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부엌과 아궁이

2018.12.12 05:38

정남숙 조회 수:8

현대판 부엌과 아궁이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정남숙

 

 

 

 

 

  오랜만에 시골 친정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작은아이가 올여름 새 아파트로 이사를 하며, 주방에서 사용하던 가스렌지를 가지고 내려온다는 기별이 왔다. 새 아파트 주방은 이미 최신 인덕선이 준비되어있으므로, 가스렌지는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전주로 귀향할 때 전원주택을 지어 주방을 꾸밀 예정으로 서울 넓은 아파트에서 사용하던 가재도구며 주방기구는 모두 친정집 아래채와 뒤란 창고에 쌓아놓고 있었다. 렌지를 바꾸려면 렌지대도 바꿔야 할 것 같았다. 렌지대를 사놓으려다 친정집에 맡겨둔 오븐을 쓰면 될 것 같아 오랜만에 친정집에 들렀다.

 

  작은 평수에 임시로 잠깐 사용하려고, 값싼 가스렌지를 설치했었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지 않아 거의 십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렌지도 망가졌다. 그러나 친정에 맡겨놓은 큼직한 매직오븐은 렌지 겸용이었다. 렌지대만 필요했지 겸용은 너무 커서 작은 우리아파트에는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오븐렌지를 포기하고 시간을 내어 모처럼 친정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한 것이다. 60여 호쯤 되는 친정동네다. 옛날에는 옹기종기 초가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정겨운 마을이었다. 우리 집을 중심으로 마을이름을 불렀지만, 갈라진 고샅을 따라 윗뜸, 아랫동네, 뒷터로 나뉘어 불려지던 동네다.

 

  기웃기웃 몇 집을 둘러보다 옛 동네가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초가집은커녕 집집마다 현대식 건물로 전부 탈바꿈되어 있었다. 옛날 우리가 정답게 부르던 초가삼간은 방 둘 부엌 하나인 초가집을 말한다. 옛날 시골 농가 대다수 서민들의 보통 집 구조였다. 부엌에는 어김없이 부뚜막과 아궁이가 있고, 무쇠 솥과 살강이 있어 올망졸망 주방기구를 얹어 놓으며, 부뚜막 앞 벽은 그을음이 새카맣게 덮여있고, 고래가 막히면 구들장을 뜯어서 아무렇게나 다시 바른 상처 같은 흔적의 노란 황토 흙은, 아랫목이 따뜻해진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부뚜막 한 구석에 있는 목이 긴 양조식초 옹기항아리는 땟국을 뒤집어 쓴 채 제자리를 사수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내 기대를 충족시켜줄 그런 모습의 집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소달구지를 끌고 다니던 마을 고샅길은 말끔하게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었다. 사이사이로 집안을 살펴볼 수 있는 나뭇가지 울타리는 예쁜 불록 담으로 바뀌었고, 비스듬이 빗대어있던 사립짝은 두터운 철대문으로 변했다. 괜한 욕심을 부렸나보다. 그러나 돌아오려는 내 발걸음을 붙드는 곳이 있었다. 울도 담도 없는 산 밑 외딴집이 내 눈에 들어왔다. 처마를 땅에 대고 납작 엎드린 스레트 지붕이 보였다. 누구네 집 헛간인 줄 알고 지나치려 했는데 굴뚝에서 연기가 솔솔 피어오르고 있었다. 반가워 한달음에 달려가 주인을 부르며 부엌을 찾았다. 혼자 사시는 낯선 할머니가 아궁이에 군불을 때고 있었다. 주방을 둘러보니 겉모습과 달리 시멘트로 곱게 바른 부뚜막에 양은솥을 얹어놓고 난방을 위해 군불을 때고 있었다. 자식들을 따라 대처로 나갔다가 못 견디고 다시 시골로 오셨다며 내 맘대로 할 수 있어 좋다고 하셨다.

