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어 말못하는 금강산이

2018.12.21 05:25

김학 조회 수:3

수줍어 말 못하는 금강산이
   金 鶴



수줍어하던 천하 명산 금강산이 반세기만에 슬며시 남녘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옷을 활활 벗어제낀 알몸도 아니고, 겨우 옷고름을 풀어헤친 정도다. 기다렸다는 듯 남녘의 필부필부들은 춘하추동 가리지 않고 금강산을 찾는다. 강원도 동해항을 출발하여 북녘의 장전항을 오가는 호화여객선 봉래 호, 금강 호, 풍악 호는 연일 관광객 실어 나르기에 영일이 없다. 새천년 들어 금강산을 찾는 관광객들은 부산에서도 배를 탈수가 있다. 더구나 외국인들도 금강산 구경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금강산 관광은 더욱 활기를 띌 수밖에.
새순이 돋고 꽃봉오리 벙그는 봄에는 금강(金剛)이요, 풀과 나무가 우거지는 여름에는 봉래(蓬萊), 단풍이 붉게 타는 가을에는 풍악(楓嶽), 기기묘묘한 바위 위에 하얀 눈이 내리는 겨울에는 개골(皆骨)이라며 철 따라 고운 이름으로 불리우는 금강산은 손님맞이에 바빠 화장할 짬도 없는 모양이다. 아니 옷매무새 고칠 틈조차 없는가보다.
금강산을 다녀 온 관광객들 중에는 별의 별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다. 학생, 공무원, 사업가, 정치가, 스포츠맨, 언론인, 예술가, 농어민, 연예인 등 참으로 다양하다. 저마다 일터나 집으로 돌아가선 금강산 자랑으로 침을 튀길 것이다. 그들 중에는 문인들도 많다. 시인묵객들에겐 금강산 나들이야말로 오랜 꿈이다. 시인은 시(詩)로, 수필가는 수필(隨筆)로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작품으로 빚어 발표하고 있다. 수줍어 말 못하는 금강산이 부끄러워하지나 않을지 못내 걱정이다. 작품의 수준이 높다면 이야 무슨 걱정이랴 만 그렇지 못한 것들이 버젓이 지면에 활자화되고 있으니...... 금강산에 다녀오면 누구나 작품으로 남기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 마련이다. 잘만 쓴다면 한두 편이 아니라 수십 편을 쓴다고 누가 탓하랴. 최남선, 이광수, 정비석 같은 문호들이야 금강산을 소재로 하여 한두 권의 책을 펴낸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러나 그분들은 금강산이란 소재를 남용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그분들은 비록 일제시대라고는 하나 넉넉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금강산을 둘러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의 금강산 관광은 어떤가. 남북 분단상황일 뿐 아니라 일정도 고작 3박4일이다. 더구나 배를 타고, 가는 날 오는 날을 빼고 나면, 금강산에 오를 수 있는 날은 고작 이틀뿐. 금강산은 원래 외금강과 내금강, 해금강 세 갈래로 나뉘고, 또 그 세 금강은 22개 구역 108개 동으로 나뉘어진단다. 그런데 온정 구역, 만물상 구역 그리고 구룡연 구역 가운데 두 군데만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둘러보고 금강산에 대한 글을 쓴다는 것은 만용(蠻勇)이요, 금강산에 대한 모독(冒瀆)이 아닐까. 나무를 보고 숲을 이야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 쉽다. 나 역시 지난 해 여름 금강산에 다녀와서 한 편의 수필을 남겼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너무 성급했다는 자괴감(自愧感)이 든다. 잘 익은 홍시가 아니라 떫은 풋감을 남기고 말았다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진다.
금강산은 그야말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명산이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에서도 애잔한 정감을 느낄 수가 있다. 나는 금강산에서 북녘동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금강산이 지금껏 태고의 순결을 간직할 수 있었을까 해서였다. 금강산은 자연 생태계의 보고다. 금강산에는 짐승이 60여 종 서식하고 있으며, 날짐승은 200여 종이 살고 있고, 식물이 940여 종이나 번식하고 있다고 전한다. 어디 그뿐인가. 천길 낭떠러지로 뛰어내리는 폭포수며 쑥 빛이 감도는 계곡의 옥류수(玉流水)는 감탄을 자아내고도 남는다. 금강산에 반해서 홀로 금강산에서 살다가 시 한 수 남기고 세상을 하직했다는 어느 일본 사람의 이야기가 가슴을 후빈다. 금강산은 원형에 가깝게 자연이 잘 보존되어 있는 산이다. 지금까지 수십 만의 남녘 관광객들이 다녀갔지만 등산로엔 담배꽁초 하나 없고, 나뭇가지 하나 꺾여지지 않았다. 경치 좋은 곳에 러브호텔이나 가든 또는 별장 한 채 들어서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다. 관광도로를 낸다고 산을 뚫거나 파헤치지도 않았다. 남녘의 지리산, 설악산, 한라산이 잘 꾸민 도시형 미인이라면 금강산은 화장 끼 없는 시골 처녀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오죽하면 북녘 금강산의 자연 감시요원들을 데려와 남녘의 환경보호요원으로 활용하면 어떻겠느냐고 농담을 했겠는가.
나는 금강산에서 내가 극히 미미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터득할 수 있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靈長)'이란 이야기는 참으로 오만방자 하고 불경스럽기 짝이 없는 인간의 허장성세(虛張聲勢)임을 깨달아야 했다. 인간은 모름지기 자숙해야 한다. 자연을 정복한다고 날뛰지 말아야 한다. 자연을 훼손하고 환경을 오염시켜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멸망으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다.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었던 장자크 루소의 선견지명이 오늘따라 자꾸 그리워진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꾸만 북적대는 도시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복잡다단한 문명으로부터 탈출하고 싶다는 욕구가 내 안에서 꿈틀거린다. 여생을 아니 일년에 단 며칠이라도 금강산의 적요한 암자에서 묵으면서 도시와 문명 속에서 찌든 때를 벗겨내고 싶다. 맑은 공기를 마시고, 청정한 산하를 굽어보며, 속세의 온갖 번뇌와 망상으로부터 벗어나 세심(洗心)의 경지로 살고 싶다.

(2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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