫’이란 경음악을 감상하고 있다. 깊은 밤에 들어야 어울리는 연주곡을 무더운 한낮에 듣고 있으니 온몸에서는 땀이 솟는다. 이 ‘밤하늘의 트럼펫’은 오늘 새벽, 수필가 윤근택 씨가 메일로 보내준 음악선물이다.

이 연주곡은 나와 인연이 깊은 음악이지만, 언제나 내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런데 지난 40여 년 동안 나는 이 음악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수필가 윤근택 씨가 일깨워 주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망각의 무덤 속에 묻어두고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랜만에 이 ‘밤하늘의 트럼펫’을 감상하노라니 나는 어느새 아득한 옛날로 돌아간다. 타임머신을 타고 풋풋하던 20대 시절로 돌아가 그때의 나를 만난 기분이다. 내가 라디오 프로듀서로 일할 때, 나는 자정부터 1시간 동안 ‘밤을 잊은 그대에게’란 프로그램을 연출했는데, 그 프로그램의 시그널 음악이 바로 ‘밤하늘의 트럼펫’이었다.

나는 ‘밤을 잊은 그대에게’란 신설 프로그램을 맡자마자, 시그널을 고르려고 며칠 동안 레코드실에서 여러 가지 경음악을 들었다. 그러나 선뜻 마음에 내키는 곡이 없었다. 몇날 며칠 고심 끝에 이태리가 낳은 세계 최고의 트럼펫 연주가 니니 로소(Nini Rosso)의 ‘밤하늘의 트럼펫’을 골랐다. 그 연주가 몹시 감미로웠기에 시그널로 어울릴 것 같아 선곡을 한 것이다. ‘밤하늘의 트럼펫’과 나는 그렇게 인연이 되었다. 깊은 밤에 그 연주를 들으면 심금이 야릇해진다. 나는 지금도 그 ‘밤하늘의 트럼펫’을 들으면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방송할 때처럼 긴장되곤 한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란 프로그램은 젊은이 대상 프로그램이었다. 아나운서가 청취자들의 정겨운 엽서를 소개하고, 그 사이사이에 감미로운 팝송을 섞어서 방송하는 음악프로그램이었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는 날마다 생방송으로 진행했다. 어쩌다 녹음을 할 때는 아나운서가 밤 분위기를 살리겠다며 스튜디오에 촛불을 켜고 프로그램을 진행했었다. 프로듀서와 아나운서가 정성을 기울인 까닭에 그 프로그램의 청취율은 갈수록 높아졌다.

‘밤하늘의 트럼펫’을 연주한 세계적인 트럼펫 연주가 니니 로소는 열여덟 살 때부터 트럼펫 연주가의 길로 나섰다. 그의 고향 이태리 토리노방송국에 처음 출연한 이래 잇따라 텔레비전에 출연하면서 트럼펫 연주가로서의 지명도를 높이고 활동영역을 넓혀나갔다. 격조 높은 명쾌한 음색, 압도적인 파워로 트럼펫 연주의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했던 사람이다. 1963년 ‘트럼펫을 위한 발라드’를 발표하면서 그는 비로소 일류 연주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1965년 유명한 ‘적막의 블루스(밤하늘의 트럼펫)’ 발표와 함께 그의 인기는 절정으로 솟아오르며, 트럼펫 연주가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방랑의 트럼펫’ ‘밤하늘의 블루스’를 비롯하여 영화 ‘생과 사’의 주제가인 ‘방랑의 마치’ 등 명곡 제작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1989년 12월말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서 공연하여 팬들을 매료시킨 적도 있었다. 칸초네, 팝송, 영화음악, 세미클래식에 이르는 폭넓은 음악세계로 활동영역을 넓힌 니니 로소는 우리를 언제나 편안한 안식의 세계로 이끌어 준 영원한 로맨티스트였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연출할 때 나는 총각 프로듀서였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싶을 나이였다. 청취자들이 보내준 엽서 사연도 거의가 사랑타령이었다. 그때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L아나운서는 나에게 방송을 진행하는 1시간 동안 연애하는 기분을 갖자고 했다. 싫지 않은 제안이었다. 우리는 서로 마음을 합쳐 프로그램 제작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날이 갈수록 청취자들의 호응은 높아졌고, 노래를 신청하는 엽서는 산더미처럼 모여들었다. 그만큼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1970년대 초의 일이니, 그때는 통행금지란 게 있었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는 마음대로 거리를 돌아다닐 수 없었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방송하고 나면 새벽 1시, 나는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기사도정신을 발휘하여 L아나운서를 그녀의 하숙집까지 바래다줄 수밖에 없었다. 두 젊은 남녀가 고요한 밤의 적막을 깨뜨리는 발자국소리를 들으며 거니는 날이 지속되다 보니 그만큼 정도 깊어졌다.

나는 지금도 ‘밤하늘의 트럼펫’을 들으면 아름다운 그 시절의 추억에 젖곤 한다. 나이가 들면 몸은 늙어도 마음속의 추억은 젊은 시절 그대로 멈추어 버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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