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장 담그던 날

2019.02.23 15:25

이진숙 조회 수:8

고추장 담그던 날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이진숙

 

 

 

 ‘그땐 젊었으니까 그렇게라도 해서 담갔지.’

 고추장을 담글 때마다 늘 그때 이야기를 하며 웃곤 했다. 아마 30년도 더 된 일일 것이다. 말로만 듣던 고추장을 담가 보겠다고 불린 찹쌀을 가지고 무작정 가까운 방앗간으로 갔었다. 가지고 간 찹쌀을 가루로 빻아서 시루에 담고 불에 올려 찌고 마치 고물이 빠진 인절미처럼 만들었다. 방앗간 주인이 ‘엿기름물을 가져왔느냐’고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엿기름물을 부어 가며 치대야 된다고 했다. 고추장을 먹어만 보았지 학교 다니고, 직장생활을 한다는 핑계로 고추장 담그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니 방앗간 주인이 보기에 얼마나 한심했을까?

 그것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그제야 부랴부랴 엿기름물을 만들어 부어 주니 그것이 한 살이 될 리가 없었다. 한 번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거기에 메주가루와 고춧가루를 넣고 열심히 치댔다. 그래도 힘이 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남편이 열심히 치댄 보람이 있어 고추장 흉내는 낼 수 있었다. 그 뒤로는 고추장을 만들지 않고 지냈다그땐 친정어머니도 계셨고, 살림을 도와주는 도우미도 있어서 고추장 귀한 줄 모르고 살 수가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기댈 친정어머니도 계시지 않고 나도 나이를 먹으니 고추장 된장 간장 등은 내 손으로 담가 먹고 싶어졌다. 그리고 아파트가 아닌 마당과 텃밭이 딸린 집에서 살게 되니 자연스레 김장도 직접 하게 되었다해마다 하게 되는 김장은 그래도 제법 솜씨가 느는 것 같은데 어쩌다 한 번씩 하는 고추장 담그는 일은 그렇지 못했다. 담글 때마다 살림 솜씨가 좋은 친구들에게 묻거나 무엇이든 잘 알려주는 스마트 폰에 있는 N에게 묻곤 한다. 그러다가 올해는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아주 오래 전 친정어머니가 찹쌀을 물에 오래오래 담아 놓고 시큼하면서도 곯은 것 같은 냄새가 날 때까지 두었다가 고추장을 담갔던 모습이 생각났다. 나도 한 번 그렇게 해 보고 싶어서 어느 날 무작정 찹쌀을 씻어서 물에 담아 놓았다.

 살림 잘하기로 소문난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곯은 찹쌀로 고추장 담그는 방법을 물으니 ‘글쎄….’ 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찹쌀 담근 물을 버리지 않고 썼던 기억 외엔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럭저럭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찹쌀을 물에 담근 것도 잊은 채 한 20일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생각나서 부랴부랴 엿기름물을 거른다, 메주가루를 준비한다 하고 부산을 떨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조금 이른 아침밥을 먹고 단단히 채비를 하고 마당으로 나갔다. 포근한 날씨 덕분에 수도가 얼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고 묵혀 두었던 아궁이에 걸린 무쇠솥도 철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 닦아서 씻고, 그는 불 땔 장작을 날라다가 아궁이 가득 넣었다. 엿기름물을 솥에 붓고 따뜻하게 불을 땐 다음 불린 찹쌀을 물에서 건져 솥에 넣었다. 그때부터 시간과 나의 노동력이 진가를 발휘할 때가 된 것이다. 행여 바닥에 눌러 붙지 않을까, 끓어 넘치지는 않을까, 조바심을 치며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연신 찹쌀 담근 물을 부어 가면서 힘껏 저어 주었다. 한참을 저어 주고 나니 허리도 아프고 손목 어깨 등 아프지 않은 곳이 없고 슬슬 꾀가 나기 시작했다.

 

 ‘아직도 더 해야 되는지 한 번 보세요.’ 남편은 ‘조금 더 해야 돼.’라고 만 할 뿐 도무지 ‘내가 저어 줄까?’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계속 아궁이 만 지키고 앉아 있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나 내가 먼저 하자고 했는데 화를 낼 수도 없고…. 얼추 시간이 되었는지 창고에 가서 커다란 스테인레스 함지박을 가지고 와 솥에 지금까지 공들여 엿기름물과 찹쌀을 섞어 끓인 물을 퍼 담아서 창고 방에 들여 놓았다. 그리곤 아궁이에 불이 붙은 나무들을 밖으로 끌어내 놓았다. 이때다 싶어 ‘나 들어가 점실 할께!’ 하고는 쏜살같이 그곳을 빠져나와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웃으며 ‘그래? 알았어!’ 하며 나머지를 정리했다.

 점심을 먹고 나니 온 몸이 쑤시고 정신이 혼미하여 자꾸 방바닥에 등을 대고 싶어졌다. 잠깐 누워 있었던 것 같은데 그가 깨운다. 끓여 놓은 것이 식은 것 같으니 마무리를 하잔다. 창고에 가보니 평소 추위를 잘 타는 나를 위해 이미 전기보일러도 켜놓았고, 고추장 담그는데 필요한 재료들을 모두 챙겨 놓았다. 함지박에 끓여 식혀 놓은 것에 메주가루, 고춧가루를 차례로 넣었다. 그는 주걱으로 열심히 저어주고 나는 곁에 앉아 필요한 재료들을 연신 함지박 속으로 넣었다. 색이 점점 빨갛게 변해 가면서 메주 냄새도 나고 고추의 매운 냄새도 났다. 열심히 저어가면서 맛을 보더니 소금을 넣어야 된다고 하면 나는 재빠르게 소금을 솔솔 뿌려 주었다. 하다 보니 고춧가루가 조금 부족한 듯 고추장 색깔이 영 못 마땅했다. 부리나케 나갈 준비를 해서 근처 마트로 가서 고추장용 고춧가루 1kg을 더 사왔다.

 살림을 시작한지도 40년이 훌쩍 넘었는데 아직도 초보딱지를 못 뗀 양 하는 짓거리가 영 어설프다. 그는 계속 주걱으로 섞어 주고 나는 곁에서 ‘이제야 고추장 색이 먹음직스럽게 나왔다.’는 둥 역시 ‘당신이 있으니 참 수월하다’느니 계속 그에게 아양을 떨었다.

 드디어 모든 것이 한 살로 잘 어우러졌다. 마지막으로 잘 완성된 고추장에 소주 1병을 먹여야 했다. 소주가 고추장이 변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나? 고추장도 술을 마셔야 제대로 만들어 지니 술이 필요한 것은 사람만이 아니구나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제 완성된 고추장을 그릇채 그대로 놓아두고 가끔 저어가며 며칠간 기다렸다가 장광에 있는 예쁜 항아리에 담아 고추장 위에 소금을 질러 놓고 숙성되기만 기다리면 모든 것이 끝난다.

 이런 일들을 할 때마다 옛 여인들의 수고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지금이야 남편들이 내 일 네 일 가리지 않고 도와주지만 그때 남편들은 글이나 읽고 ‘에헴’하며 헛기침이나 하고 뒷짐을 지고 다녔지 모든 집안일은 아녀자의 몫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이런 고유의 장류를 보존한 우리 조상 특히 여인네들에게 존경의 마음이 생긴다.

 새로 담근 고추장은 장광에서 햇볕과 바람을 맞으며 잘 익어 갈 것이고, 고추장을 이용한 정성스런 반찬이 밥상에 올라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계속하게 되리라.

                                                       (2019.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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