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을 여는 일곱 개의 열쇠

2018.12.20 05:56

손광성 조회 수:4

대상을 여는 일곱 개의 열쇠
--대상의 본질에 이르는 방법

손광성


 대상이란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말합니다. 따라서 글쓰기란 대상과 주체 즉 세계와 나의 관계라도 하겠는데, 세계는 나를 자극하고 나는 그 자극에 끌려 세계를 탐색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계 즉 대상은 자신의 본질을 쉽사리 누설하지 않습니다. 털어 놓는다 해도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그 정도를 달리 합니다. 시각, 관점, 방법 그리고 그 위에 엄청난 열정, 그러니까 주체가 가지고 있는 그릇의 크기만큼, 노력의 크기만큼만 대상은 자기를 줍니다. 같은 대상을 다루었더라도 그 수준이 같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체로서의 내가 어떻게 하면 대상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이 되겠습니다. 대상의 본질이 숨겨져 있는 곳간 문을 여는 데는 열쇠가 필요합니다. 일곱 가지 열쇠가 필요합니다. 이 열쇠에 대해서 차례로 말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집필 이전 단계에 속하는데, 이 단계의 성공 여부가 다음 단계인 집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므로 글쓰기에 있어서 중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1.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사고

 대상의 본질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사고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대상을 여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요기서 말하는 사고란 말은 우리가 보통 같은 의미로 쓰고 있는 생각이란 말과 구분하고자 합니다. 사람이라면 생각을 하지 않고는 하루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고는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습니다. 사고를 하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20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생각은 지속성도 논리성도 없지만 사고는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생각은 마치 빨랫줄에 앉은 참새와 같아서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합니다. 빨랫줄에 앉았던 참새는 금세 미루나무 꼭대기에 가서 앉았다가 다시 길을 건너 정미소 환기창에 가 앉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이 대상에서 저 대상으로 옮겨 다니고서도 대상의 본질에 이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어떤 화두를 붙잡고 늘어지듯 대상에 대해서 지속적이고 집중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면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좋은 글은 대상에 대한 지속적 사고의 결과물이라 하겠습니다. 다음은 저의 졸작 <수련>중 일부입니다.

이렇게 사흘 동안을 피고 잠들기를 되풀이하다가 나흘째쯤 되는 날 저녁, 수련은 서른도 더 되는 꽃잎을 하나씩 치마폭을 여미듯 접고는 피기 저 봉오리였을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처음 보는 사람은 봉오리인 줄 착각하기 십상이지만 주의하여 보면 그렇지 않음을 곧 알게 된다. 피기 전에는 대공이 끝에 반듯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지만 지고 있을 때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비녀꼭지 같다고나 할까.  아니면 기도하는 모습이라고 할까. 마치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마지막 애도의 눈길이라도 보내고 있는 듯한 그런 모습으로 조용히 고개를 떨구고 있는 것이다.


어떤 후배가 이 글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바라 보았을까?”하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근 10년 가까이 수련을 가꾼 후에 이 글을 썼던 거 같습니다. 그 동안에 수련의 모든 비밀은 아니지만 그 일부나마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와 함께 공부하는 사람 가운데 한 분이 전봇대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의도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어느 거리를 택해서 그곳에 있는 전봇대를 아홉 개만 조사하십시오. 거기 붙어 있는 온갖 광고지와 안내문과 낙서를 조사하고 분석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합니다. 한 시간 또는 열 시간 아니, 하루 종일 전봇대를 지켜 보십시오. 지나가던 개가 오줌을 싸기도 하고 술 취한 사람이 이마를 대고 한동안 울다 가기도 할 것입니다. 가로등 아래에서 외롭게 밤을 지새우는 모습도 보십시오. 그런 모든 것을 본 다음에 글을 쓰십시오”

우리는 자주 글의 소재가 없다고 투정합니다. 소재는 우리 주변과 우리 머릿속에 널려 있습니다. 다만 그것에 대해서 깊이 사고하지 않기 때문에 소재가 생각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의 대상을 붙잡고 집중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사고하면 대상은 마침내 자기의 비밀을 다 털어놓고 말 것입니다. 이 집중적 사고의 과정은 몇 분이나 몇 시간 또는 며칠이 될 수도 있고, 1년 또는 10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대상의 본질에 도달 할 때까지, 아니면 그 대상에 대해서 쓰기를 포기 할 때까지 사고의 시계 바늘은 계속 돌려야 합니다.
 