 

  절반의 성공을 맛본 것 같았다. 땔감으로 부엌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는 게 새롭게 느껴졌다. 나도 곁에 쭈그리고 앉아 부지깽이를 찾아들었다. 장작불을 피워 가마솥에 밥을 짓는 보기 드문 풍경은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 옛날, 우리 어머니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아궁이에서 어제 땐 재를 끌어내고, 다시 불을 지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셨다. 부엌은 여인네의 공간이었던 만큼 부뚜막의 무쇠 솥이 얼마나 반들반들 윤기가 나느냐에 따라 아낙네의 바지런함이 평가되기도 했다. 남정네가 큰맘 먹고 새로 사온 무쇠솥은 짚을 삶아내는 것이 첫 일이었다. 쇳물을 우려내고 돼지비계로 기름 수건을 만들어 새솥 안팎을 반질반질하게 질을 내어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할 때마다 솥뚜껑을 반지르르 닦아 주는 것이 주부들의 자존심이고 일과였다. 부엌 살림살이 가운데서 솥은 가장 중요한 품목이었으니, 살림집을 옮길 때도 가장 먼저 떼어내고, 가장 먼저 거는 것이 솥단지였다.

 

  1970년대 말, 첫 아파트에 입주하여 집들이를 했다. 내 남편과 같이 장로 입직을 받은 형부가 자기 집에 돌아가 걱정을 했다고 한다. 새 집이라 다 좋은데 아무리 살펴봐도 부엌과 아궁이가 보이지 않으니 어떻게 살아갈까 고민된다며 걱정을 하더란다. 사람이 사는 집이라면 반드시 부엌과 아궁이가 있어야 한다고 알 고 있는 어른들에게 현대식 주방은 생소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조리공간과 생활공간이 분리되어 있어야 했었다. 또한 조리작업을 이른바 집에서 하는 일, 즉 여자가 하는 일로 분류했던 경우가 많아서 여성들의 일이라 남성과 공유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무엇보다 편의성을 추구하는 추세여서 과거처럼 특정인만 오가는 것과는 다르다. 남녀노소 누구나 주방에 출입할 필요성이 생기면서, 생활공간과 일체화되어도 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조리용 공간이란 개념은 남아있으나, 과거 부엌에 비하면 상당히 개방된 편이다.

 

  올케가 한뎃부엌에서 가마솥에 불을 때고 있었다. 주방 아닌 곳에 딴 솥을 걸고 필요할 때만 쓰는 야외아궁이다. 주로 메주콩을 삶거나 사골을 곱거나 시래기를 삶는다. 동네 한 바퀴 얘기를 들려주며 아쉬워하는 나에게 우리 집 뒤란으로 가보라 했다. 주방 뒷문을 열면 주방과 잇대어 만든 큰 창고가 있다. 한 편에 내 주방기구 등을 보관해 놓은 곳이다. 내 물건 뒤 켜켜이 만들어 놓은 철제선반 위를 보라했다. 내가 보고 싶어 하던 주방 기구들이 소복이 보관되어 있었다. 나무 뒤주는 알고 있었지만 떡메와 안반, 절구, 떡살과 다식판, 맷돌과 풀매, 밀판과 홍두깨, 시루, 용수, 확독, 함지박, 자배기, 소래기, 보시기, 뚝배기, 바가지, 뒤웅박, 물동이, 물지게 등, 음식이나 물을 담거나 나르던 도구다. 똬리, 맷방석, 메주틀, 석쇠, 시루밑, , 풀무, 삼발이, 부젓가락, 고무레 등 옛날 부엌에서 흔히 사용했던 도구들이 가득했다.

 

  업은 아이 3년 찾는 꼴이 되었다. 동생과 올케가 옛날에 쓰던 도구들을 버리지 않고 그동안 고스란히 모아 두었던 것이다. 대를 갈라 만든 복조리와 박 바가지, 칼질에 한 쪽이 푹 파인 도마와 같은 기본적인 조리기구에서부터, 엄마가 쓰시던 80년이 넘은 브라더 미싱까지 살림에 필요한 크고 작은 무수한 세간들을 창고 속에 고이 간작하고 있었다. 눈 호강을 시켜준 동생내외가 한없이 고마웠다. 옛것이 그리울 때면 언제나 부담 없이 찾아가 마음을 달래며 풍요를 맛볼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현대문명에 떠밀려 재래식 부엌과 아궁이가 사라졌지만, 편리한 주방이란 공간과 가스렌지가, 추억의 부엌과 부뚜막을 대신하고 있지 않은가, 남자들이 드나들어도 고추가 떨어지지 않는 현대판 부엌과 부뚜막은 이제 남녀 주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2018.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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