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지처럼

2019.01.26 06:58

이진숙 조회 수:2

묵은지처럼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이진숙

 

 

 ‘벌써 한 통을 다 비웠네! 이제 한 통밖에 남지 않았으니 아껴야 되겠다.’ 마당 한쪽 창고 곁에 있는 방에 들어가서 나 혼자 중얼 거렸다.

 해마다 김장때가 되면 먹다 남은 묵은지 처리가 문제였다. 때로는 김치가 모자란다고 하는 친지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지만, 항상 나에게 고민을 안겨주는 애물단지였다. 작년 김장때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그 전해에 담가 놓았던 묵은지가 한 통이나 남아 있었으니 가관이었다. 여벌의 김치통에 작년 묵은지를 꼭꼭 눌러서 옮겨 담으니 두 통이나 되었다. 무려 세 통의 묵은지통을 창고 곁에 딸린 방에 들여 놓았다.  

 올해는 어찌된 일인지 그가 김치전을 부치기 시작하면 식탁에 와서 턱을 받치고 앉아있곤 했다. 김치전 한 장을 부처 접시에 담아 주면 아주 달게 먹었다. 유난히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는 나는 시도 때도 없이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무엇이든 부쳐 먹었다. ‘아침부터 전을 부처 먹느냐? 그렇게 밀가루 것을 많이 먹으면 탈이 난다.’는 둥 영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 핀잔을 주곤 했었다. 그러던 그가 올해부터 식성이 변했는지 아침이든 점심때든 가리지 않고 전을 부쳐 주면 잘 먹는다.

 오늘 아침에도 표고버섯 말린 것을 물에 불려 잘게 다지고 묵은지를 한 포기 썰어 계란, 마늘, 밀가루를 넣고 휙 저어 팬에 지지기 시작하니 예외 없이 식탁 앞에 턱을 괴고 앉았다.

 며칠 전 마트에 같이 갔었는데 그곳 정육점 앞에서 계속 서성거리며 무엇엔가 잔뜩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돼지갈비였다. 살이 적당히 붙어 있고 보기에 먹음직스럽게 보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돼지고기를 별로 반기지 않으니 선뜻 사진 못하고 거기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내가 냉큼 집어 가격표를 붙이고 카트에 담았다. 앞에 가는 그의 뒷모습만 보아도 얼마나 좋아하는 지 짐작이 갔다. 집에 오자마자 마침 끼니때가 되어 돼지갈비를 씻고 묵은지 한 포기를 꺼내 숭덩숭덩 썰어 냄비에 넣고 끓였다. 끓는 냄새가 제법 그럴듯했다. 어느새 식탁 앞에 앉은 그의 손에는 소주병이 하나 들려 있었다. ‘어이구, 누가 말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소주 한 병과 밥 한 그릇을 돼지갈비 찌개와 함께 해 치웠다. 그렇게도 맛이 있고 좋을까?

 

 지금 먹고 있는 묵은지는 김장을 했을 때 유난히 맛이 있었다. 김치가 맛이 있다기보다는 그해 배추 농사가 잘 되었다. 평소 김치를 별로 먹지 않던 서울 외손자들도 다른 때보다 김치를 더 많이 가지고 갔었다. 무슨 음식이든 음식 솜씨가 좋아야지만 그것보다는 원재료가 좋아야 맛있는 음식이 된다. 그렇게 원 재료가 좋으면 솜씨가 약간 모자라도 시간이 자나면 지날수록 음식 맛이 좋아진다. 재작년에 담갔던 김장김치는 그해 배추농사가 영 말이 아니었다. 김장 때 정성껏 양념을 준비해서 담갔기에 김치 맛에 대한 기대가 컸었데 양념은 맛이 있으나 김치 맛은 영 형편없었다. 그러니 묵은지가 2년이 넘도록 애물단지 신세를 면치 못할 수밖에….

 

  비단 김치뿐일까? 사람 사는 세상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한다언제나 변함없는 사람, 방금 만나고 헤어졌는데도 금세 또 보고 싶은 사람, 한 번쯤은 만났으나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사람 등, 이 세상 사람수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 중에 묵히면 묵힐수록 감칠맛이 나는 묵은지 같은 사람이 많이 사는 세상, 그런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나는 세상에서 어떤 존재일까? 내 식구들에게는 어떤 사람일까? 그리고 헤어지자마자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안채에서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보니 그가 현관문을 열고 밥이 다 되어 가는데 뭐하고 있느냐며, 감기 든다며 빨리 들어오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한 손은 비닐장갑을 끼고 한 손에는 조그마한 김치통이 들려 있었다. ‘이런 내 정신 좀 봐! 묵은지 가지러 와서 뭐하고 있어?’ 부리나케 큰 통에 있는 묵은지 몇 포기를 담아 방에서 나왔다.

 마당을 가로 질러 걸으면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도 맛있는 묵은지 같은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을 이해 보았다.

                                                        (2019.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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