2.    대상과의 거리 조정

아무리 지속적 사고로 대상을 보더라도 대상과의 거리를 잘못 조정하면 대상의 본질을 놓치고 맙니다.  여기서 거리란 대상과 주체의 심리적 거리를 말합니다. 아니, 거리는 때로는 시간적 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바로 쓰느냐, 얼마 동안 시간이 경과한 후에 쓰느냐 하는 것이 바로 거리라는 것입니다. 대상과의 알맞은 심리적 또는 시간적 거리, 이것이 두 번째 열쇠입니다. 거리를 너무 가깝게 잡으면 대상의 본질이 왜곡될 뿐만 아니라 감상에 빠지기 쉽습니다. 너무 멀리 잡으면 차디찬 글이 되고 맙니다. 알맞은 거리에서 대상을 보아야 대상의 본질 즉 참모습이 왜곡되지 않고 제대로 보입니다. 다음 글을 보겠습니다.

아아, 이상도 할사. 내 고향은 바로 네로구나. 네가 바로 고향일 줄이야 꿈엔들 꿈꾸었으랴. 이 일이 웬일인가? 이것이 꿈인가. 꿈 깨인 꿈인가? 미칠 둣한 나는 방금 네 속에서 내 고향을 보았노라. 천추의 감격과 감사의 기적적 순간이여. 이윽히 벽력 같은 기적의 경이와 환희에 놀란 가슴 어루만지며 침두에 세워 둔 가야금 이끌어 타니, 오동나무에 봉이 울고 뜰 앞에 학이 춤추는도다. 모두가 꿈이요, 꿈 아니요, 꿈 깨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만상이 적연히 부동한데 뜰에 나서 우러러보니 봉도 학도 간 곳 없고, 드높은 하늘엔 별만 총총히 빛나고 땅 위에는 신음하는 거위의 꿈만이 그윽하고 아름답게 기었고녀……
꿈은 깨어 무엇하리.          오상순 <짝 잃은 거위를 곡하노라> 
 

이 글은 짝을 잃은 거위의 슬픔에 대하여 표현하려고 했으나 자아도취적인 감상에 흘러 정작 짝을 잃고 밤새워 이리저리 헤매는 거위의 슬픈 모습이 충분히 표현되지 못 했습니다. 들뜬 문장에는 작가의 감상적 영탄만 넘쳐흐를 뿐이지요. 대상과의 심리적 거리를 제대로 잡지 못해서 일어난 결과입니다.

왼손잡이였던 어머니는 북달이 메주콩 씨앗을 담은 종구라기를 옆에 끼고 먼저 왼발 뒤꿈치로 오른발 앞에 자국을 찍는다. 재빨리 제자리로 오면서 콩 서너 알을 떨어뜨린다. 오른발로 스치듯이 슬쩍 흙을 덮고 다시 그 발로 왼발 앞에 자국을 찍는다. 왼발은 오른발을 오른발은 왼발을 번갈아가며 포곡포곡 콩을 심었다. <중략> 이랑 따라 굽이를 돌아가는 어머니의 뒤꿈치 확에 콩과 함께 콩꼬투리 같은 자식을 희망의 씨앗으로 꼭꼭 숨겼을 것이다.                권순옥 <어머니의 콩밭>

콩을 심고 있는 어머니의 행동묘사가 치밀합니다. 문장은 들뜨지 않고 차분합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자칫 감상에 젖을 수도 있었지만 감정을 여과시켜 절제된 문장으로 주제를 잘 형상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앞의 <짝 잃은 거위……> 와 달리 거리를 너무 바투 잡지도 그렇다고 너무 멀리 잡지도 않고, 알맞은 거리를 잡은 결과라 하겠습니다.

