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따지는 나라

2019.03.22 06:39

한성덕 조회 수:6

나이를 따지는 나라

신아문예데학 수필창작 수요반 한성덕

 

 

 

 

  나는 한씨를 유난히 좋아한다. 한씨가 한씨를 좋아하는 게 뭐 유별나냐고 하겠지만 김씨에게 김씨를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알 수 있다. 한씨는 청주 한()씨라는 하나의 본이다. 일가라는 개념 탓에 거리가 순간적으로 좁혀진다. 그런 까닭에 한씨가 잘하면 기분이 좋고, 못된 짓을 하면 심장이 뒤틀린다.

  음식점이나 중요한 자리에서는 명함을 챙긴다. 무슨 성씨인지 보는 게 취미라면 취미다. 어쩌다 한 씨가 나오면 단골이나 친구로 삼는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게 ‘어느 파() 몇 대손이냐?’와 함께 나이를 묻는다.  

  청주한씨가 한 본이지만, 우리 가문의 ‘안양공파’를 비롯해서 80여 개의 파가 있다. 그래도 한 할아버지의 자손이라는 자긍심이 대단하다. 그렇다고 여기서 한씨를 자랑하며 파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 독자들께서 단박에 내 글을 휴지통에 던져 넣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에 대하여 쓰려고 한다.

  우리처럼 나이를 중시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한씨를 만나면 먼저 파를 묻고 나이를 따지는데 비단 한 씨뿐이겠는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실례지만” 이라는 단서를 붙이면서까지 먼저 묻는 것이 나이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실례를 당연시하고 실례를 범하는 민족이다.

  나는 무주 시골의 한 동네에서 남녀 친구 20여 명이 함께 자랐다. 위아래로 한두 살은 친구여서 말을 터놓고 지냈다. ‘형’이나 ‘동생’으로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르며 그저 친구였다. 학교에서는 세 살이나 더 먹은 아이가 우리 반에 있었지만, 그 역시 친구로 지내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낯선 사람끼리 언성을 높여 싸우다가도 한쪽이 밀린다 싶으면 나이를 들고 나온다. 나이가 드러나면 “나이도 어린 것이 까불고 있어!” 하면서 기가 살아나 윽박지른다. 나이를 벼슬처럼 행사하니 얼마나 아니꼬울까? 그래도 아직까지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게 통하는 면이 있다.

  나는 어떤가? 왠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이를 따지고 관심을 가지는 게 익숙해졌다. 초면인 사람도 이야기나 식사를 하게 되면 나이를 묻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다. 아니, 속으로는 이미 나이를 계산하고 있다. 결국은 나이를 묻는데 동갑내기면 말을 트고, 두어 살 연장이면 형님으로 생각하며, 나이가 어리면 몇째 동생뻘 된다는 말로 형님 대접을 받으려고 한다. 나이로 가르마를 타고 편을 나누는 습성이 내 안에 존재한다. 대접해주는 편에서는 좋아하겠지만, 대접을 받고자하는 편에서는 그러겠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들 세대보다 나이를 더 따지는 것 같다. 하기야 1978년 총신대학교에 다닐 때도 그랬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진학했는데, 그 가운데 군 복무를 마치고 입학한 친구들 몇몇이 있었다. 나도 그 중 하나여서 형님 대접을 톡톡히 받으며 대학을 다녔다.

 

  2002년 한일월드컵축구 때, 히딩크 감독이 제일 먼저 동료의식을 바꿔놓았다. 형과 동생으로 지내는 것이 퍽 좋게 보였으나, 서열을 따지고 형에게 공을 몰아주는 모습이 거슬렸다. 그래서 일단 경기장에 들어서면 나이나 선후배를 떠나, 이름을 부르라며 ‘동료의식’을 강도 높게 외쳤다. 그래서였을까? 좋은 결과로 응수하며 국민들을 흥분케 한 바 있다.

  일찌감치 나이로 형이나 동생을 정하면, 관계에서 친밀도를 높일 수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설득력도 충분하다. 그러나 생물학적 나이가 서열을 강제한다면 부정적이다. 왜냐하면, 인간관계에서 수직적인 면보다 대등한 관계가 더 편하고 발전 지향적이 아닐까 싶어서다.  

  나이 차이는 결코 바뀌지 않는데, 하물며 나이로 정해진 서열이 변하겠는가? 그러므로 오랫동안 다져진 나이의 서열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더욱이 우리 민족의 뿌리요, 배달자손의 자긍심이라면 건전한 방향으로 잘 육성해 나가는 게 옳다.    

  히딩크는 그것을 알았다. 나이를 따지는 나라에서, 경기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잘 조화시켜 훌륭하게 대처했다. 그는 지혜자요, 명장의 반열에서 성공한 사람으로 각인된 지장임이 분명하다.                              

                                              (2019.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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