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어르신들의 축제

2019.03.08 05:09

김재원 조회 수:3

고향 어르신들의 축제

                                                           신아문예대학 수필수요반 김재원

 

 

  나는 밤 10시쯤 걸음을 재촉하여 베란다로 나갔다. 저 멀리 어디에선가 들려올 것 같은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자동차 소리만 어두운 밤을 흔들고 있었다. 귀를 의심하며 얼굴을 내밀었지만 끝내 들리지 않았다. 남산 위에 떠서 우리 동네를 비춰주고, 우리 얼굴을 비춰주는 ‘쟁반같이 둥근달’마저 볼 수 없으니 왠지 쓸쓸해졌다. 다시 보고 싶고, 듣고 싶은 옛날 동네 어르신들의 풍물놀이가 발길을 붙잡아 방으로 빨리 들어올 수 없었다.

 

  정월 열나흘, 둥근 달이 얼굴을 내밀 무렵이면 어르신들의 풍물소리에 끌려 허둥대며 뛰어 나갔다. 풍물놀이 대원들이 제일 먼저 찾는 곳은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나무와 식수를 제공하는 샘이었다. 이곳에서 첫 인사가 끝나면 집집마다 부엌과 장독대, 마당에서 집을 지켜주는 신에게 인사하고, 못된 귀신을 물리치며, 풍년을 기원했다. 상쇠 어르신이 “잡귀야, 물러가거라!”고 선창을 하면 함께한 어른들의 후창은 풍물소리 못지않게 우렁차게 들렸다. 새벽녘에 오신 어르신들은 주무신 뒤 오후에 나가셨다.

 

  보름날 낮이면 우리만의 축제가 열린다. 누가 부르든 대답하지 말고 ‘내 더위!’라고 가르쳐 주셨던 할머니의 말씀을 되새기며 동네 형들과 연싸움을 했고, 불을 붙인 솜뭉치를 연에 메달아 날려 보냈다. 논두렁, 밭두렁을 순식간에 검은 천으로 깔아 놓은 듯한 ‘불놀이’는 평소와 달리 어른들의 꾸중도 없으셨다.

 

  정월 대보름 날 오후, 어르신들의 축제는 또 시작되었다. 짚으로 만들었던 긴 줄로 달빛 속에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어느쪽이 이기거나 지게 되면 그들에게 축하와 격려의 풍물놀이로 모두가 만족했다. 시합이 끝나고 당산나무에 도착하기까지 어른들의 짓궂은 장난은 계속되었다. 대동단결하여 나무중간까지 둥글게 줄을 쌓아올렸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당산나무를 바라보는 어르신들의 풍물놀이는 더욱 신들린 듯했다. 당산나무에게 하직인사를 한 뒤 축제의 장으로 이동했다.

 

   초대한 집에는 이미 옆 동네 사람들까지 와 있었다. 젊은 색시로 분장한 사람의 춤사위에 웃음바다가 펼쳐졌다. 축제의 분위기는 마당의 장작불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연세가 제일 많으셨던 상쇠어르신은 꽹과리를 치지 않고서 채 하나로 풍물놀이의 전체를 이끌어가셨다. 꽹과리는 크고 작은 소리와 가락, 말없는 몸짓으로 풍물대원들을 지휘하셨다. 장구를 치던 어르신도 연세가 많으셨다. 작은 체구에도 무거운 장구를 메고 모든 장기를 보여주셨다. 주연이나 다름없는 꽹과리, , 장구 소리로 남녀노소 모두가 달빛에 취했다.

 

  나는 징을 치셨던 아버지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상쇠어르신의 고집으로 아버지께서 징을 치셔야 했다는 사실을 더 자라서 알게 되었다. 징은 꽹과리, 장구, , 소고 등 모두를 품에 안은 화합과 포용의 소리를 내어야 한단다. 가끔 고수처럼 흥을 돋구어주는 나팔수가 창공을 향해 나팔을 불면 달은 더 활짝 웃었고, 별은 힘주어 빛을 토해 냈다.

 

  민속촌에서 풍물놀이를 보며 눈을 떼지 못한 일이 있었다. 동네 어르신들의 의상은 화려하지 않았고, 상모와 채상놀이를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가락과 몸놀림은 우리 어르신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싶었다. 꽹과리와 장구를 치셨던 두 어르신께서 그동안 정월대보름의 둥근 달에 아름다운 수를 많이 놓으시다가 1970년 중반쯤 세상을 떠나게 되자 풍물놀이는 점점 시들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4대 명절 가운데 하나인 정월대보름의 민족고유의 문화를 민속촌에서 일부분이라도 볼 수 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흘러가는 세월과 함께 하나씩 우리 곁에서 멀어지고 있어 안타깝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우리 문화를 말살시키려고 ‘농악’이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풍물’과 ‘농악’의 재정립, 그리고 옛날 그 시절처럼은 아니지만 ‘더불어 사는 세상’과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가 더 한층 승화되었으면 좋겠다.

                                                              (2019.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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