거리를 너무 멀게 잡은 글의 예문은 생략하기로 합니다. 다만 어어령의 대부분의 수필이 그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대상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비교 대조하는 것이 그의 문체 전반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체감 온도가 찹니다. 이런 글을 머리로 쓴 글이라고 합니다.

대상과 알맞은 거리를 나타내는 말에 관조(觀照)와 명경지수(明鏡止水)가 있습니다. 관조란 대상을 마음의 동요 없이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명경이란 깨끗한 거울을 말합니다. 지수란 흐르지 않는 물 즉 고여 있는 물을 말합니다. 때가 낀 거울은 미인의 얼굴을 제대로 비추지 못하고 여울물은 개울가에 선 포풀러를 제대로 비추지 못합니다. 따라서 마음 상태가 어떤 선입관이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맑고 깨끗할 때 대상의 본질이 제대로 비치는 것입니다. 어젯밤에 사랑하는 사람을 여의었다고 가정합시다. 감정이 복받치겠지요. 그런 때 글을 쓰면 그 글은 실패하기 쉽습니다. 시간적 거리는 심리적 거리와 맞먹습니다. 몇 달 아니, 몇 해를 두고 삭이고 숙성시키십시오. 그런 다음에라야 대상의 본질이 가감 없이 보일 것입니다. 


3.    대상에 대한 구체적 관점

 대상을 볼 때 우리는 두 가지 관점에서 봅니다. 숲을 보는 방법과 나무를 보는 방법입니다. 하나의 숲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멀리서 보아야 그 위치와 면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시적으로만 본다면 그 숲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숲 속에 들어가 나무 하나하나에 대해 관찰해야 하고, 나무의 종류와 냇물의 위치와 수질 등을 조사해야 하며, 어떤 애벌레가 기어 다니며 어떤 야생화가 피어 있는지도 눈여겨봐야 합니다. 그런데 글을 처음 쓰는 사람들은 숲을 본 이야기만 합니다. 문학은 개괄적 설명이 아니라 구체적 묘사요 서술입니다. 다음 글을 보겠습니다

가계부에는 각종 수입과 지출란 외에도 곗돈을 적는 난이 따로 있었다. 67년도 1월분 남편 월급이 18,150원이었다. 거기에 보너스로 16,250원이니 총 수입이 34,409원, 당시 공무원 월급이 5,000원 정도였으니 남편 월급이 꽤 많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은 60년대 탄광은 국가기간 산업인데다가 사고가 잦아 위험수당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때 고생은 필설로 다할 수가 없다.        안숙 <지난 시절 가계부를 보며> 

이 글의 밑줄 친 부분이 바로 개괄적 관점에서 모든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필설로 다할 수 없다.”라고 했는데, 이 글을 읽는 독자는 그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 실감하지 못합니다. 그저 몹시 힘들었나 보다 하고 머리로 이해할 정도지요. 가슴으로 느끼지는 못합니다. 만약 이 글의 필자가 이렇게만 썼더라면 작가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독자가 실제로 그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상황을 실감 할 수 있도록 독자를 그 상황 속에 밀어 넣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작가의 의무입니다. 독자는 이런 작가에 대해 아주 냉정합니다. 다행히도 위 글의 필자는 그 부분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 시각으로 표현해서 독자의 감동을 끌어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이제 앞에서 본 밑줄 친 부분처럼 개괄적으로 서술했을 때와 아래와 같이 구체적으로 표현하였을 때 어떻게 효과가 달라지는지 보기로 합시다. 

남편은 막장까지 내려가 일했다. 감독이라고는 하지만 공대를 갓 졸업한 20대 초반의 나이로는 힘든 노동을 감당하기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저녁에 퇴근하면 전신이 검정빛 일색이었다. 눈과 이빨만 하얗게 빛날 뿐이었다. 일간 신문에는 한 달이 멀다 하고 탄광 붕괴 사고가 보도 되었다. 막장에 갇힌 광부들이 며칠 후 구조되기도 했지만 그렇지 못하고 시신이 되어 올라올 때는 탄광촌 전체가 비탄과 통곡의 막장 속으로 매몰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벌어들인 위험 수당, 그건 목숨 값이었다. 젊어 고생은 돈을 주고 산다지만 나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렇게 구체적 관점에서 대상을 보아야 실감을 줄 수 있고, 그래야 문학적 감동을 극대화 할 수 있습니다. 대상을 구체적 관점에서 보라. 세 번째 열쇠입니다. 
 

4.    비교와 대조

지속적 사고와 알맞은 거리를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대상을 구체적 관점에서 보았다고 하더라도 대상의 본질에 이르기는 쉽지 않습니다. 대상은 자기의 속내를 쉽게 발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붙잡고 늘어진다고 해서 속내를 드러내는 일도 없습니다. 대상 즉 사물이나 사건의 본질에 도달하려면 네 번째 열쇠가 필요합니다. 그 열쇠는 바로 비교와 대조의 기법입니다.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어떤 대상과 가장 가까운 이웃 소재들을 동원한 다음 그것들을 같은 레벨에서 비교하고 대조함으로써 그 본질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서산 위에 잠깐 나타났다 숨어버리는 초생달은 철모르는 처녀 같은 달이지마는 그믐달은 세상의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나중에는 그 무슨 원한을 품고서 애처롭게 쓰러지는 원부와 같이 애절하고 애절한 맛이 있다. 보름의 둥근 달은 모든 영화와 끝없는 숭배를 받는 공주와 같은 달이다. <중략> 그는 고요한 꿈나라에서 평화롭게 잠든 세상을 저주하며 홀로 머리를 풀어뜨리고 우는 청상과 같은 달이다. <중략> 내 눈에는 초생달 빛은 따뜻하고 황금빛에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듯하고, 보름달을 쳐다보면 하얀 얼굴이 언제든지 웃는 듯하지만 그믐달은 공중에서 번뜻하는 날카로운 비수와 같이 푸른 빛이 있어 보인다.                    나도향  <그믐달>

그믐달의 본질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자는 이웃 소재인 초생달과 보름달을 동원해서 비교 대조의 기법으로 그믐달의 특징과 본질을 파악했고 그것을 비유를 통해서 감동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물이나 사상은 상대적입니다. 따라서 비교 대조를 통해야 그 본질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교란 유사성을 밝히는 일이고 대조란 이질성을 밝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잘 나가던 이 글이 독자에게 혼란을 주고 말았습니다. 밑줄을 친 부분을 자세히 보면 대상을 같은 레벨에서 대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초생달의 청각적 인상을 쇳소리로 표현하고, 보름달이나 그믐달에 대한 청각적 인상을 누락하고 만 것입니다. 게다가 초생달은 황금색이라 하고 쇳소리가 난다고 한 것은 본질에 맞지 않습니다. 쇳소리는 푸른색이 도는 그믐달의 청각적 인상에 더 맞습니다. 그러니까 불완전한 관찰과 대조는 이렇게 본질에서 빗나가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웃 소재란 쓰고자하는 제재 즉 대상과 가까운 소재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등잔불에 대해 쓰고 싶으면 이웃 소재인 춧불, 전등불, 남폿불을 동원하면 등잔의 본질이 잘 드러날 것입니다. 


5.    대상에 대한 개성적 시각

 이것이 대상의 본질을 여는 다섯 번째 열쇠입니다. 개성적 시각이란 다른 말로 바꾸면 대상을 낯설게 보는 것을 말합니다. 글쓰기에서 대상에 대한 지속적 사고와 비교 대조에 의해서만 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대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그것은 늘 보아오던 익숙한 방식으로 봐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현미경적 시각’으로 보든가, 일반적 견해를 ‘뒤집어 보는’ 것입니다.

대나무에 대해서 글을 쓴다고 가정해 봅시다. 선배 문인들처럼 대나무에서 기존의 시각에서 본 가치 즉 지조나 절개를 본다면 그것은 새로운 들이 될 수 없습니다. 뒤집어보든가 꼬집어 보든가 아무튼 달리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도 대나무를 키워 보았습니다. 마당 한 모퉁이에 심어 놓고 언제 자라나 기다리는데 2년이 되는 어느 날 아침에 나가보니 마당 이곳저곳에 대나무들이 불쑥불쑥 솟아서는 깃발을 휘날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철쭉 밭도 채송화를 심은 화단도 모두 대나무가 접수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걸 뽑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깊이 한 자 되는 땅 밑으로 여기저기 자기들 세력 몰래 뻗쳐놓았던 것입니다. 제가 대나무란 제재로 글을 쓴다고 하면 지조니 절개보다 자기들의 세력확장을 위해서 몰래 물밑이 아닌 땅 밑에서 공작을 꾸미고 있는 정치인들의 음모를 꼬집는 글을 쓸 것입니다. 대나무의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성과 그 은밀한 게릴라 전법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낯설게 볼 때 모든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새롭게 보아야 새롭게 글을 슬 수 있는 것입니다. 상투적이고 상식적인 시각으로는 글이 되지 않습니다. 문학의 본질 가운데 하나가 참신성이고, 참신성은 개성적인 시각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무조건 “그림 같다”든가 아니면 “한 폭의 수채화”라든가, 맛있는 것은 무조건 “꿀맛”이라고 하고, 보고 싶은 심정은 “굴뚝같다”고 표현한다면 그건 창조적 시각이 아닙니다. 그런 글에 독자들은 이미 식상해 있기 때문입니다.

낯달을 보고 “물에 불어터진 비누 조각 같다”고 하든가, “양철 조각 같다”고 하든가, “친구의 허파를 찍은 엑스레이 필름 같다”고 하면 어떨까요? 좀 새로운 시각이 되겠지요?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백척간두 진일보 (百尺竿頭進一步)하는 심정으로 더 나은 것을 찾아 한 발 더 내디뎌야 합니다. 글쓰기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간다고 해서 추락 사고가 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시인의 <달팽이>이란 시에, “두 개의 성냥개비 같은 눈을 하고”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저는 그 구절을 처음 읽는 순간 아주 많이 감탄했습니다. 달팽이 눈을 여실하게 표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가 <달팽이>에 대해 쓸 때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달팽이 눈을 성냥개비로 비유한 것은 최선이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지요. 보조관념이 원관념과 형태상으로는 유사하지만 달팽이 눈을 성냥개비에 비유하는 순간 달팽이 눈은 그 유연성과 생명력을 잃고 경직된 나무쪼가리가 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에 “꽃의 수술”로 표현했습니다. 그러자 달팽이의 눈을 생명력과 유연성은 물론 꽃의 향기까지 덤으로 받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백척간두진일보라는 신념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6.    따뜻한 시선으로 대상 보기

 모든 사물을 살아있는 것으로 보고, 따뜻한 시선으로 봐야 대상이 우리에게 다가 옵니다. 이것이 여섯 번째 열쇠입니다. 돌은 돌이고, 나무는 나무이며, 꽃은 그냥 꽃일 뿐 감정이 없는 사물이라고 생각 하는 순간, 시도 수필도 태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하나의 쇳덩이로 볼 때 자동차도 스스로 쇳덩이기를 고집할 것입니다.

 승용차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길가에 휴게소 안내판이 보였다고 합시다. 운전자는 조수석에 탄 사람에게 보통 이렇게들 말합니다.
“우리 저기서 차에 기름도 넣고 요기도 하세.”
 이 운전자는 차를 하나의 무정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서 세 개의 단어만 바꾸어 봅시다.

 “우리 저기서 이 놈에게 여물도 먹이고 요기도 하세.”
이렇게 말하는 순간 자동차는 쇳덩이를 거부하고 생명이 있는 소나 말이나 아니면 당나귀 같은 피가 흐르고 감정이 있는 생명체로 둔갑하여 우리 앞에서 큰 소리로 울어 젖힐 것입니다. 우리의 시각을 한 번 바꾸는 순간 기적이 일어난 것이지요. 이것이 말의 마술입니다.
 모 제약회사 사장님이 함께 점심을 하고 나오다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이 따분한 세상 어떻게 해야 재미있게 살까요?”
 제가 대답했습니다.
 “세상을 은유로 보십시오. 그러면 모두가 정답고 사랑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상은 바꿀 수 없지만 시각은 바꿀 수 있습니다. 시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 보입니다. 이런 시각은 과거 모든 시인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좋은 시를 쓸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자연물과 자연 현상 자체에 생명과 의식이 있다는 애니머티즘animatism적 시각이든, 모든 사물에는 독립된 정령이 살고 있다고 믿는 정령관animism적 시각이든, 모든 사물에는 신이 또는 신성이 내재돼 있다고 보는 범신론pantheism적 시각이든 모두 괜찮을 것입니다. 괴테나 실러나 릴케까지도 범신론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회 부조리나 물질문명의 폐단을 비판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럴 경우에도 애정을 가지고 보되 직접 칼끝을 세워 공격하지 말고 칼등으로 쳐서 깨우치게 하자는 것입니다. 우정 있는 설복 같은 것 말입니다. 이런 경우는 우의적이거나 풍자적인 수법도 한 방법이 되겠습니다. 수필이 신문 사설이나 칼럼과 다른 점은 바로 우정 또는 애정의 시각으로 보는 태도에 의해서라고 생각합니다.


7.    호기심으로 대상 보기

 일곱 번째 열쇠는 호기심입니다. 일곱 개의 열쇠 가운데 가장 작지만 가장 빛나는 열쇠입니다. 호기심이 없다면 그림을 그리지도 글을 쓰지도 않을 것입니다. 세상이 온통 재미없는 통나무거나 흙덩이가 아니면 짐승들뿐일 테니 말입니다. 호기심이 주체를 대상에게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호기심은 사람을 젊게 하고 부지런하게 하며 창조하게 합니다. 서정주 시인은 만년에 러시아로 떠나면서 공항에서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자기를 “그리워하는 사람,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호기심이 그 좋은 시들을 생산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되겠지요. 그러나 이 열쇠는 남이 주기보다 타고나는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호기심은 천부적이라고만 생각하고 포기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입니다. 호기심도 정서와 마찬가지로 계발이 가능한 덕목입니다. “정서 함양”이란 말이 있듯이 “호기심 함양”이란 말이 있어서 안 될 것도 없습니다. 이제 호기심으로 세상을 봅시다. 은유로 세상을 봅시다. 세상은 온통 글거리로 충만해 있을 것입니다.

이상에서 대상의 본질에 도달하기 위한 즉 세상을 여는 일곱 가지 열쇠에 대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글쓰기에서 집필에 들어가기 전 단계에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기본 태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좋은 글을 쓰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호기심을 가지고 어떤 대상을 알맞은 거리에서 진지하고 지속적으로 사고하되, 개성적 시각과 구체적 관점에서 볼 것이며, 그 대상과 가장 유사한 이웃 대상과 비교 대조해서 그 본질을 파악하게 되면 대상은 우리에게 자기 속내를 남김없이 실토 할 것입니다. 그 때 그것을 가지고 글을 쓴다면 우리 모두가 훌륭한 문필가가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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